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학벌 문제가 점차 피부에 와 닿는다. 예전엔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하지만 사회와의 직접 접촉을 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자 약간의 피해의식이 생긴다. 많은 사람은 학벌은 귀속지위가 아니라 성취지위이고 사회적으로 엘리트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인정해야 한다 말한다. 무엇보다 수능이란 공정한 입시 체제를 거쳤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수능체제 자체에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수능은 공정한 체제가 아니다.
수능과 같은 시험의 기원은 과거제이다. 587년 수 문제가 처음 과거를 시행했다. 이후 과거제는 20세기 초까지 시행된다. 한반도에선 958년인 고려 광종 때 도입된다. 이후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된다. 과거의 과거 과목은 명경과 제술, 잡과로 나뉜다. 명경은 경전을 얼마나 읽었느냐, 제술은 글을 얼마나 잘 쓰느냐이며 수학, 의학, 법학, 점술, 기술 같은 것들은 잡과로 망라된다. 책과 글을 존중하는 태도는 일견 학문을 숭상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회 각 부문에 작용하는 다양한 가치관을 문헌에 의거한 전통적 가치관으로 획일화하고 집중시킨다. 특히 경험을 무시하는 풍조를 만들어낸다. 오늘날 문학과 문인에 대한 지나친 엄숙주의와 책과 글이 존중되면서 정작 인문학이 등한시되는 기묘한 현상은 그런 전통의 소산이다. 시험을 치르고 점수를 매기는 것도 객관적인 방식인 듯싶지만 실은 인재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시스템이 없다는 뜻이다. 시험으로 인원을 선발하는 제도의 근본적 문제는 결과 지상주의에 빠진다는 점이다. 현재의 학벌 지상주의는 이러한 결과 지상주의의 소산이다. 또한 패자부활전이 불가능하고 학벌에 대한 숭상을 낳는다는 점, 무엇보다 학문을 획일화 시키고 공업이나 농업 같은 경험 중시 학문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현 사회 문제의 근간을 형성한다. 즉 아무리 노력해도 정규직이 되기 힘든 현실은 모두가 획일적인 공부를 하여 자신만의 강점을 지니기 어렵고 자신의 실력을 객관화 하는데 지나친 노력이 투여된다는 데 있다.
서양은 조금 달랐다. 시험 만능주의 동양에서는 주관적 정실과 연고가 더 중요하다. 추천으로 인재를 발탁하는 서양에선 비교적 능력 위주의 객관적 기준이 중시된다. 과거에 응시하려면 경제적 환경이 뒷받침 돼야 하고 과거 준비를 위한 문헌은 쉽게 구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과거에 합격한다 해도 출세를 위해선 연고나 학맥, 가문의 배경이 필요했다. 고로 신분제를 오히려 강화했다. 서양에선 시민의 시대로 접어들며 공직이 선출직이란 관념이 자연스러웠다. 서양에선 근대 초기 귀족이 공직자가 되었고 시민사회에선 선거를 통해 공직자가 임용되었으므로 동양보다 부패가 적었다. 동양식 관료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정부가 주도했고 서양은 동양보다 훨씬 느슨했고 시민사회 이후엔 민간이 주도하는 체제를 취했다. 결국 요즘 같이 각 가정의 교육 투자가 늘어나는 추세에선 부잣집 자제가 수능에서 높은 점수를 획득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런 자제들이 나중에 국가고시를 통과할 가능성이 높다. 사시나 행시가 공정한 듯 보이지만 이러한 진입장벽이 있다. 고시를 통과해도 출세하기 위해선 인맥이 중요하다. 결국 공정해 보이는 한국의 시험 체제는 기득권층의 이해와 부합하는 측면이 많다.
