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샌가 나는 속물이 되어 가고 있다. 행복을 위해서라면 물질적 토대가 있어야 한다는 어르신들의 말을 누구보다도 충실히 따르려 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나는 속물이였는지 모른다. 사회가 신봉하는 가치에 애써 무감하려 하지만 기실 열렬한 추종자였을지 모른다. 학벌이나 자본에 의해 알 수 있는 현 신분 사회의 움직임 속에서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뛰었던 것이리라. 가진 것을 잃을까 전전긍긍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행해왔던 자본의 주구 행위는 이제 끝맺음을 지어야 한다.
오늘 이종국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눴다. 아저씨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만 본다고 하셨다. 누구보다 선량하게 살아오신 이 땅의 많은 어르신들이 무지해서 보수 신문을 지지하지는 않았을테다. 물론 미셸푸코식으로 이야기 하면 보수 신문의 지적 설계에 세뇌당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식의 담론을 논하기 전, 그분들은 누구보다 치열하고 긍정적으로 삶을 살아오신 분들 아닌가. 어줍잖은 구라파의 학자를 끌어 들이고 진보 인사들의 말을 끌어들여 지금도 충분히 아름다운 그분들의 삶을 단죄하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그 다음세대로서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드리고픈 마음은 간절하다.
위의 두가지 생각은 미묘하게 충돌한다. 생의 의지보단 정신의 고양을 우선시 하는 앞의 주장은 묘하게 젊음의 피를 자극한다. 뒤의 이야기는 삶의 진정성에 대한 반추와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인생의 진리를 이야기 해준다. 주윗 사람보다 뒤쳐지지 않으려는 속도에 대한 불안과 지위에 대한 욕망은 지극히 속물적이다. 이러한 욕망과 불안의 이중주를 끝내고 독야청정하고 싶다 선포하는 것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현실 도피적인듯 하다. 내가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상보다는 현실을 인정하라 말 한다. 하지만 현실을 인정할 수록 자본의 부속품이 되어가는 모습과 속물근성이 강화되어 천박한 자의식만 강해지는 메스꺼운 상황도 나타나기에 쉬이 따르기 힘든 권고안이다.
아빠가 계셨으면 현실을 수용하라 하셨을 테다. 불쌍한 아버지. 그렇게 현실적 불안과 욕망에 질식하다 못해 세상을 떠나셨으면서도 여전히 현실을 택하라는 살 떨리는 부정(父情). 아프시죠? 저도 아프네요. 전장을 향해 뛰어가는 참호속의 병사처럼 눈물나게 아프네요. 세상을 꼭두각시 처럼 움직이는 누군가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총알 받이가 되어야 하는, 그래야 보급을 받을 수 있는 역설. 답을 내려 글을 써내려 갔는데 답은 더 요원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