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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제 끝난 걸까?

-바보,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

 

내가 정말 좋아하는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키즈 리턴>에 나오는 대화.
이 영화를 본 뒤로 나는 자주 저 문장으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아니 세뇌라고 해야 하려나.

물론, 작은 걱정도 늘상 따라붙는다.

내가 언젠가는. 어른이 되긴 되는 걸까? ㅎ 

 

 

키즈리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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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서랍 정리를 하다가 한 귀퉁이에서 먼지를 풀썩 뒤집어 쓰고 누워있던 테잎 한 뭉치를 발견했다. 내가 휴대용 씨디 플레이어를 처음 가지게 된 게 97년인가였으니 즉 그 테잎들은 97년 이전의 흔적인 셈인데, 예전에 이사 올 때 한 번 추스리고 버리고 해서 몇 개 되지는 않았지만 하나하나 꺼내서 보면 볼수록 참 놀랍고도 기이했다. 아직 10년도 채 지나지 않은 그 기억들도 테잎의 꼬락서니만큼이나 구석으로 밀려나 먼지를 덮어쓰고 있었던 것인지, 내게 그 테잎들은 어찌나 생소하고 낯선지 아마 내 서랍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내 것인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잘 듣게 되지도 않을 것을 그래도 그렇게 남겨놓은 것이나 정품 테잎보다 공테잎에 녹음을 한 것이 많은 것을 보아서나 예전에 이 놈들을 챙길 때는 나름대로 아끼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은데 누구 노랜지 무슨 음악인지 라벨 하나 붙어 있지 않은 몇 개의 테잎은 확인사살을 위해 카세트 테크에 들어가자 나를 더욱 뒤집어지게 만들었다.

물론 생각을 해보면 전혀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때의 나는 주로 가요만 들었고 게다가 흐느적거리는 발라드를 테잎 앞 뒷면에 꽉꽉 채워서 기분이 꿀꿀할 때마다 더 꿀꿀해지라고 일부러 듣고 다녔었다. 헌데 기억은 그저 기억일 뿐, 노래가 한 곡 한 곡 재생될 때마다 나는 흐액- 이 노래 뭐야 라는 멘트를 녹음이라도 된 것마냥 나도 모르게 계속 읊어대고만 있었다.
게다가 노래야 그렇다치고, 레코딩;;은 정말, 엉성의 극치로 곡과 곡 사이 연결도 매끄럽지 못하고 시작과 끝점 또한 들죽날죽 엉망이라 도대체 노래를 들으려고 녹음을 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테잎에 노래 몰아쳐넣기 놀이를 한 것인지조차 헷갈리는 수준이었다. 듣다듣다 나는 결국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그래서 더이상 괴로워지기 전에 냅다 모두 내버리리라 하며 주섬주섬 테잎들을 챙기는데 갑자기 무슨 운명처럼 노래 하나가 새로 시작되어 흘러나왔다.
여자 가수의 목소리, 잔잔하다가 뒤로 갈수록 무지하니 고음이 되어 클라이막스를 이루는 내가 부르기엔 불가능한 노래. 네가 떠나고 나서야 소중함을 알았으니 얼렁 다시 돌아와주시게 하는 애절하고도 뻔한 내용의 가사를 지닌 그 노래. 나는 순식간에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리고 전혀 모른다고도 다 안다고도 할 수 없는 어중간하고도 이상한 익숙함은 노래가 반복되는 후렴구에 이르자 갑자기 내 심장 한 구석을 마구 찔러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자극은 희한하게도, 심장을 가격하긴 하나 심장이 마치 아주 두터운 상자 안에 들어있어서 바깥에서 두드려대는 걸 직접적이 아닌 그저 간접적인 울림으로만 전해받는 듯한 아주 둔탁하고 답답한 저림이었다. 그리고는 마치 내 심장을 향해서 왜 그렇게 둔해졌냐고 자기를 잊었냐고 좀 더 뾰족하고 격렬하게 반응하라고 다그치는 듯 했고 나는 왠지 그 주문에 맞도록 그렇게 해주어야만 할 것 같은데 두터운 상자 속의 심장이 맨살이 아닌 몇겹의 상자 속에 갖혀서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생각해보니 그 노래를 듣던 때는 97년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생각나는 사람이 있으니, 그 때 그 노래를 자주 듣던 나는 아마도 좀 심하게 우울해지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대략 6,7년의 시간은 상처와 고름, 딱지조차 모두 쓸어가버리고 그저 먼지 쌓인 작은 흉터 하나만을 남겨놓았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아프지도 따갑지도 간지럽지조차 않고 때로 아니 거의 그 흉터의 존재마저 잊고 잘 살아왔다. 그런데, 흘러간 그 옛노래는 그 당시의 내 기분까지 고스란히 담고있었다는 듯 노래를 듣는 나를 강제로 그 순간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허나 내가 서글펐던 것은 잊고 있던 안 좋은 추억들이 다시 되살아나서가 아니었다. 먼저 말했듯 먼지 앉은 흉터는 더이상 아프지 않다. 내가 진정 서글펐던 건, 바로 두껍게 무장한 내 심장 때문이었다.  이젠 정말 다 잊고 사라지고 그저 덤덤함만이 남게 되었나, 이런게 나이를 먹고 세월을 쌓아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나는 못내 서글펐다.

