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겨울을 연상시키는 연주자가 있다. 마우리치오 폴리니. 냉정한 타건은 얼음보다 시리다. 기계적인 연주라는 세간의 평에 아랑곳 하지 않고 미스터치 하나 없는 냉정함으로 귓가를 때린다.

겨울에 여름을 연상시키는 연주자가 있다. 마르타 아르헤리치. 열정적인 타건은 불꽃보다 뜨겁다. 자의적인 해석이라는 세간의 평에 아랑곳 하지 않고 감정의 과잉으로 귓가를 불태워 버린다.

 동시대의 최고 피아니스트 둘을 꼽으라면 대부분 이 둘을 꼽을테다. 둘 사이에 열정과 냉정 사이란 없다. 극단의 열정과 극단의 냉정. 중용이란 가치는 설자리를 잃고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만이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둘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쇼팽 콩쿠르 우승자 출신이다. 폴리니는 1960년 아르헤르치는 1965년.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아르투로 베네디티 미켈란젤리를 사사한 점. 하지만 둘의 평은 그들의 연주 스타일만큼 다르다.

 "나는 미켈란젤리에게 피아노의 모든 것을 배웠다." 폴리니의 말이다.

 "나는 미켈란젤리에게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 아르헤르치의 말이다. 같은 스승에게 사사한 두명의 극단적인 평가는 후에 보여주는 해석의 차이를 수긍하게끔 한다. 이 둘이 주는 다른 느낌을 한폭의 캔버스에 그려 보면 어떨까. 우선, 피아니스트를 대표하는 두 얼굴이 하나로 오버랩 된다. 쇼팽 콩쿠르 우승과 미켈란젤리의 제자라는 공통점이 얼굴의 윤곽을 이루고, 다른 연주행태가 얼굴에 살을 붙인다. 묘하게 데칼코마니를 이루는 이 그림은 완전 대칭을 선호하던 근대적 미학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촛불로 뜨겁고 불신으로 냉정한 한국의 모습 또한 살포시 떠오른다. 현재 한국을 움직이는 두가지 기제는 공포와 욕망이다. 빼앗기지 않으려는 공포, 실업자가 되길 두려워 하는 공포. 더 가지려는 욕망, 남들 위에 서고싶은 욕망.

 공포와 욕망의 두가지 테마는 한국의 얼굴을 형성한다. 민족주의라는 뼈대위에 세워진 서로 다른 모습의 한국인. 공포에 그늘지고 욕망에 화색이 도는 모습은, 딱히 어울리진 않지만 묘한 끌림을 준다. 아마 그 끌림의 기원은 동질성이 것이다. 모두가 욕망과 공포를 쉬이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자신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두 가지 기제를 다 읽을 수 있을테다. 

 '노다메 칸타빌레'를 보면 치아키와 노다메가 모차르트의 '두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욕망과 공포의 이중주에 일그러져 가는 한국인에게도 이런 아름다운 연주가 절실하다. 폴리니와 아르헤르치의 연주라면 더욱 좋을테다. 서로 다른 색깔의 피아노가 충돌하지 않고 화합하는 모습은 포근한 안식을 선사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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