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지나면 다시 새로운 하루가 나타난다. 하루의 개념이란건
인간이 정해놓은 어떤 일정한 굴레에 의해 규정 되는 것이지
원천적으로 하루라는 개념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어가 지닌 분절성을 이용하여 존재하지 않는
개념을 만들어내고 또 규정한다. 말할수 없는 것에 대해선 말하지
말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언어가 지닌 한계에 대한 역설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하루를 마감하는 어느
시점에 충만한 행복감이 솟아오르지 않는한 억지로 규정된 하루가
너무 측은해지지 않을까 하는 배려심이다.
경쟁을 권장하고 사회적 위계질서에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한 다툼이 치열할수록 이러한 행복이 증대되는 소수의 사람이 있다.
이러한 이들에겐 하루하루가 명멸해 가는 어린날의 꿈으로 이어주는 노스탤지어 빛의 기찻길이다.
특정한 색이 없는 노스탤지어에서 자기만의 색깔을 뽑아 내는 사람은 이러한 적자생존의 사회가 심히 버겁게 느껴질 것이다.
이 적자생존의 시장을 흔히들 레드오션이라한다.
모두가 레드오션이라는 삼성경제 연구소가 창안한 개념에 뛰어들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어쩌면 저 레드오션이란 단어다. 현 경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발명된 블루오션이란 개념은 기존에 존재해 있던 사회적 현상이 삼성경제연구소가 지닌 사회적 권력에 의해 엄청난 발명품인 것 마냥 포장되었다. 기실 형이상학적 철학 개념이 아닌 이상 이러한 사회학적 용어는 발견이라 볾이 옳은 듯 하다. 부르디외의 아비튀스나 들뢰즈의 노마디즘이란 사회학적 용어 또한 발견이라 보아야 겠다. 하지만 이 레드오션 운운하는 이야기가 문제인 것은 모두가 블루오션을 원하지만 레드오션으로 갈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창의력 부족으로 쉽게 전이하는 그 편의성에 있다. 또한 이것은 사회적 효용의 증대를 낳았다기 보다는 삼성경제연구소의 사회적 입지 강화와 관련 서적 판매로 인한 인지세 수입의 증대로 인한 사회적 경제적 부의 쏠림현상을 심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즉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블루오션에 대한 열망만 심화시킨고 그 열망이 창출한 사회적 잉여는 이 언어를 생성한 자의 배만 불리게 한 양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쓰는 언어에는 이렇게 잘 알지 못하는 많은 권력과 함정이 숨어 있다. 글의 결론이 이렇게 교조주의 행태를 띄는 것은 계몽 운동에 대한 태생적 반감을 극복하지 못한 소심한 자아가 결국 교조주의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버린 아이러니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다시 보니까 글이 참 두서없다. 컨텐츠는 나름 좋은것 같으나 성긴 구성이 내용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묽게 만들어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