노래 아니 음악의 힘이 대단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번 화들짝 깨달았다.
그러나. 갑갑한 내 기분을. 내 심장은.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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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참 좋아하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 제목이다.

春光乍洩.

처음 저 제목을 접했을 때 한문에 무지 약한 나는 뒤의 두 글자를 읽지 못했는데 그 의미를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때 왠지 마음이 싸해졌었다.

잠깐 사, 샐 설...... 구름 사이로 잠깐 비추는 봄 햇살, 이라니.

영어 제목인 happy together와는 또 다른 황망한 느낌.

제목처럼 영화는 아름다웠고 또 서글펐다.

하지만 잠깐 비추고 사라지는 봄햇살처럼 사랑도 그렇게 잠깐이라서 슬퍼하기 보다는 오히려 구름 사이로 햇살이 얼굴을 내미는 그 잠시의 순간이 얼마나 반갑고 얼마나 따뜻한지를 먼저 생각하기로 했다.

인생이 매일 봄날 일 수 없듯이 매일 먹구름도 아닐지니, 나는 조금은 긍정적으로 구름 낀 나날들 속에서 잠시 만나는 봄햇살 같은 시간조각들을 이곳에다 남겨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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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극장은 멀고 TV는 가깝던 시절, 주로 주말의 명화들을 섭렵하며 영화의 세계에 한 쪽 발을 담그고 있던 나는 그것들만이 그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간간히 집에서 발견되던 '스크린' 이라는 잡지를 간식삼아 먹어치우면서 헐리웃 영화가 마구 심어주는 꿈과 희망의 열락에 빠진 나는 그 당시 '방화' 라고 불리우던 것들을 싸그리 무시하며 헐리웃이 던져 주던 모든 것을 그저 널름널름 받아 먹으며 행복해 했었다.

