읽을거리가 떨어졌다

 

제임스 미치너의 작가는 왜 쓰는가를 읽는 중이다. 이분이 누군지 정확하게 가늠하기 쉽지 않다. 훑어보기를 통해 대충 살펴보니 하버드대와 펜실베니아대를 나온 수재다. 학자겸 편집자로 소개하고 있으며, 태평양 전쟁 시 해군 소령으로 근무한 적도 있다고 한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유명하다. 이 책 <작가는 왜 쓰는가>는 죽기 전 4년 전에 쓴, 그러니까 그의 마지막 책이자 가장 노년에 쓴 책이 되는 셈이다. 지금까지 모든 능력을 발휘하여 쓴 책이리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작가가 왜 쓰는지 말하는 책이 아니다. 그저 지나온 삶에 대한 회상쯤 될 것이다. 많은 소설을 썼는데 몇 권만 번역되어 있다. 에세이 식으로 써내려간 글은 자신의 스토리와 더불어 작가들의 평을 예리하고 첨가했다. 이 분을 이해하려면 이왕주 교수의 추천의 글이 유효하다.

 

이 책을 서평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건 나중에 다 읽고 생각해 볼 일이다. 굳이 중간에 펜을 든 이유는 눈에 들어오는 한 구절 때문이다. 바로 이 구절, "읽을거리가 떨어져버렸다." 그렇다. 읽을거리가 없는 것이다. 활자중독자들에게 읽을거리의 부재는 두려움과 무료함과 지독한 어지럼증을 일으킨다. 탁월한 작가는 지독한 독서광이다. 미치너 역시 그랬다. 그는 작가로서의 글쓰기를 소개하는 곳보다 여행 중이나 일하는 중에 책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종종 늘어놓는다.

 

그는 젊은 시절 우연하게 만났던 여성 소설가 리빙스턴 힐의 문고집 소설을 발견하고 한 권 구입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그녀의 작품은 아직도 호놀룰루 서점의 한 벽면을 가득 메운 문고본 속에 살아있다. 이미 64종이 재판되었고, 앞으로 40종이 더 나올 것이라고 한다. 나는 그것이 현학적인 학식보다는 솔직한 감정이 결국 승리를 거둔 것이라고 생각했다."(85) 솔직한 감정의 승리! 이보다는 멋진 표현은 없을 것 같다. 힐의 소설은 바로 그런 것이다.

 

활자중독자는 사냥꾼이다. 책을 찾아 종횡무진 활보하며 읽을거리가 없는지 눈에 독기를 품고 찾아다닌다. 미치너 역시 그런 사냥꾼이다. 심지어 폭식가이다. 식탁에 차려진 책을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모습에 기가 질리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의 집은 무척 가난했다. 아주 어린 시절, 그의 말대로 하면 '알파벳을 암송하기 전에 디킨스, 새커리, 리드, 솅케비치 등의 작가들을 더 먼저 알게 되었다."(100) 논리적으로 맞지 않지만 감동적인 문장이다.

 

어떤 사기꾼 같은 세일즈맨에게 속은 이모 로라가 발자크 전집을 사게 되었는데 그에게 '그 전집은 천만금보다 더 귀중한 것이었다'고 털어 놓는다. 나의 어린 시절에 종종 이런 사기꾼들이 동네마다 돌아다니고 쫌 있어 보이는 집들은 그 책들을 월부로 구입했다. 불행히 우리 집은 똑똑한 아버지 덕에 사기꾼이 발도 들여 놓지 못했다. 나에겐 이처럼 큰 불행이 또 있을까.

 

고등학교 시절 <토지>를 읽고 난 후 10년 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책을 다시 집어 들었던 나와 비교하면 미치너의 독서량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다. 먹으면 배설하는 것이 생리적 현상이니, 그가 탁월한 글을 많이 쓸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엄청난 독서에서 찾아 볼 수 있으리라. 어쨌든 요즘은 돈이 궁해 읽을거리가 떨어져 간다. 책을 절대 빌려 읽지 않는 고질병 때문에 읽기는 곧 돈과 직결된다. 아내를 닦달한다한들 무슨 소용인가. 결국 내 돈이 나가는 것을. 이럴 때는 누군가 책 사라고 수표 한 장 주머니에 꽂아 주고가길 신에게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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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지사회 읽기



정지

진입금지

금연

철조망

빨간등


우리의 일상 속에서 보이지 않게 속박하는 것들이다. 자유를 위한 속박이다. 잘 지키면 조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있다고 꼬득인다. 하기야 길가에 꽁초가 버려진 것을 보고 누가 좋아하랴. 나 같은 금연가가 음식점에서 담배냄새 맡아가며 밥을 먹는 것이 어찌 반갑겠는가. 최소한의 배려일 수도 있다. 


