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할 땐 심연의 깊이를 측정하지 말고 그냥 그 심연이 흐르는 데로 몸을 맡기는 것이 좋다. 두둥실 떠가는 감정의 파장 사이로 마음은 점점 안정을 찾아간다. 이런 우울한 날엔 라흐마니노프가 좋다. 그의 교향곡 2번이 귓가에 울린다. 로덴츠벤스키가 지휘한 런던 심포니의 연주다. 이런 우울의 기저를 추적해 보면 어제 엄마와의 말다툼이 놓여있고 또 한번 더 건너면 아무렇지도 않은것에 많은 신경을 써버려 심지가 다 타버린 나의 복잡한 마음이 있다. 먼곳에 있으면 더더욱 생각난다는 어머니라는 존재. 나는 조금 있다 약간의 수면을 취한 뒤 다시 서울로 간다. 서울로 가면 더더욱 아플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난 어머니에게 한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 나라도 엄마의 심경을 편케 해드리겠다는 마음이 굳건한 의지가 되어 나는 어메 앞에선 보살이 되었다. 하지만 내 스스로가 고백했듯 최근에 나의 날카로워진 이성은 가끔씩 나타나는 엄마의 히스테리에 대한 나의 면역성을 현저히 저하 시켰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와 같은 데시벨로 나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소리와 소리가 맞닿는 지점엔 무한한 여백이 있는 것 같다. 그 짧은 순간 나는 그 여백을 느끼고 누군가에게도 화를 낼 수 없는 혼자만의 홧병이 가슴을 뚫고 차올랐다. 그 여백은 은은한 종소리처럼 서로에게 휴전을 강요하고 각자의 사업에 복귀 하였지만 이미 흐트러진 나의 마음엔 지극히 적절지 않으면서 또 뚜렷한 목표또한 없는 분노가 떠다녔다. 내가 화를 거의 내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화를 내고 난뒤의 내 스스로를 추스리기에 나의 수련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냥 잠을 청했다. 갑자기 찾아온 수마에 의해 나는 모르페우스가 이끄는 꿈속에서 갖가지 세상을 만났다. 꿈을 꾸었다는건 깊은 잠을 자지 못하였다는 것이기에 나는 새벽녁에 눈을 떳다. 그리고 보람찬 하루를 위해 영화를 보기로 하고선 에비타를 틀었다. 중학교때 에비타 음반을 샀었기 때문에 익숙한 음률과 가사들이 영화를 보는 도중에 약간의 기시감도 주었다. 그리고 그 영어 가사를 알아 들을 수 있게 된 나 자신의 지적 성장에 대한 만족감도 느끼고 있었다. 영화를 보며 나는 내가 평소에 주로 생각하는 사회적 문화적 관점을 위주로한 영화평을 영화내내 마음위에 쓰고 있었다. 영화를 이성으로 보던 나의 눈빛이 You must love me 란 노래의 등장과 함께 감성으로 보는 눈빛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녀의 억척스러워 보였던 삶과 일생이 그대가 떠날까봐 두려웠었다는 진실한 고백과 함께 자신을 사랑해 달라는 말.. 그 말이 나의 가슴에 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그리고 엄마가 생각났다. 자식을 위해 억척스러울 수 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삶도 아마 에비타가 읖조리는 저 노래 가사처럼 가지기 위한 욕심이 아니라 잃지 않기 위한 방어적 욕심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

그리곤 갑자기 슬퍼졌다. 그 후 도서관을 가고 친구를 만나고 집에 돌아오니 엄마가 평소와는 달리 용돈도 주시고 먹을것도 많이 사놓으셨다. 나는 내일 떠나는데.. 그걸 모르실리가 없는데.. 그냥 이적지 자식을 허술히 대한 듯한 마음에 대한 누구에게 향하는지를 모를 사죄의 표현인듯 하였다. 그리곤 왠지 기운이 없어 보이는 엄마의 뒷모습.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힘든 나날을 여지껏 자신만의 방식으로 꾸려오셨을 그 뒷모습에 그냥 우울해졌다. 많은 꿈을 지녔던 고등학교 시절에 공부잘하는 자식 덕분에 선생님들에게 극빈 대우를 받으셨다며 좋아하시던 그때.. 수능 성적이 나오고선 못내 속상하셨으면서도 더 속상했을 자식을 생각하여 재수하란 말도 못하셨던 그때. 아버지 암에 걸리셨던 걸 처음 알았던 날 홀로 통곡하셨던 그때. 