현 정부 또한 고시를 통해 선발된 관료층이 매우 두텁다. 이명박 개인이 욕을 먹고 있지만 기실 이러한 관료들에게도 비판의 화살이 돌아가야 한다. 관리의 권력은 직위에서 나온다. 왕조에선 군주에게서 권력을 받았다. 이런 권력의 이중성은 유학 이념에 특유한 학자-관료 개념에 뿌리를 둔다. 유학은 탄생할 때부터 정치 이데올로기 속성이 강했고 현실적이고 실천적 이념이었다. 유학 본성 자체가 경영을 목적으로 했고 조선은 처음부터 유교 왕국을 표방하고 나섰으므로 학자와 관료는 이념적으로나 신분적으로 거의 일치했다. 사림파 대부분이 현직관료가 아닌데도 현실 정치에 관여하고 훈구파와 맞서 승리할 수 있었다. 16세기 조식은 관직에 진출한 적이 없지만 그의 제자들은 학맥을 이뤄 이황의 제자들과 치열한 당쟁을 펼쳤다. 17세기 유학자 송시열은 만년에 몇 년 동안 정승직을 지낸 것 밖에 없지만 예송논쟁에 깊이 관여했고 고위 관직에 있는 제자들을 통해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관료제가 발달할수록 왕과 관리의 권력은 이중 구조를 가지게 된다. 세조의 쿠데타 이후 왕당파인 훈구파에 맞서 선비들은 사림파를 형성하며 사대부 국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중종반정 때 처음으로 왕을 자신들이 세울 수 있었다. 왕은 기획자와 집행자로서 사대부들이 필요했고, 사대부들은 권력의 상징으로서 왕이 필요했다. 그런 탓에 왕도 사대부들도 잘못된 국정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가 없었다. 중종 옹립 이후 사대부들은 자기들끼리 다투기 시작했다. 그전까지의 사화가 왕권과 신권의 대립으로 빚어진 데 비해 이 시기 왕은 상징으로만 군림할 뿐 사대부 내부에서 권력다툼이 벌어진다. 이때부터 당쟁이 심화되는 건 우연이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책임 정치가 실종되고 정권 후반기에 앞서의 과오를 대통령에게 집중적으로 뒤집어씌우는 데는 이러한 역사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또한 정치적 오리엔테이션이 강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사회에선 흔히 이중권력 체제가 생겨난다. 이것은 현재에도 영향을 미친다. 보스정치가 그런 예다. 하나의 정파에서 보스는 상징적 우두머리로 군림하고 실제 정책은 보스의 심복들이 보스의 이름을 빌려 집행한다. 중요한 정치적 결정은 항상 막후에서 일어난다. 그런 탓에 정계에는 항상 음모가 판친다. 텍스트와 콘텍스트가 완전히 분리되고 모든 정치적 발언은 청취의 대상이 아니라 해석의 대상이 된다. 이재오나 이상득의 행동에 언론이 초점을 맞추는 이유도 그러한 데 있다. 또한 친박연대라는 당 이름은 우리나라 특유의 심복정치를 노골적으로 나타낸다. 박근혜를 ‘근혜 공주’라 불렀던 이유에는 박근혜는 얼굴마담이고 실세를 따로 있다고 여기는 대중의 인식을 반영한다.
결국 수능이란 국가대사로 대표되는 시험들은 관료라는 기득권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사회를 획일화 시킨다. 또한 관료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정당과 밀접하게 관련돼 움직인다. 정당 또한 특정인을 왕과 같은 ‘보스’로 내세운 뒤 실권을 행사하는 묘한 이중권력으로 움직인다. 사림과 왕이 묘하게 공생해 온 조선시대와 다를 바 없다. 또 대부분의 국회의원들은 사시를 패스한 판․검사나 행시 출신의 관료가 많다. 이러한 사실은 국가주관 시험을 통과한 사람이 권력을 갖는 것을 어느 정도 용인하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다. 하지만 이들이 삼권분립의 토대인 행정부와 사법부 소속이 대부분이란 점에서 문제가 있다. 입법부로 소속을 옮기기 위해선 정당이나 기득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행정 집행이나 사법 판결이 공평무사하게 이뤄지기 기대하기 어려운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결국 야망이 클수록 국가이익이나 법리 보다는 개인의 이해관계를 우선시 할 수밖에 없고 이렇게 쌓아 둔 인맥이 정치권 입성의 길을 닦아 주니 과히 불공정 담합이라 할 만 하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어도 나라가 그렇게까지 바뀌지 않았던 이유에는 조직 깊숙이 자리한 치열한 이해 다툼을 통제하지 못해서다. 보스 정치를 당연히 여긴 민주당 실세들의 관성도 꽤 작용했을 테다. 어차피 욕은 국가의 수반이 먹으므로 책임정치보단 빠른 줄서기 문화를 통한 기득권 확보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결국, 이러한 자잘한 역사의 누적분이 국가 정체(停滯)에 한 몫을 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이상 더 좋은 한국을 만들긴 어려울 테다. 흔히들 말하는 문, 사, 철이 국민의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하는 이유다. 무엇보다 국가의 수반인 대통령과 그 주위 가신들이 바뀌어야 한다. 여전히 정책은 상명하달식인 경우가 많고 민중의 힘으로 역사적 찌꺼기를 제거하기 위해선 비용과 시간이 너무 많이 소모되기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