그런데 왜 하지 말라고 할까. 하지 않으면 벌금이 나오고, 구속된다고 겁을 줄까. 이것이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들고 굴욕적으로 만드는 이유이다. '당신의 지혜로운 선택을 믿습니다!'라고 하면 안 될까. '당신 자신의 건강을 위해 타인을 위해 금연을 부탁해도 될까요?'라고 물으면 안될까. 왜, 이곳에서 흡연시 몇조 몇항에 의거 얼마의 벌금이 부과됩니다.라고 해야할까. 




우리는 무의식 속에서 단속하고 금지당함으로 억압당하게 된다. 심적으로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인다. 나고 모르게 짜증이 나고, 화가 나는 이유는  금지사회의 암울한 풍경이다. 서로 합의하여 만들어가는 '우리'의 거리가 아니가, 단속되고 금지함으로 만들어진 '억제된 사회'가 되었다. 그래서 남의 것이 되고, 숨어서 하는 것이 더 맛있는 것이다. 불법을 저지름으로 오는 쾌감을 즐기고 싶은 심리가 작동한다. 


금지사회의 치졸함은 단속을 통한 통제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단속은 색출작업이다. 누군가의 잘못을 밝히려는 의도다. 누군가의 잘함이 아닌 못함을 지적하는 가장 비열한 방식이다. 금지는 한계를 설정하고, 권한을 축소하고,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에 염장을 지른다. 어느 아파트는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배달원들의 엘리베이터 탑승금지령을 내렸다고 한다.(기사) 기가 막힐 일이다. 놀라운 사실은 새벽기도회를 나가는 교인들이 민원을 많이 넣었다는 것. 새벽에도 배달하는 곳이 있나? 이 또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단속하회는 불가피하게 투명사회라는 가면을 쓴다. 투명하게 하자고 외친다. 그리고 그곳을 들여다보고 입을 막는다. 돈의 출처를 밝혀야 한다. 왜? 나의 경쟁자를 도와준 자를 살려 줄 수는 없는 일ㅇ다. 한병철은 '투명사회'를 '폭력'으로 단언한다. 숨어서 욕하는 재미 없이 어떻게 살란 말인가. <세상물적의 사회학>과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 역시 인간의 내면에 감추어진 욕망을 읽어냄으로 진정한 사회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해준다. 


책을 읽는 다는 것은 마치 안경을 쓰는 것과 같다. 원시용 안경과 근시용 안경이 있다. 선글라스도 있으니 여름에 쓰면 제격이다. 책을 통해 세상을 읽고 사람을 읽는다. 네 권의 책이 이 시대를 읽은 중요한 혜안을 던져준다. 필독서에 추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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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의 영성

헨리 나우웬 / 두란노 / 2004-02


인간의 본질은 관계다. 사람을 나타내는 한자인 사람 인()을 보면 두 사람이 기대어 있다. 사람은 홀로 서는 존재가 아닌 서로 기대며 살 때 사람다워진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사람이 된다. 일찍이 마르틴 부버는 -의 관계일 때 인정한 인간으로서의 존재가 확립된다고 설파(說破)했다. 고대헬라 철학을 확립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는 명언도 남겼다. 사람은 서로 맞대어 사는 상호적 관계 속에서 의미가 있다.

 

일상의 여백을 허무가 아닌 꽉 찬 의미임을 진실한 삶으로 드러낸 헨리 나우웬의 새 책이 번역 출간되었다. 두란노에서 헨리 나우웬의 일상의 예배 시리즈 3번째로 출간된 책이다. 첫 책은 일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하루의 부제를 달고 삶의 영성으로 출간했고, 두 번째 책은 예수님을 나의 집으로 삼는 하루라는 부제로 귀향의 영성이다.

