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불란한 명령과 집행은 단기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장기적 발전 동력으로 삼기엔 부적절하다. 무엇이든 위로부터의 명령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단 발상에서 창의성이 발휘될 여지가 없다. 또 지표상의 실적을 올리는 전시적 성과 이상의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개발독재정권은 외형적 경제 지표의 성장을 끌어올리는 데 주력했다. 더 심각한 불균형은 사회 전체가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측면에만 치중하게끔 했다는 점이다. 최고의 가치는 효율성이며 다른 모든 가치는 효율성에 종속된다. 그것도 단기적 효율성뿐이므로 어떤 일이든 속전속결로 성과를 내야 한다. 이런 태도는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 증후군으로 나타난다. 학문적으로는 실용적 과학기술에 비해 기초과학이나 인문학을 경시하는 풍조로 나타난다. 현 이명박 정부는 이러한 과거를 그대로 답습하려 한다. 일종의 사회적 퇴행이다. 이러한 퇴행을 저지하기 위해 식자(識者)들이 나서지만 국민에게 하나의 유전자로 각인된 효율 우선주의는 이러한 노력을 버겁게 한다. 우리나라에서 실시되는 지방자치 또한 효율이 우선이다. 역사적으로 지방자치를 해본 경험이 전무 하다는 데에서도 현 지방자치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 현 지방자치는 중앙집권을 공고히 하는 요식행위에 불과한 듯 보인다.
우리 역사에서 지방행정기관은 정부의 명을 받아 그대로 집행하는 기관일 뿐 자체적으로 정책을 입안하는 권한과 능력이 거의 없었다. 지금도 도 자치단체장의 명칭으로 사용하는 도지사의 ‘知’란 원래 중앙정부가 할당한 임무를 대행한다는 뜻이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왕이 즉위한 뒤에도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기 전까지 자신의 직함을 왕이 아니라 權知國事라 불렀다. 여기서 ‘지’도 도지사와 같이 국사를 잠시 맡아서 처리하는 직책이란 의미다. 동양은 고대 도시국가를 제외하곤 자치적 성격을 가져본 적이 없고 늘 중앙정부의 수직적 지휘와 감독을 받는 행정 도시였다.
서양은 반대다. 유럽은 대부분 자치도시로 출발했으며, 민간의 경제활동에 대한 필요성에서 발생했다. 콜로니아(쾰른)나 마실리아(마르세유) 같은 로마시대 식민시, 그리고 알렉산드로스가 동방원정에 창건한 수십 개의 알렉산드리아는 원래 국경을 방어하는 용도였다. 특히 로마제국의 변방에 창건된 군사 도시들에서 총독이 거의 전권을 행사했는데, 이 직함이 훗날 市長의 모태가 된다. 이렇듯 발생과 기원이 자연스러웠기에 서양 도시에서는 시민들이 내는 세금이 시정에 사용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중세 중기까지 유럽의 도시들은 봉건영주의 장원을 중심으로 한 성채도시나 성당과 수도원 중심의 주교도시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12~13세기에 플랑드르와 북이탈리아에서 새로운 개념의 자치도시인 코뮌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자치 도시가 발달하자 사방에서 전직 농노들이 몰려든다. 장원의 닫힌 경제에 비해 활발한 도시에선 누구나 큰돈을 벌 수 있다. 부르주아지의 맹아가 싹튼다. 영주들은 자치도시를 정치적으로 복속시키기보다 적절한 관계를 이루려 한다. 시민들은 혁신적인 자치제를 구성한다. 그런 탓에 황제나 교황도 자치도시의 내정에 간섭하지 못하게 된다. 이 도시들이 나중에 유럽의 르네상스를 주도하게 된 것도 그런 위상을 지닌 덕분이다. 물론 유럽의 왕국에서도 세금은 의무에 가까웠다. 하지만 도시에선 조합을 이루어 일을 결정하고 세금의 효과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시민의 세금으로 시정이 운영되는 과정이 명백했으므로 권력자라도 시민의회나 법정을 함부로 무시할 수 없었다. 또한 법과 정치권력 앞에서 평등을 보장 받았다. 도시의 발생 과정뿐 아니라 운영에서도 평등한 시민권은 중요했다. 또한 이 도시국가들은 규모가 작아 신분제 회의를 구성할 필요가 없이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했다. 여기에 대의제의 개념과 선거제도만 덧붙이면 곧바로 근대 민주주의가 된다. 현재의 지방자치가 수많은 비용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선 자치시장의 제도권 진입을 위한 발판으로 쓰인다. 다 지방자치의 역사가 부재한 탓이다.
