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 한 번 만나보고 싶다네, 가 어쩌면 영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을 보고 난 느낌의 최종판이다. 하지만 시니컬한 척 입꼬리에 야비리한 웃음을 일부러 매달면서 세상에 저런 새끼가 어딨어, 영화속이니까 어쩌구 같은 꼬는 투의 의미는 절대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야 좋겠다. 물론 홍반장이 착한데다 의리 있고 노래 잘하고 쌈도 졸라 잘하고 대략 하는 짓거리로 미뤄 못하는 게 없는 올라운드플레이어인 것은 너무 주인공 냄새가 뭉개뭉개 나기 때문에 씹퉁댈 기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난 그, 넉살 좋고 사람냄새 확 풍기는 인정많은 아저씨틱함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그는 내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삶의 태도, 감정을 숨기고 애써 무심한 척 할 것,의 행동지령을 대체적으로 그럴 듯 하게 보여줌으로 지극히 개인적인(순전한 내 꼴림대로의 꼴림)차원이긴 하지만 어쨌든 대략 점수를 먹고 들어갔다.
사실 쓰잘데기 없이 늘여 놓은 듯 길쭉한 제목은 일단 튀어서 눈길을 끈다기 보다는 오히려 아무 것도 아닌 내용을 무마하려는 작전일거란 생각을 먼저 들게 했다. 뭐 언제는 제목보고 영화 골랐냐마는, 근데도 짚신짝마냥 꼬인 인간인 나는 제목한번촌스럽구만,하는 멘트를 아무도 안 듣는데도 억지로 날려주며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막상 속을 들여다보니 영 쓰잘덱없어 보였던 그 제목은 마치 새우깡 봉다리 안에 당연지사 새우깡이 소복히 들어있듯 구구절절 사실이고야 말았다. 홍반장, 실로 그가 살고 있는 '지중해풍'의 작은 어촌에서는 동해번쩍 서해번쩍 하는 그 면상을 모르면 간첩인 것이었다.
내용은 뭐 이미 이 영화가 로맨틱코미디라는 깃발을 휘날리고 있는 것만 봐도 대략 짐작하다시피 일단은 그냥 그 사이즈다. 홍반장이 주름잡고 있는 시골 동네에 엄정화가 이사오고, 처음엔 하이톤의 앵앵거림으로, 엄머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셔, 하다 결국 홍반장의 주름 안에 고이 포섭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러브스토리. 그렇다고 내가 로맨틱코미디의 달고 근지러운 전개를 모조리 싫어하냐면 그건 절대 아니고, 그저 왜 그 꼬리표만 붙으면 이놈저년 얼굴만 바뀌었지 그렇게도 다 비스무리해질 수 밖에 없느냐 하는 약간의 아쉬움을 감출 도리가 없을 뿐이다. 물론 안그런 것들도 분명이 있고, 있지만, 그래서 이 놈의 <홍반장>을 안그런 영화다-라고 정말로! 얘기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초반에 점수 열라 내다가 후반에 홀랑 까먹고 역전패 당하는 거랑 비슷한, 안됐다면 안된 뭐 그런 형국이었다.
홍반장이라는 서른 한살 먹은 남자. 동네 한 구석 쓰러져 가는(그러나 당연히 운치있는) 창고에서 혼자 살며 특정한 직업도 없이 동네를 오지랖넓게 돌보는, 엄정화의 표현에 의하면 일당 오만원짜리 동네잡부가 바로 그다. 신출귀몰하며 엄정화를 놀래켰다가 놀렸다가 도와줬다가 다시 구박했다가 하는 짓거리로 결국 노처녀 엄양의 마음을 뿌리채 흔들어 뽑아가버리는 역할인데 여기서 일견 중요한 것은 당연히 홍반장의 의향은? 이다.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언제든지 슈슝 나타나서 수퍼맨처럼 도와줄 수는 있지만 망토떼고 빤쓰벗고 올인은 안 된다-는 속절없는 튕김과 함께 그냥 속깊은 이성친구만 하자고 웃지도 않고(뭔가 절라 중요막심한 사연이라도 있는 듯 아련한 눈빛 날리며) 진지하게 말함으로서 엄양 쪽을 사정없이 팔아버리는 게 그의 공식화된 입장표명인데, 뭐 아는 사람은 다 알 듯 그건 후반부에 가서 알고보니 그랬었었던것이었었어와 함께 두 남녀를 묶어줘야지 너무 빨리 덥석 연결이 되어버리면 러닝타임이 짧아져뻐리기 때문에 절대 안되는, 사랑질 영화의 뭐 어쩔 수 없는 숙명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특정 직업도 꿈도 없이 동네 뒷수발 무수리로만 보이는 그는 후반부로 가면서 괜히 뭔가 사연따라 삼천리라도 있는 듯한 뉘앙스를 자꾸 풍겨대는데- 어쩌면 당연하게 뭔가 있을 거라는 편견을 지니고 보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라는 생각도 들지만(그냥 꼴리는대로 사는데 무슨 사연이 필요한가)- 막판에 밝혀지는 그동안 튕김에 대한, 한 줄의 해명은 참으로 그윽하고 너무나도 멋들어져서 할리퀸 애독자들이 울고 갈 지경이라 내 머리맡으로 실망의 먹구름들이 우루루 몰려오며 야, 그거랜다 라고 마구 소나기를 때려대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 전에 라스트 씬을 장식하기 위해 내처 달려온 엄정화가 반어법의 사랑고백을 어렵게 해댄 후 바로 홍반장의 벽장 속이 의도치않게 까뒤집어지는 장면에서 이미 실망의 회오리는 산뜻하게 불어닥치며 골몰하던 골머리를 해탈케 해준 바 있다)