 

헨리 나우웬과 조우(遭遇)7년 전 탕자의 귀향에서 시작되었다. 지독한 개혁주의자란 이름으로 자르고 베고, 쪼개고 뒤집던 날카로운 교리적 환상의 한계(限界)를 벗어나지 못해 심정 고통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우연히 집어든 탕자의 귀향은 새로운 영성의 세계로 빠져드는 문이었다. 헨리 나우웬을 읽으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렘브란트에 대한 그림 묵상을 위한 숙제의 참고도서로 구입한 책이었다. 렘브란트는 탕자의 귀향을 통해 렘브란트의 영적 순례를 내밀하게 천착(穿鑿)한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렁증이 일어나 책을 손에서 몇 번이나 놓아야 했다. 렘브란트는 곧 나다는 생각에 적지 않는 손 떨림도 동반했다.

 

이 책은 돌봄이 가지는 영적 의미를 다지듯 잘게 잘라 낸다. 아니다. 물이 스펀지에 스미듯 살포시 적셔 준다. 아담이란 장애인을 돌보는 일을 맡으면서 체득한 영적 깨달음을 풀어낸다. 마르틴 부버의 -의 관계, 즉 존재 대 존재로서의 만남을 깨닫는 것이며, 목적이 아닌 여정이라 알려 준다. 돌봄은 치료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너의 고통에 같이 아파하며 함께 머무는 것이다. 돌봄은 긍휼로 엮어지는 서로의 언어는 배우는 과정이다. 인간의 가장 저변(低邊)에 침전되어있는 불쌍히 여김으로 시작 된다.

 

돌봄(care)이란 무엇인가? 이 말의 어원인 ‘kara’라는 단어는 슬퍼하다’, ‘고난에 동참하다’ ‘고통을 나누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돌봄이란, 병들고 혼란스럽고 외롭고 고립되고 잊힌 사람들과 함께 부르짖는 것이다. 즉 그들의 고통이 내 마음속에도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24)

 

돌봄은 나도 너와 같다는 마음을 품는 것이다. 바울이 충고한 것처럼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는 사람들과 함께 웃는 것이다. 나의 여분의 능력을 그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단 기간 안에 치료해내는 목적도 아니다. 고난이 닥치면 우리는 고난을 없애 달라고 기도한다. 더 큰 믿음으로 고난을 뛰어 넘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연대를 이루는 능력’(31)이란 선물을 더 가치 있게 보신다. 해결사가 아닌 고난당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 주는 것, 그것이 긍휼이며 돌봄의 본질이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된다 하지 않았던가. 함께 하려는 마음, 고통을 함께 지려는 마음이 있어야 돌봄은 가능하다.

 

돌봄을 받는 자는 돌보는 자의 스승이다. 목적과 성취를 향하여 달려가는 우리에게 천천히 가라고, 쉬어 가라고, 나는 따라갈 수 없으니 같이 가자고 말한다. 우리는 천천히 걷는 법을 배워야 한다. 목적지를 향하여 질주하는 것을 중단하고 함께 보조를 맞추어 걷는 법을 배워야 한다. 돌봄을 통해 치료하려는 목적을 가지는 순간, 지치고 낙망한다. 만약 치료되지 않고 그의 아픔이 계속 된다면 어떻게 할까. 치료를 중단할까? 돌봄은 긍휼이기에 치료되지 않아도 함께 한다. 지루하고 답답한 시간을 인내하며 참아내는 방법을 서로에게 알려 준다.

 

돌봄을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인내의 시간을 통해 서로 존중하고 경청하고 함께해주는 진실한 관계를 가꿀 수 있다.”(43)

 

일방적인 수여자가 아닌 자신이 수혜자(受惠者)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돌봄은 기쁨의 선물이 된다. 타인을 불쌍히 여김으로 서로 기쁨을 주고받는다. 돕는 사람은 돕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도 받는 사람이다. “슬픔의 잔과 기쁨의 잔은 분리될 수 없다.”(50) 건강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대부분 무례하다. 그들의 아픔을 간과한다. 급하게 가야하는데 초보 운전자가 앞을 가로막으면 욕이 나온다. 장애인은 그들이 아닌 건강한 사람에게 불편하다. 그래서 무례해 진다. 돌보는 이는 먼저 돌봄을 받는 이에게 배워야 한다. 그의 필요를, 그의 약함을, 그의 힘듦을. 학생이 되지 않으면 결코 돌볼 수 없다. 경청은 그를 위하여 듣기도 하지만, 바로 자신을 위하여 듣는 것이다.