지방자치가 부재한 역사는 우리가 쓰는 말에서도 묘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수도 요금이나 전기 요금을 수도세나 전기세라고 지칭한다. 자신이 쓴 만큼 내는 것이기 때문에 세금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공화국의 국민은 세금을 국가에 내야 하지만 그에 따르는 혜택을 받을 권리도 가진다. 복지 같은 것들은 납세에 상응하는 혜택이다. 동양은 납세를 권리로 여기는 사고방식이 부재하다. 동양에서 공무는 국민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일이라기보다 국민을 관리하는 일이다. 국민들은 세금을 의무적으로 납부해야 하는 모든 돈을 총칭한다. 왕조시대에 납세가 권리가 아니라 의무였기 때문이다. 시경(詩經)에 따르면 “천하에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왕의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다”고 했다. 시경은 춘추시대에 공자가 옛 시가들을 모아 엮은 책이니까 왕토사상의 뿌리는 중국의 역사시대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의 전시과와 조선의 과전법은 왕토사상을 바탕으로 했다. 정부가 임용한 관리에게 녹봉으로 토지 소유권 자체를 내주는 게 아니라 수조권만을 내주는 방식이다. 이에 따르면 토지의 매매가 불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하다. 나랏님의 땅을 갈아먹는 백성이라면 당연히 조세를 내야 하는 것이지 거기에 감히 권리 따위를 내세울 마음은 먹지 못한다. 세금이 권리가 아니라 순전한 의무일 뿐이라면 가급적 피하는 게 좋다. 기업은 절세를 넘어 탈세를 꾀하고, 재벌은 상속세를 피하기 위해 자식들에게 편법으로 재산을 증여한다. 결국 행정기관에 납부하는 돈을 세금이라 지칭하는 건 국가가 주는 혜택을 누려보지 못했기에,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수탈의 역사가 꽤나 오래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왕조 체제는 유지될 수 있었을까?
바로 이념 때문이다. 특히 유학은 백성의 무의식과 이성에 작용해 조선 왕조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였다. 유교 예법은 유교 이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고려 말에 도입돼 조선 왕조의 국가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았다. 특히 16세기 초 조광조가 여씨향약을 전국에 보급하고 향촌까지 성리학적 질서로 편제한 이래 유교 예법은 지배층만이 아니라 일반 사회에도 널리 퍼졌다.
중국 역사에선 1차 분열기인 춘추전국시대에 유학이 탄생했다. 기원전 2세기 한 제국은 유학을 국가 이데올로기로 채택했다. 당 시대엔 유학의 이념에 바탕을 둔 국가 체제를 만들려 했으며 율령제와 과거제를 도입했다. 청나라 땐 명대 후기에 나온 비교적 개혁적 성격의 유학인 양명학을 고증학이 눌렀다. 오히려 주자학을 다시 전통으로 세운 것은 유학을 이용한 것에 불과하단 증거다. 결과적으로 서양과 달리 동양의 예법은 문화적 관습에 불과한 게 아니라 사회전반을 규제하는 강력한 정치적 힘을 발휘했다. 결국 그 때문에 사회 발전의 질곡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중화세계가 붕괴하고 나서도 이러한 유학을 끝까지 섬겼다.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장기집권하게 되면 썩게 되기 마련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예송 논쟁이다.