그러다 나이를 먹고 머리통은 굵어지고 발은 발발거리며 여기저기를 싸돌아댕기니 내가 알고 있던 그 세계가 내게 두루뭉수리한 실체와 싸가지없는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그에 나는 머리 속에 존재하던 헐리웃의 권좌를 사뿐히 갈아치우면서 그 자리에 한국영화를 포함한 온갖 영화들을 가져다 마구 얹어놓았다. 그 또다른 영화의 세계는 내가 십수년을 낯익어해왔던 영화의 틀을 없애고 갈아엎고 뛰어넘으며 내게 돌진해왔고 그 새로운 맛깔남에 나는 한때 졸아가며 이름 긴 감독들의 영화를 보고, 이름 어려운 감독들의 영화라면 사족을 못쓰는 만행까지도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싫증 잘내는 성미를 못버리고 곧 그것조차 시들하게 되자 본디 그렇듯 그냥 꼴리는 대로 보기,의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영화를 대하게 되었는데, 우스운 건 나름대로 이맛저맛 다 본 후라서 줄거리나 내용보다는 무조건 좋아하는 배우나 감독에 따라서 영화를 고르는 짓을 계속 하고 있으며, 헐리웃 딱지가 큼지막하게 붙은 스펙타클감동만빵스토리, 너에게는 나를 보낼 수 없다,는 같잖은 오기도 계속 부리고 있다. 사실 뭐 워낙 액션이나 전쟁물을 안 좋아하는 이유도 있기야 있지만. 어쨌거나 묻지도 않은 과거사를 주루룩 읊어댄 이유는 단 하나, <태극기 휘날리며>는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한국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그 스펙타클감동스토리로나 돈 많이 쓴 티 팍팍 내는 모양으로나 코묻은 내 돈과 같잖은 내 감동을 받아먹기에는 상당히 불리했다는 얘기가 하고 싶어서였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광고를 때려댈 때 한 번 쓱 눈길을 준 것, 최단기간 1000만 돌파 어쩌구 할 때 뉴스 한 번 본 것을 말고는 역시 관심도 없었고 딱히 볼 마음도 들지 않았다. 강제규 감독도 별로고 제작비 백 몇 억도 그냥 그렇고 원빈도 뭐 관심없고(장동건은 좀 낫다) 아까도 말했듯 전쟁영화 자체에 진짜 관심이 없으니, 하등의 볼 이유가 없었다. 어릴 적 토요일마다 잽싸게 학교 갔다 와서 가열차게 채널을 돌려대도 딱히 볼 건 없는데 토욜이고 TV는 봐야겠고 해서 억지로 보던 '배달의 기수' 의 안 좋은 추억 때문인지 아니면 대부분의 리얼한 전쟁영화에는 예쁜 여자가 당최 안나와서 그런건지 어쨌든 남들 다 좋다던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한편의 시라는 <씬 레드 라인>이나 나한테는 진짜 졸린 영화들이었다. 그런데 왜 봤냐고 누가 물으신다면 뭐 대답은 뻔하다. 일요일이었고 방구석에 늘어져 있었고 친구가 보여준다고 꼬셨고 귀찮다고 하니 술까지 사준다고 그물을 쳐왔고, 해서 난 못 이기는 척 그냥 덥석 그물에 몸을 내던졌을 뿐인, 그런 거였다. 이러하니 시작되는 순간부터 이미 난 이 영화에 좋은 감정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본 인간들마다 족족 감동적이네, 울었네, 했던 것을 되새기고 있던 나는, 내가 호락하니 감동을 먹어줄줄 아느냐- 하는 거의 정신나간 째려봄의 수준으로 감상을 시작했으니, 뭐 거의 혼자 벌이는 쌩쇼였던 셈.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영화를 계속 보다 보니, 째려보느라 눈알도 아프고 괜히 승질 피우니 슬슬 피곤도 몰려오고 해서만은 아닌, 그냥 나도 모르게 조금씩 그 속에 빠져들었다.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꼭 나처럼 표현하진 않겠지만, 이 영화 대략 정신없었다. 전쟁터에 안가봐서 잘은 모르겠지만 진짜 눈 앞으로 총알이 퓌융퓌융 소리내며 쌩쌩 날아다니고, 사람은 여기저기서 사지절단나며 피를 뒤집어쓰고, 수류탄 막 터져대서 사람이며 흙더미며 피가 천지사방으로 튀어나가고 하니, 가뜩이나 눈알이 건조해서 상태가 안 좋은 나는 흔들리는 전쟁의 현장을 따라잡느라 진짜 멀미가 나고 눈알이 빠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폭탄 맞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 꼬는 심정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진지 오래였고 속으로는 나도 모르게 감탄이 절로 나왔다. 