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날이 새버렸다. 어른이 되기로 결심한지도 한달이 지났다. 참 무던히도 빨리 지나간 한달이었다. 홀로 생각할 시간이 많았기에 위태로웠고 마음은 북쪽 지방의 툰드라 만큼 퍽퍽하였기에 심장의 고동마저 다 검붉은 색이 돼버렸더랬다. 오늘 새벽 지인과의 끝없는 고백 끝에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다리가 후들거려 고개 들어 하늘을 보지 못했던 옹졸한 자아와도 작별을 구할때다. 삶의 불확실성을 긍정하고 여태껏 지내 온 시간이 새로운 변주를 맞이한다 하여도 다 품위있는 마음의 양식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고 보면 몇주간 참 심각했던 모양이다. 몸을 어디로든 제대로 굴린적이 없거늘 몸이 쑤시고 귓볼이 묵직하다. 밥벌이의 지겨움을 특유의 건조한 언어로 성토했던 소설가 김훈처럼 나 또한 무한긍정의 지겨움을 특유의 웃음 소리와 함께 다시금 되새길 때다.
제임스 레바인이 지휘하는 시카고 심포니 연주의 홀스트의 행성을 듣고 있는데 참으로 쉬운 소품이란 생각이 든다. 명쾌하게 작품 하나하나에 이름이 새겨져 있기에 작품 이름에 걸맞은 이미지만 떠올리면 전문가 못지 않게 음악을 즐길 수 있다. 개콘에 나오는 박지선 말 처럼 "참~ 쉽죠이~". 가끔 심장이 주인의 명령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뛰놀거나 이롭지 않은 고민이 흰자위의 핏줄을 돋게 할적에 들으면 좋을 듯하다. 단란한 음악적 소품. 다만 지휘자나 연주단체는 모른채 듣는것이 정신건강에 좋을 듯하다. 음악하나 듣는데 알아야할 요소가 많다는 건 그만큼 삶이 번잡하다는 방증. 마음을 비우러 듣는 음악에 작은 마음이나마 더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을 듯하다. 그냥 이 트랙이 수성이고 이 트랙이 금성이고 정도만 알면 홀스트 따라잡기는 그럴듯한 모양새를 띌 테다. 아.. 잠온다.
내일은 아버지 제사다. 동수는 준석이 아버지 제사라며 하와이 가라고 꼬드기던 준석이를 살려 보냈다. 나도 내일 아버지 제사니까 누군가 내게 해꼬지할 것을 잠시 멈쳐주지 않을까 한다. 3번째 제사이기에 사람도 먹을 것도 그리 풍족친 않을 테다. 그래도 그리움이나 추억만큼은 여전히 풍성할 테다. 가슴 한켠에 피어나는 눈물샘을 자극하는 기억도 코끝을 감싸는 향내의 아련함도 조금 익숙해졌으면 한다. 그 쉬운 매너리즘은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반추할 때 만큼은 제 역할을 하지 않은 채 어디론가 숨어버리곤 한다. 아버지 제사도 매너리즘에 빠져 조금 덜 아픈 채 지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아빠를 아버지라 부르게 한 이승과 저승의 거리가 1년 중 가장 짧아질 내일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장을 보고 밤을 깎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죽은자를 추모하고 산자를 살게하는 삶의 매너리즘이다. 삶은 비루하더라도 추억만큼은 비루하지 않기에 내일 자정은 다른 빛깔의 밤을 보여줄 터이다. 우히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