예송 논쟁의 의미는 두 가지다. 첫째, 조선의 지배층은 중국을 과거에 사대했던 중화세계의 연장으로 보지 않았다. 명이 망하고 청이 들어섰다. 중화는 조선으로 넘어와 소중화가 되었다. 이제 모든 예법을 조선에서 다듬고 새로 필요한 것을 만들어야 한다. 서인과 남인이 비장한 자세로 예법을 두고 설전을 벌인 이유가 있다. 둘째, 15세기 이후 왕 대신 중앙권력을 장악해온 조선의 사대부는 이제 왕실의 복상 문제까지 결정하기에 이른다. 16세기까지 중국이란 상국이 있었기에 신분적으로 조선 왕은 황제의 제후였다. 명 제국이 사라지자 그런 형식적 서열마저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콤플렉스를 가진 왕과 소중화 사상에 젖은 사대부들의 욕구가 북벌이란 기획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소중화 사상은 민중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국사 교과서에서 우리나라의 주체성 확립의 사례로 언급하는 진경산수화는 기실 소중화 사상이란 병리적 현상의 확대였다.
진경(眞景)이란 진짜 경치를 뜻하는 말로 조선의 경치를 가리킨다. 18세기부터 그려진 진경산수화는 정선을 필두로 심사정, 김홍도, 신윤복까지 이어진다. 동양은 풍경화가 지배적이었고 서양은 초상화의 전통이 강했다. 초상화는 권력자의 의뢰와 명령을 받아 그린 것이므로 예술성 보단 기능성이 위주였지만 풍경화는 화가가 솜씨를 부릴 여지가 컸다. 지금은 미술에서 사실성이 기본이라고 여겨지지만 당시엔 이상화되고 표준화된 경치에 약간의 상상력을 섞어 표현하는 게 중요했다. 서양에선 17세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에서 이상화된 경치를 지향하는 근대적 풍경화가 나타난다. 하지만 동양에선 이상적이고 관념화된 경치만을 묘사했다. 중화세계의 중심이 언제나 중국이었기 때문이다. 진경산수화가 탄생했다는 것은 고답적 자세에서 탈피해 진짜 살아있는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단 의미다. 이것은 소중화 사상의 연장이다. 자주화와 주체 노선이 찬미되던 때였으니 진경산수화를 그린 화가들은 잔뜩 자부심을 품었음직하다. 미술만 아니라 판소리, 탈춤 등도 18세기에 체계화되고 정리된다. 결국, 조선이 유학의 중심이란 자가당착적 사고가 진경산수화 같은 우리문화를 찬미하는 풍조라 나타난 것이다.
결국 현재의 지방자치는 중앙집권을 중시해 온 과거의 전통을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유학과는 또 다른 형태의 이데올로기인 지역이기주의와 효율성 우선 성장이란 결과를 낳았다. 이명박은 그렇다 치고 김문수 도지사가 이렇게까지 중앙중심주의를 설파하는 건 그의 과거를 보면 상당히 의외다. 진보신당의 심상정 대표와 함께 우리나라 노동계를 이끌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고문까지 받았던 김문수였다. 그의 표변에는 이광수가 부르짖었던 민족개조론과 같은 메스꺼움도 느껴진다. 물론 이러한 퇴행적 개발주의와 중앙중심주의의 기저에는 수도권 중산층이 바라는 부동산 값 증가로 인한 자산 증식이란 목적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소중화주의처럼 퇴행적일 뿐이다. 조선이 세계에 중심이듯 수도권이 한국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균형과 분배를 향해 전개돼 온 역사에 반하는 행위다. 국가는 기업이 아니다. 집중과 효율은 삶을 도구적으로 보는 관점이다. 지금 전개돼야 할 것은 중앙의 패권주의를 분쇄하고 좀 더 나은 나라를 위해 양보하고 타협하기 위한 논쟁이다. 이것은 예송논쟁보다 훨씬 치열해야 하며 어떻게든 매듭을 지어야할 커다란 사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