동네 극장이라 유난히 애새끼들이 많이 와서 절로 짜증이 났던 감정마저 어느새 물밀듯이 사라졌고 총 쏴서 뒷통수 터지는 장면에서는 '어맛 이런거 어린 애들이 봐두 괜찮나' 하며 나도 모르게 그 생생함에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그런데 결국 한 시간이 지나면서부터 나는 슬슬 지쳐갔다. 춘삼월 꽃구경도 하루이틀이지 무슨 중공군 인해전술도 아니고 두 시간을 내내 박터지게 리얼해주시니 머리가 아플 지경이 아니라 진짜로 머리가 아팠고 멀미가 났으며 귀도 아팠고 부아도 치밀었다. 그리고 아 C 전쟁 언제 끝나고 집에 가냐,고 내가 전쟁에라도 참전한 듯 간절한 기분마저 솟구쳐오는 것이었다. 막판에 할아버지가 된 원빈이(젠장 극 중 원빈 이름도 기억이 안난다) 진태(장동건 이름은 기억난다;)의 해골 앞에서 형 형 하며 울 때는 사실 좀 짠하기도 했다. 물론 그 전에 인민군 전사가 된 장동건이 원빈을 위해서 지네 편을 겨누고 따발총을 발사해댈 때나 아니면 아예 그 전에 두 형제가 졸지에 군대로 끌려 갈 때 엄마랑 헤어지던 장면에서는 감동같은 거 안해주리라 하던 오기는 어디 갔는지 나도 모르게 울 뻔도 했다.(사실 신파에 약하다;) 어쨌거나 몇 번의 짠함과 감탄 그리고 전반적인 멀미를 겪고나니 영화는 끝나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니 강제규라는 사람이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6.25라는 역사적, 민족적 아픔 어쩌구 하는 거창한 소재를 끌어 들인다는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닐진대 게다가 그 상흔에는 5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함부로 풀지 못하는 이념이라는 문제가 결부되어 있는데도 그는 중장년층까지 극장으로 끌어올 수 있는 그 소재를 끝까지 아무 문제없이 엮어내었다. <태백산맥>처럼 원작 비스무리하게만 만들어도 우익단체에서 난리를 떨어대는 나라에서 가장 민감할 수도 있는 재료를, 끝간데없는 '형제애'(이게 영어 제목이란다)라는 머리가 아닌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고급양념으로 잘 버무리고 눈과 귀와 혼까지 쏙 빼놓을 것 같은 최첨단 특수효과로 완벽하게 데코레이션 하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그런데도 그는 해냈다. 그것도 아주 잘. 1000만명이라는 인간들이 가서 보고 울고 할 만큼, 돈도 전혀 아깝지 않을 만큼. 그저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다른 할 말이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 영화가 잘 만들어져서 잘 되면 한국 사람인 내가 좋으면 좋았지 나쁠 게 뭐가 있을까마는, 영화를 보기전에 가진 내 편견은 차치하고라도 영화를 보고 나오는 내 기분이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라면, 남들 다 좋다니까 괜히 튈려고 지랄하네, 하고 누가 말한대도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그냥 돈 많이 들여서 돈 많이 버는 영화를 보면 다행이다 싶은 생각보다는 왠지 작고 재밌는 영화들이 더 사라져버릴 것 같은 아쉬움이 엄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한국영화의 다양성 어쩌구 하는 훌륭한 얘기를 줏어들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한없이 게으른 내가 한 주만에 극장에서 홀랑홀랑 사라져버리는 영화들을 놓치고 땅을 치면서 비디오나 빌려보는 일이 게으름을 고치기 전까지는 계속 될거 같아서 너무 싫기 때문이다.

