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그리려면 녹색이 필요하다. 허나 우리 조상들은 달랐다. 검정으로 푸름을 드러냈다. 무채색이 유채색을 껴안았다. 먹물의 농담이 산빛을 보였다. 검정에서 푸름을 상상했다. 수묵의 번짐으로 산세를 파악했다. 겸재의 인왕제색도는 대표적이다. 모든 색을 흡수한다는 검정은 선인의 손에서 녹색을 뱉어냈다. 난을 그릴 때도 매양 검음이 푸름을 드러냈다. 필선의 올곧음이 먹물에 향을 풍기게 했다. 푸름이 번졌다. 이렇듯 선인들에게 녹색은 그저 상상만으로도 푸르렀다. 혹여나 수묵의 번짐으론 실제 산을 나타낼 수 없다 타박하는 자는 제 상상력 빈곤을 책망해야 한다.

 화선지 밖에서도 푸름은 제 색다름을 뽐냈다. 오선지 위에서 말이다. 베토벤은 그의 교향곡 6번 전원으로 푸른 산천을 그렸다. 산책 중 영감을 받아 만든 곡이라 그런지 매 순간이 싱그럽다. 귀로도 푸름을 볼 수 있단 공감각의 향연이 베토벤에 의해 펼쳐진다. 헌데 전원 교향곡이 푸름을 드러내는 방식은 일견 단순하다. 1악장의 발전부에서 한 마디의 짧은 모티브가 72회 반복되며 곡을 직조한다. 헌데 전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도취된다. 음악학자 로버트 심슨은 ‘숭고한 단조로움’이라며 이 단순함을 칭송한다. 귀를 기울일수록 그 푸르름이 손에 잡힐 듯하다. 엽록소가 출렁인다. 숲이 보인다.

 정부도 푸름을 그리려 한다. 환경을 아끼자며 녹색성장을 하자 애쓴다. 단순히 공해를 줄이고 나무를 더 심는다 하여 녹색이 천지에 펼쳐지진 않을 듯하다. 산세가 푸르다 해도 검게 타들어간 마음이 모든 걸 흐린다. 그러다보니 수묵화는 검은 덧칠로 보인다. 전원 교향곡은 시끄러운 음의 단순 반복이다. 잿빛만 그득하다. 중요한건 마음을 다독이는 일이다. 상상만으로도 푸름을 그려내고 귀로도 녹색을 느낄 수 있었던 마음들이 점점 사위어 간다. 다 지난한 일상과 팍팍해진 삶 때문이다. 누구 탓을 할 수 없기에 더 먹먹하고 안쓰럽다. 사람들 마음에 나무를 심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 섬처럼 외따로 떨어져 슬픈 사람에겐 관심이, 밥벌이에 지쳐 수캐마냥 헐떡이는 영혼에겐 안식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선 녹색 성장이란 다 허울 좋은 레토릭이다. 녹색을 보고도 푸름을 느끼지 못하는 색맹이 느는 데 푸른 산세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먹물의 농담만으로 산세를 파악하는 상상력, 숲속을 걸으며 수많은 영감을 샘솟게 해줄 여유. 그러한 슬거운 마음을 키워 줄 녹색성장이 필요하다. 오늘도 나는 그대 마음에 얕은 뿌리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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