나또한 많이 울었지만 운체 할 수 없었더랬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와의 이별이 너무 두렵고 무서웠기에 계속 병원을 지키는 일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하루하루가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나날이 내겐 직시하고 싶지 않았던 현실이였고 나름 최선을 다해 살았다는 우리 가족의 삶이 너무 불쌍하고 억울해서 나는 계속 다른 곳을 보았다. 그외에 나를 힘들게 했던 주윗사람들..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던 그때에 나를 붙잡아 주었던 그아이 선영이. 그래서 선영인 나에게 영원한 hightest second position이다. 여친이 아니라는 말이지.. 그러한 나날뒤에 맞았던 아버지의 죽음과 내게 많은 힘이 되었던 따스한 사람들. 나보다 엄마가 더 힘들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울지 않으려 했고 또 엄마 앞에서 거의 울지 않았다. 애들이 독종이라며 대단하다 하였지만 나의 가슴은 더 크게 울었고 더 많이 울었고 더 높게 울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고 집안에서 제일 똑똑했다던 나는 오히려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지금까지 회피하고 있었다. 천갈래 찢어진 내 마음을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는걸 알기에 나는 다시금 담담하며 유쾌한 나로 돌아갔지만 가끔 꿈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아버지의 모습에 나는 여전히 어떤 것이 꿈인지 모르는 듯한 이성의 붕괴를 경험한다. 때마치 라흐마니노프는 교향곡 2번 3악장을 연주한다. 내가 손 꼽을 정도로 좋아하는 악장이다. 내가 왜 불현듯 이런 미친듯한 솔직한 글을 쓰는지 모르겠다. 나의 치료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끊임없는 나의 하늘을 향한 그리움에서인지..

 아버지는 내게 행정고시를 공부하라고 하셨다. 재경직을.. 동네에서 머리가 좋다고 소문난 나이기에 아버지는 기대를 하셨다. 하지만 자식이 숙환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강요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다 보면 몸이 더 안좋아질 것 같다는 아버지의 배려였다. 그런 배려뒤에 자식이 꿈을 펼치지 못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시던 아버지의 눈물자욱이 가끔은 느껴졌었다. 누구보다도 똑똑하다고 여겼던 아들인데 재능에 걸맞는 운을 타고 나지 못해서 조금씩 퇴보하는 것을 보는 것은 나보다 아버지에게 더 큰 아픔이였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나는 마음이 아프다. 왜 이런 글을 쓰는지 모르겠지만 뭔가 나 자신에 대한 돌이킴 없이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유전적으로 관련이 있는 이 질병때문에 아들이 힘들어 하시는 것 때문에 많은 자책을 하셨던 것 같다. 나또한 아버지의 암 세포를 잉태시킨 하나의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버지의 나에 대한 사랑은 대단하였고 그리고 언제나 나를 믿고 또 믿어 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1.5년이 지났지만 난 그동안에 아버지가 바래왔던 아들의 모습에 전혀 근접한 것 같지가 않다. 아버지의 부재또한 외면하려 했고 홀로 네버랜드를 지키려고 했다. 하지만 이젠 떠나야겠다. 이젠 별로 시간이 없는 것 같다. 무엇이 최선이고 무엇이 최고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이제 나는 나를 믿고 나를 사랑하는 지인들을 믿고 내가 지키려 했던 가치들을 믿어야 겠다. 지금 내겐 아무것도 중요치 않다. 현재만이 중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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