영화가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총알이며 폭탄이며 시체며 점점 다 돈으로 보였다면 흠, 역시 너무 오바인가. 어쨌거나 <태극기...>와 비슷한 이유로 관심 없었던 <실미도>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왠지 강하게 드는 것은 전반적으로 비교를 당하는 두 작품에서, 태극기가 심어준 그 어떤 찝찝함을 실미도, 네가 벗어나게 해다오, 하는 바램과 기대 때문이겠다. 또다시 여자주인공없는 삭막한 영화를 봐야한다는 것이 못내 애통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극장에서 다 사라져버리기 전에, 얼른 실미도로 달려가봐야겠다. 아, 나를 기다려 줄까.?

 

+)

역시나 난 원빈이 별로라는 걸 다시 한번 확실하게 깨달았다.(그래도 장동건 은 점수 좀 먹었는데;) 
사실 형제애라고는 개미똥정도 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내게 돈독한 형제애로 휘날려 제껴지는 영화가 가슴에 딱 달라붙기를 바라는 자체가 개꿈스럽다.

핀트가 좀 안맞긴 하지만, 난 장동건이 부러웠다. 동생이든 가족이든 아니 그 무엇이라도 자신을 온통 몰두하여 내던질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 아닌가. 비록 흙더미 속에서 이름없는 무덤으로 남을지언정, 그는 행복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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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한 번 만나보고 싶다네, 가 어쩌면 영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을 보고 난 느낌의 최종판이다. 하지만 시니컬한 척 입꼬리에 야비리한 웃음을 일부러 매달면서 세상에 저런 새끼가 어딨어, 영화속이니까 어쩌구 같은 꼬는 투의 의미는 절대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야 좋겠다. 물론 홍반장이 착한데다 의리 있고 노래 잘하고 쌈도 졸라 잘하고 대략 하는 짓거리로 미뤄 못하는 게 없는 올라운드플레이어인 것은 너무 주인공 냄새가 뭉개뭉개 나기 때문에 씹퉁댈 기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난 그, 넉살 좋고 사람냄새 확 풍기는 인정많은 아저씨틱함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그는 내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삶의 태도, 감정을 숨기고 애써 무심한 척 할 것,의 행동지령을 대체적으로 그럴 듯 하게 보여줌으로 지극히 개인적인(순전한 내 꼴림대로의 꼴림)차원이긴 하지만 어쨌든 대략 점수를 먹고 들어갔다. 

사실 쓰잘데기 없이 늘여 놓은 듯 길쭉한 제목은 일단 튀어서 눈길을 끈다기 보다는 오히려 아무 것도 아닌 내용을 무마하려는 작전일거란 생각을 먼저 들게 했다. 뭐 언제는 제목보고 영화 골랐냐마는, 근데도 짚신짝마냥 꼬인 인간인 나는 제목한번촌스럽구만,하는 멘트를 아무도 안 듣는데도 억지로 날려주며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막상 속을 들여다보니 영 쓰잘덱없어 보였던 그 제목은  마치 새우깡 봉다리 안에 당연지사 새우깡이 소복히 들어있듯 구구절절 사실이고야 말았다. 홍반장, 실로 그가 살고 있는 '지중해풍'의 작은 어촌에서는 동해번쩍 서해번쩍 하는 그 면상을 모르면 간첩인 것이었다.

내용은 뭐 이미 이 영화가 로맨틱코미디라는 깃발을 휘날리고 있는 것만 봐도 대략 짐작하다시피 일단은 그냥 그 사이즈다. 홍반장이 주름잡고 있는 시골 동네에 엄정화가 이사오고, 처음엔 하이톤의 앵앵거림으로, 엄머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셔, 하다 결국 홍반장의 주름 안에 고이 포섭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러브스토리. 그렇다고 내가 로맨틱코미디의 달고 근지러운 전개를 모조리 싫어하냐면 그건 절대 아니고, 그저 왜 그 꼬리표만 붙으면 이놈저년 얼굴만 바뀌었지 그렇게도 다 비스무리해질 수 밖에 없느냐 하는 약간의 아쉬움을 감출 도리가 없을 뿐이다. 물론 안그런 것들도 분명이 있고, 있지만, 그래서 이 놈의 <홍반장>을 안그런 영화다-라고 정말로! 얘기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초반에 점수 열라 내다가 후반에 홀랑 까먹고 역전패 당하는 거랑 비슷한, 안됐다면 안된 뭐 그런 형국이었다.