 

돌봄을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지려면 경청이 필요하다. 경청이란, 상대방의 학생이 되는 것이다. 교사는 그들이 가르치고자 하는 학습 내용을 학생들에게 제시할 때 오히려 가장 잘 배운다. 마찬가지로 고민이 있는 사람도 민감하게 들어주는 사람에게 털어놓을 때 자신의 이야기를 가장 잘 깨닫게 된다.”(57)

 

이렇게 하여 돌봄은 돌보는 자의 일방적 헌신이 아닌 서로의 언어를 교환하고 배워감으로 쌍방의 치유라는 완전히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가는 관문’(72)이 된다. 돌봄은 관계의 필연적 욕구다. 돌봄이 없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돌보는 자는 돌봄을 받는 자보다 결코 우월하지 않다. 그도 하나님의 자녀이고,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이다. 행위는 존재보다 앞서지 못한다. 행위는 존재 다음이다. 우리는 먼저 상대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 고통, 혼란, 외로움, 고립, 잊힌 존재가 된 심정에 공감’(81)해야 한다. 마태는 첫 번째 복을 애통하는 자로 규정한다. 천국은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곳이고,

애통할 수 있는 자만이 들어가는 곳이다.

 

긍휼은 치료가 되지 않더라도 상대를 버리지 않는 것이다. 치유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도 부정하지 않는다. 돌봄은 당신의 고통이 보입니다. 내가 그 고통을 없애줄 수는 없지만 당신을 혼자 두지 않겠습니다.”(86)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돌봄을 통해 자기희생을 싫어하는 이기적 욕망을 발견하며, 내가 더 건강하기에 나의 도움을 너에게 준다는 우월의식도 버려야 한다. 그를 통해 나를 보고, 나를 보고 그를 이해해야 한다. 결국 돌봄을 통해 연약한 형제자매와 함께 하면서 말을 들어주고 사랑으로 품으려는 노력’(93)을 하게 된다. 예수가 무의미한 우리의 삶에 함께 거하심으로 의미 있게 하였듯, 돌봄은 무가치에 대한 부정이자, 가치를 부여하는 창조적 노력이다.

 

 -두란노 헨리 나우웬의 일상의 예배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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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미친 바보


이덕무의 산문을 모아 엮은 <책에 미친 바보>가 있다. 책을 읽기를 좋아하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깨 닫을 때까지 애를 쓰고 밤이 맞도록 문장 앞에 서 있었다고 한다. 박지원은 그에게 '문을 닫고 들어 앉아 글을 읽은 지 40년 동안 그 이름이 마을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벼슬아치조차도' 몰랐다고 한다. 이덕무는 글을 읽을 뿐 아니라 깨우치기를 애쓰며, 다 읽고 나서는 손으로 베끼곤 했다. 그리고 항상 작은 책을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면서 주막이나 배에서도 보았다. 평생 읽은 책이 2만권이 넘고 손수 베낀 문자가 수백 권이라 한다. 책에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그의 앞에 서니 부끄러워진다.

















책을 찾아가는 중 그의 글을 보고 낯 뜨거워 진다.

 

"만약 나를 알아주는 한 사람의 벗을 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10년 동안 뽕나무를 심고 1년 동안 누에를 길러 손수 오색실을 물들일 것이다. 10일에 한 가지 빛깔을 물들인다면 50일이면 다섯 가지 빛깔을 물들일 수 있으리라."

 

나는 친구가 없다. 아무리 봐도 나와 마음을 나눌 이가 없다. 외롭다는 생각을 한 두 번 한 적이 아니다. 그런데 그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게으르지 않고 착실히 하겠다.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모름지기 벗이 없다고 한탄하지 마라. 책과 함께 노닐면 되리라."

 

그렇네. 책이 나의 벗이고 애인이고 가족일세 그려. 나 미처 몰랐네. 마음을 고쳐먹고 오늘부터라도 책과 즐거운 교제를 나누리라. 윤소영의 <책만 보는 바보> 역시 이덕무의 즐거운 책읽기를 소개한다. 함께 보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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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 라이어

말콤 글래드웰 / 노태정 옮김 / 김영사


2009년에 번역 출간되어 지속적인 관심과 많은 논문과 기사에서 인용된 책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이유가 뭘까? ‘성공’ ‘천재’라는 단어들이 이 책의 키워드이기 때문이다. 하루 3시간 10년이면 아웃라이어가 된다는 간단한 공식으로 정리할 수 있다. 마태복음의 법칙, 일 만 시간의 법칙 등 연습과 훈련을 통해 탁월한 위치를 점유할 수 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이 책이 그것만 이야기하는 것일까? 


