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건달은 행복해질 수 없나? 딴지일보에서 '파이란'에 관한 리뷰를 읽었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이다. 영화 '약속'의 기준에 따르면 건달이 아니라 양아치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양아치가 행복하면 헐리우드식 해피엔딩에 대한 모조품 느낌이 나서일까. 아니면 죽음을 통한 이야기의 마무리가 극을 더 알차게 만든다는 묘한 작가주의적 감상의 결과일까.  

 이 영화 똥파리의 상훈 또한 불행해진다. 참고로 스포일러 있음이다. 영화의 언어는 거칠다. 다만 소설가 김중혁식 표현처럼 존댓말 하면서 칼부림하는 사내들 보단 훨씬 인간적으로 보인다. 거친 언어는 속살의 생채기를 가리기 위한 포장이다. 손톱 밑의 속살이 제일 연약한 거랑 비슷한 개념이겠다. 장면 또한 거칠다. 마이크 설정이 잘못되었는지 종종 대사가 뭉개져 들리는 단점도 있다. 부러 그리한건 아닌거 같고 예산의 제약 때문이었을 테다.  

 영화 속 가족은 애틋하지만 두터운 유리벽 사이에 갇힌 모습이다. 그들 각자의 언어는 다른 방식으로 진심을 이야기하지만 꾸준히 소통의 벽을 느끼게 한다. 구접스러운 삶 때문이다. 정리되지 않은 애증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질식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의 결과다. 헌데 관객은 그 상황이 쉽게 정리가 된다. 자연스레 공감하고 사사로이 한숨 짓는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말했다. 관객은 배우가 장애인 연기를 하는 것을 보며 쉬이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고. 그 이유는  촬영이 끝나면 소위 정상인이란 현실로 되돌아 온다는 걸 알기 때문이라고. 이 영화도 그렇다. 현실을 닮았지만 모조품이다. 모두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우연의 연속이란 것도 쉬이 영화라는 걸 인식하게 해준다. 다소 도식적인 구조와 상투적일 수밖에 없는 결말의 한계도 영화를 쉽게 보게 해준다.  

 허나 영화는 이음새가 매끈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구상을 보기좋게 영상으로 표현해 내는 건 누구나 할 수 없는 거다. 다소 무관심한 듯한 카메라 시점은 극단으로 비극을 밀어 붙인다. 씨네 21 김혜리 기자가 이야기 했든 폭력의 유전에 관한 성찰도 이야기의 겹을 훌륭하게 메운다. 속과 겹에 보풀 몇개 자리잡은 드팀전의 피륙마냥 이 작품은 누추하고 일상적이다. 똥파리가 날아다니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다. 그렇다고 손사래를 칠만큼은 아니다. 이 영화에 열광하는 대다수 지식인들은 파리끈끈이 하나 쯤은 다들 구비하고 있기에 그렇다. 잠시 마음만 번잡하고선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절감하면 된다. 이런 류의 영화가 가진 몇 안되는 악덕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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