홍반장이라는 서른 한살 먹은 남자. 동네 한 구석 쓰러져 가는(그러나 당연히 운치있는) 창고에서 혼자 살며 특정한 직업도 없이 동네를 오지랖넓게 돌보는, 엄정화의 표현에 의하면 일당 오만원짜리 동네잡부가 바로 그다. 신출귀몰하며 엄정화를 놀래켰다가 놀렸다가 도와줬다가 다시 구박했다가 하는 짓거리로 결국 노처녀 엄양의 마음을 뿌리채 흔들어 뽑아가버리는 역할인데 여기서 일견 중요한 것은 당연히 홍반장의 의향은? 이다.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언제든지 슈슝 나타나서 수퍼맨처럼 도와줄 수는 있지만 망토떼고 빤쓰벗고 올인은 안 된다-는 속절없는 튕김과 함께 그냥 속깊은 이성친구만 하자고 웃지도 않고(뭔가 절라 중요막심한 사연이라도 있는 듯 아련한 눈빛 날리며) 진지하게 말함으로서 엄양 쪽을 사정없이 팔아버리는 게 그의 공식화된 입장표명인데, 뭐 아는 사람은 다 알 듯 그건 후반부에 가서 알고보니 그랬었었던것이었었어와 함께 두 남녀를 묶어줘야지 너무 빨리 덥석 연결이 되어버리면 러닝타임이 짧아져뻐리기 때문에 절대 안되는, 사랑질 영화의 뭐 어쩔 수 없는 숙명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특정 직업도 꿈도 없이 동네 뒷수발 무수리로만 보이는 그는 후반부로 가면서 괜히 뭔가 사연따라 삼천리라도 있는 듯한 뉘앙스를 자꾸 풍겨대는데- 어쩌면 당연하게 뭔가 있을 거라는 편견을 지니고 보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라는 생각도 들지만(그냥 꼴리는대로 사는데 무슨 사연이 필요한가)- 막판에 밝혀지는 그동안 튕김에 대한, 한 줄의 해명은 참으로 그윽하고 너무나도 멋들어져서 할리퀸 애독자들이 울고 갈 지경이라 내 머리맡으로 실망의 먹구름들이 우루루 몰려오며 야, 그거랜다 라고 마구 소나기를 때려대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 전에 라스트 씬을 장식하기 위해 내처 달려온 엄정화가 반어법의 사랑고백을 어렵게 해댄 후 바로 홍반장의 벽장 속이 의도치않게 까뒤집어지는 장면에서 이미 실망의 회오리는 산뜻하게 불어닥치며 골몰하던 골머리를 해탈케 해준 바 있다)     