저자는 서두에서 로제토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당시 미국은 65세 이상이 되면 심장마비와 심혈관 계통의 질병이 만연해 있었다. 그런데 로제토 사람들은 그런 질병이 거의 없었다. 무엇 때문일까? 여기에 호기심을 갖게 된 화자 호프는 로제토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가정을 세워 보자. 첫째는 유전이다. 둘째는 환경이다. 셋째는 ‘그 어떤 이유’ 때문이다. 꾸준히 관찰한 결과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이탈리아 남부의 농노문화를 펜실베이니아 동부 언더그로 옮겨온 로제토 사람들은 현대사회의 압박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한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로제토 사람들은 스스로 만들어낸 언덕 위의 작은 세계 덕분에 건강할 수 있었다.”


저자는 여기서 생각을 확장시킨다. 개인이 아닌 문화와 주변 사람, 출신, 가치관을 함께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것을 성공에 대한 이해로 확장 시키고 있다. 건강을 성공으로 치환시켜보자. 성공도 개인이나 혼자만의 노력이 아닌 여러 가지 조건과 환경이 맞물려 일어나는 결과인 셈이다. 자 그렇다면 그의 논리를 따라가 보자.


1. 마태복음 효과: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있는 것 까지 빼앗기리라.


‘마태복음 효과’로도 부르는 이 효과는 성경 신약의 한 권인 마태복음에 나오는 비유에서 따온 것이다. 이런 내용이다. 어느 곳에 왕이 있었다. 왕이 먼 타국으로 당분간 여행을 떠난다. 떠나기 전에 종들을 불러 놓고 세 명의 종들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기고 간다. 왕이  없는 동안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은 다섯을 남겨 열 달란트가 되고, 두 달란트 맡은 종은 두 달란트를 남겨 네 달란트가 된다. 그러나 한 달란트 맡은 종은 마음이 상해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둔다. 왕이 돌아와 한 달란트 맡은 종을 책망하면서 그 종이 가지고 있는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지고 있는 종에게 준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저 종에게서 돈을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종에게 주어라.' 가진 사람은 더 많이 받아 풍성하게 될 것이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신약성경 마태복음 25:28-29)


있는 자는 더 받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긴다. 무슨 말일까? 저자는 2007년 청소년 월드컵에 진출한 체코슬로바키아 청소년 국가 대표 팀의 생일을 찾아보았다. 놀라운 사실은 모두 21명의 선수 중, 1월생이 6명, 2월생이 6명, 3월생이 4명이다. 또한 9월 이후의 선수는 단 한 명도 없다. 무엇을 의미할까? 생일이 빠르다는 것은 생육이 빠르다는 것이며, 또래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즉 95년 1월생이 94년 12월생보다 실력이 좋다는 말이 된다. 통계가 보여주는 의미는 또래보다 실력이 좋은 아이들을 선호하고, 그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 많은 경험의 기회가 더 많은 연습과 훈련을 받을 수 있게 하고, 결국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낸다.


반대로 생각하면 늦게 태어난 아이는 적은 기회가 주어지거나 아예 한 번도 기회를 잡지 못한다. 말콤글래드웰은 이것을 ‘마태복음의 효과’로 명명하고, 천재는 타고난 천성과 많은 훈련 시간을 통해 만들어 진다.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다시 말해 미래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특별한 기회를 얻어낸 사람이 성공을 거두게 된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최고의 부자들을 세금환급 혜택을 가장 많이 받는다. 최고의 학생들은 최고의 강의를 듣고 피드백을 받는다. 그리고 9-10세 어린이 중 덩치가 큰 아이들은 최고의 코치로부터 훈련을 받는다.”(45쪽)


2. 일만 시간의 법칙: 한 번의 기회는 또 다른 기회를 부른다.


작은 성공이 큰 성공을 부른다는 말이 있다. 작은 성공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을 갖고 더 많은 연습과 훈련을 통해 더 잘하려고 한다. 성공의 쾌감은 더 큰 쾌감을 얻으려 더 노력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도 있지 않는가. 작은 성공을 맛본 사람은 더 큰 성공을 향해 나아가지만, 한 번 실패의 쓴 맛을 본 사람은 실패가 두려워 주저앉는 경우가 많다. 성공은 성공을 부르고, 실패는 실패를 낳는다. 이곳에서 일만 시간의 법칙이 만들어 진다. 