그리고 엄정화(홍반장처럼 영화 속 이름으로 불러야 할 것 같으나 그냥 그러기 싫음), 뭐 구구절절 얘기 할 것도 없이 그냥, 그녀는 어찌하여 홍반장의 그물 속에 (일부러)걸렸는가 정도로 그 입장을 요약할 수 있겠는데, 내가 실망한 건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그 서른 살 여자의 이미지였다. 딴별나라 공주 어쩌고 하면서 사랑질 영화 주인공답게 정통 신데렐라 핏줄임을 내세우며 잡부와 치과의사 절대 안어울렷!을 외칠 때까지는 그래도 차라리 귀여웠다. 허나 갑자기 맘 확 바꾸고 띡 가서 우리 한번 사귀어보아요- 하는 것도 뜬금없는 와중인데, 거기다가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정의로운 인간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끊임없이 사건사고를 벌이고 다니느라 바빴으며 한 술 더떠서 알고보니 엄청시리 부잣집 딸임에도 불구하고 비린내난다는 이유로 애비 돈은 딱 끊고 혼자 잘 살아온 것은 또 얼마나 독립적인 모습인가 하며 내내 온 심신을 소진하며 캐릭터 구축에 여념이 없었는데, 애석하게도, 별반 와닿지 않음이었다. 그저 그녀가 벌인 해프닝들은 오히려 홍반장의 멋들어진 사고 뒷처리 능력을 증명하기 위한 베이스로 보였고, 또한 동네잡부에서 왕자로의 환골탈태를 위한 눈물겨운 변태과정으로 보였으며, 심하게 말하자면 그녀는 마치 홍반장에게 반하기 위해 혹은 그가 얼마나 괜찮은 인간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듯 보이기까지 했으니, 실로 그녀의 살신성인은 하나의 경지였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허벌나게 씹어댄 것처럼 이 영화가 그냥 웃기는 짜장이냐, 하면 절대 그건 아니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다. 솔직히 영화를 보고 나오는 내 기분이 좀 찌뿌둥하기는 했지만 완전 거지같은 영화에는 찌뿌둥이고 나발이고 그저 쌍욕만이 남을지니, 그래도 찌뿌둥함은 한 자락 아쉬움의 표현이 아닌가. 사실, 꽤 재미있었고 꽤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쌩난리부르스를 보고 한 번 픽 하는 억지웃음이 아닌 대략 순도높은 웃음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라는 인간은 아무리 후진 영화를 봐도 장면하나 , 대사 하나라도 괜찮으면 뭐라도 건졌다고 좋아하는 취미를 지니고 있기에 이 영화에 뭐 대단한 걸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뭐가 어찌되어야 좀 아쉬움이 덜했겠나 알만큼큼 아는 것도 하나 없지만, 그냥 드는 생각은 로맨틱과 코미디를 섞어찌개로 끓이는 것은 거참 역시 어려운 일이겠지 하는 것이다. 특히나 후반부로 갈수록 보여지는 로맨틱한 결말에의 강박은 오히려 더 코미디였다고 본다.(홍반장의 벽장 속, 난 어찌나 웃기던지;;) 하지만 이러저러한 찝쭈구리함의 감정 속에서도 내가 이 영화를 괜찮게 기억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래도 오랜만에 사람사는 얘기를 본 것같아 조금은 반가웠기 때문이다.
철길에서 그녀의 고백을 거절하던 홍반장의 눈빛이 왠지 오래 기억에 남는다.(뜬금없는감정이입;;;) 다시봤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진정한 동네잡부의 삶을 몸으로 체득한 후 꿋꿋한 신념으로 정진하는 자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홍반장의 통장선거출마선언!은 진심으로 부러웠다.
덧붙임; 같이 본 친구는 영화취향에 관해서는 진짜 종잡을 수 없는 자식이다. 남들 다 좋다는 영화 그닥 좋아하는 꼴 못봤고, 남들 졸리다는 영화를 의외로 좋아하냐면 것도 아니고, 액숑이냐 코미디냐 에로냐 하는 삘 꽂히는 취향을 가진 것도 아니고(물론 소장한 에로?물은 몇편있다;;), 그래서 영화를 별반 안좋아하느냐 하면 그건 더더욱 아니고, 한 마디로 영화를 보는 목적조차 뭔지 모르겠는 종자다. 근데 이 자식이 평소와 달리 영화보는 내내 졸거나 뒤치적거리지 않고 눈알 텨나오도록 집중을 하길래 나오면서 슬쩍 물었더니, 어-재밌네, 한다. 헉, 그 넘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영화에 대한 최고의 찬사, 재밌네-를 그리 허망히 듣게 될 줄이야. (참고로, 그린마일, 이후로 처음임) 어쨌거나 웃긴 그 녀석은, 홍반장이 참 좋았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