그리고 엄정화(홍반장처럼 영화 속 이름으로 불러야 할 것 같으나 그냥 그러기 싫음), 뭐 구구절절 얘기 할 것도 없이 그냥, 그녀는 어찌하여 홍반장의 그물 속에 (일부러)걸렸는가 정도로 그 입장을 요약할 수 있겠는데, 내가 실망한 건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그 서른 살 여자의 이미지였다. 딴별나라 공주 어쩌고 하면서 사랑질 영화 주인공답게 정통 신데렐라 핏줄임을 내세우며 잡부와 치과의사 절대 안어울렷!을 외칠 때까지는 그래도 차라리 귀여웠다. 허나 갑자기 맘 확 바꾸고 띡 가서 우리 한번 사귀어보아요- 하는 것도 뜬금없는 와중인데, 거기다가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정의로운 인간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끊임없이 사건사고를 벌이고 다니느라 바빴으며 한 술 더떠서 알고보니 엄청시리 부잣집 딸임에도 불구하고 비린내난다는 이유로 애비 돈은 딱 끊고 혼자 잘 살아온 것은 또 얼마나 독립적인 모습인가 하며 내내 온 심신을 소진하며 캐릭터 구축에 여념이 없었는데, 애석하게도, 별반 와닿지 않음이었다. 그저 그녀가 벌인 해프닝들은 오히려 홍반장의 멋들어진 사고 뒷처리 능력을 증명하기 위한 베이스로 보였고, 또한 동네잡부에서 왕자로의 환골탈태를 위한 눈물겨운 변태과정으로 보였으며, 심하게 말하자면 그녀는 마치 홍반장에게 반하기 위해 혹은 그가 얼마나 괜찮은 인간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듯 보이기까지 했으니, 실로 그녀의 살신성인은 하나의 경지였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허벌나게 씹어댄 것처럼 이 영화가 그냥 웃기는 짜장이냐, 하면 절대 그건 아니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다. 솔직히 영화를 보고 나오는 내 기분이 좀 찌뿌둥하기는 했지만 완전 거지같은 영화에는 찌뿌둥이고 나발이고 그저 쌍욕만이 남을지니, 그래도 찌뿌둥함은 한 자락 아쉬움의 표현이 아닌가. 사실, 꽤 재미있었고 꽤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쌩난리부르스를 보고 한 번 픽 하는 억지웃음이 아닌 대략 순도높은 웃음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라는 인간은 아무리 후진 영화를 봐도 장면하나 , 대사 하나라도 괜찮으면 뭐라도 건졌다고 좋아하는 취미를 지니고 있기에 이 영화에 뭐 대단한 걸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뭐가 어찌되어야 좀 아쉬움이 덜했겠나 알만큼큼 아는 것도 하나 없지만, 그냥 드는 생각은 로맨틱과 코미디를 섞어찌개로 끓이는 것은 거참 역시 어려운 일이겠지 하는 것이다. 특히나 후반부로 갈수록 보여지는 로맨틱한 결말에의 강박은 오히려 더 코미디였다고 본다.(홍반장의 벽장 속, 난 어찌나 웃기던지;;) 하지만 이러저러한 찝쭈구리함의 감정 속에서도 내가 이 영화를 괜찮게 기억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래도 오랜만에 사람사는 얘기를 본 것같아 조금은 반가웠기 때문이다. 

 

철길에서 그녀의 고백을 거절하던 홍반장의 눈빛이 왠지 오래 기억에 남는다.(뜬금없는감정이입;;;) 다시봤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진정한 동네잡부의 삶을 몸으로 체득한 후 꿋꿋한 신념으로 정진하는 자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홍반장의 통장선거출마선언!은 진심으로 부러웠다.

 

덧붙임; 같이 본 친구는 영화취향에 관해서는 진짜 종잡을 수 없는 자식이다. 남들 다 좋다는 영화 그닥 좋아하는 꼴 못봤고, 남들 졸리다는 영화를 의외로 좋아하냐면 것도 아니고, 액숑이냐 코미디냐 에로냐 하는 삘 꽂히는 취향을 가진 것도 아니고(물론 소장한 에로?물은 몇편있다;;), 그래서 영화를 별반 안좋아하느냐 하면 그건 더더욱 아니고, 한 마디로 영화를 보는 목적조차 뭔지 모르겠는 종자다. 근데 이 자식이 평소와 달리 영화보는 내내 졸거나 뒤치적거리지 않고 눈알 텨나오도록 집중을 하길래 나오면서 슬쩍 물었더니, 어-재밌네, 한다. 헉, 그 넘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영화에 대한 최고의 찬사, 재밌네-를 그리 허망히 듣게 될 줄이야. (참고로, 그린마일, 이후로 처음임) 어쨌거나 웃긴 그 녀석은, 홍반장이 참 좋았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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