1990년대 초 안데르스 에릭손은 ‘재능 논쟁의 사례A’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먼저 세 부류로 나누었다. 첫 번째 그룹(A)은 ‘엘리트’로 장래에 세계수준의 솔로 주자가 될 수 있는 학생들이다. 두 번째 그룹(B)은 그냥 ‘잘 한다’는 평가는 받는 학생들이고, 나머지 그룹(C)은 프로급 연주를 해본 적이 없고 공립학교 음악교사가 꿈인 학생들이었다. 그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한다.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집어든 순간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낳은 연습을 해왔습니까?” 


대부분 5살 전후로 시작한다. 초기는 일주일에 두세 시간씩 한다. 그러나 여덟 살이 될 즈음 변화가 일어난다. 가장 탁월한 A그룹은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연습한 것으로 나왔다. 그들은 아홉 살 때 일주일에 6시간, 열 살 때 12시간, 열네 살 때 16시간으로 연습시간을 점점 늘려 나갔다. 이들이 스무 살이 되었을 때는 일주일에 서른 시간을 연습했다. 결국 이들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A그룹의 학생들은 1만 시간의 연습을 하게 된다. 반면 잘하는 학생은 8,000시간, 음악교사가 꿈은 학생들은 4,000시간을 연습하게 된다. 일만 시간의 법칙은 이렇게 만들어 진다.


3. 일 만 시간을 만드는 법칙: 유산(문화)


결론을 내보자. 재능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재능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곳에 일만 시간의 훈련 시간이 필요하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는 속담처럼 시간과 실력은 정비례(正比例)한다. 비틀즈의 경우를 보자. 1960년 그들은 그저 열심히 노력하는 고등학교 록 밴드였다. 그들은 독일의 함부르크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그들은 그곳에서 환경은 그리 좋지 않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연습 시간이 많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일주일에 7일 밤을 연주했습니다.”(피트 베스트, 비틀스의 드러머) 그들이 처음 대박을 터뜨린 1964년까지 모두 1,200시간을 공연한 것으로 추산된다. 공연 시간이 그 정도면 연습 시간은 얼마일까. 가히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이다. 결국 그들은 세기에 남을 그룹이 되어 있었다. 


저자는 다시 빌게이츠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모두 아홉까지의 성공 이유를 제시 한다. 그러나 이 모든 행운에 공통된 요소가 있다. “바로 그 모든 기회를 통해 빌 게이츠가 추가적인 연습시간을 얻었다는 점이다.”(73쪽) 결국 연습할 수 있는 시간과 훈련 받을 수 있는 여건이 필요했던 것이다.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 성격뿐 아니라 직업도 그대로 물려받는 경우가 많다. 왜일까? 잘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릴 적부터 부모의 삶을 보고 배웠다. 부모가 교사이면 교사의 일을 보고 배웠고, 부모가 정치가이면 정치를 보고 배웠다. 더욱 중요한 것, 부모의 영향으로 그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여건이 훨씬 쉬워진다는 점이다. 남들이 애써 훈련시간을 채우려는 동안 이들은 자연스럽게 보고 배워 일 만 시간이 채워진다. 


가정을 넘어 그 나라의 문화, 민족의 정서 등의 경우도 비슷하다. 개개인의 성격은 조금씩 다를 수 있으나 포괄적인 안목으로 보면 비슷하다. 왜냐하면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급하고, 독일 사람들은 둔한 편이다. 경상도 사람들은 대체로 말이 빠르지만, 충청도 사람들은 대답을 기다리다 해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이들만의 특성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나가면서


결론을 내려 보자. 어떻게 아웃 라이어가 되는가. 간단하다. 남들보다 더 많이 연습하고 훈련하면 된다. 그러나 누구나 연습 시간을 보장 받을 수 없다.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재정적인 뒷받침이 있던지, 무의식적으로 꾸준히 공부하는 문화가 있던지, 아니면 포기할 줄 모르는 확고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어쨌든 일 만 시간을 채워라. 


“성공은 대개 보통사람이 30초 만에 포기하는 것을 22분간 붙잡고 늘어지는 끈기와 지구력, 그리고 의지의 산물이다.”(283쪽)


가난한 나라가 가난할 수밖에 없고, 부자 나라가 부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잘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자, 이제 당신 차례다. 당신은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어떻게 시간을 배분하고 있는가. 잘할 수 있는 마음의 의지와 환경은 준비 되었는가. 아니라면 그것부터 만드는 것부터 다시 시작하라. 그럼 다음은 그대가 아웃 라이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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