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서랍 정리를 하다가 한 귀퉁이에서 먼지를 풀썩 뒤집어 쓰고 누워있던 테잎 한 뭉치를 발견했다. 내가 휴대용 씨디 플레이어를 처음 가지게 된 게 97년인가였으니 즉 그 테잎들은 97년 이전의 흔적인 셈인데, 예전에 이사 올 때 한 번 추스리고 버리고 해서 몇 개 되지는 않았지만 하나하나 꺼내서 보면 볼수록 참 놀랍고도 기이했다. 아직 10년도 채 지나지 않은 그 기억들도 테잎의 꼬락서니만큼이나 구석으로 밀려나 먼지를 덮어쓰고 있었던 것인지, 내게 그 테잎들은 어찌나 생소하고 낯선지 아마 내 서랍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내 것인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잘 듣게 되지도 않을 것을 그래도 그렇게 남겨놓은 것이나 정품 테잎보다 공테잎에 녹음을 한 것이 많은 것을 보아서나 예전에 이 놈들을 챙길 때는 나름대로 아끼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은데 누구 노랜지 무슨 음악인지 라벨 하나 붙어 있지 않은 몇 개의 테잎은 확인사살을 위해 카세트 테크에 들어가자 나를 더욱 뒤집어지게 만들었다.
물론 생각을 해보면 전혀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때의 나는 주로 가요만 들었고 게다가 흐느적거리는 발라드를 테잎 앞 뒷면에 꽉꽉 채워서 기분이 꿀꿀할 때마다 더 꿀꿀해지라고 일부러 듣고 다녔었다. 헌데 기억은 그저 기억일 뿐, 노래가 한 곡 한 곡 재생될 때마다 나는 흐액- 이 노래 뭐야 라는 멘트를 녹음이라도 된 것마냥 나도 모르게 계속 읊어대고만 있었다.
게다가 노래야 그렇다치고, 레코딩;;은 정말, 엉성의 극치로 곡과 곡 사이 연결도 매끄럽지 못하고 시작과 끝점 또한 들죽날죽 엉망이라 도대체 노래를 들으려고 녹음을 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테잎에 노래 몰아쳐넣기 놀이를 한 것인지조차 헷갈리는 수준이었다. 듣다듣다 나는 결국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그래서 더이상 괴로워지기 전에 냅다 모두 내버리리라 하며 주섬주섬 테잎들을 챙기는데 갑자기 무슨 운명처럼 노래 하나가 새로 시작되어 흘러나왔다.
여자 가수의 목소리, 잔잔하다가 뒤로 갈수록 무지하니 고음이 되어 클라이막스를 이루는 내가 부르기엔 불가능한 노래. 네가 떠나고 나서야 소중함을 알았으니 얼렁 다시 돌아와주시게 하는 애절하고도 뻔한 내용의 가사를 지닌 그 노래. 나는 순식간에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리고 전혀 모른다고도 다 안다고도 할 수 없는 어중간하고도 이상한 익숙함은 노래가 반복되는 후렴구에 이르자 갑자기 내 심장 한 구석을 마구 찔러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자극은 희한하게도, 심장을 가격하긴 하나 심장이 마치 아주 두터운 상자 안에 들어있어서 바깥에서 두드려대는 걸 직접적이 아닌 그저 간접적인 울림으로만 전해받는 듯한 아주 둔탁하고 답답한 저림이었다. 그리고는 마치 내 심장을 향해서 왜 그렇게 둔해졌냐고 자기를 잊었냐고 좀 더 뾰족하고 격렬하게 반응하라고 다그치는 듯 했고 나는 왠지 그 주문에 맞도록 그렇게 해주어야만 할 것 같은데 두터운 상자 속의 심장이 맨살이 아닌 몇겹의 상자 속에 갖혀서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생각해보니 그 노래를 듣던 때는 97년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생각나는 사람이 있으니, 그 때 그 노래를 자주 듣던 나는 아마도 좀 심하게 우울해지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대략 6,7년의 시간은 상처와 고름, 딱지조차 모두 쓸어가버리고 그저 먼지 쌓인 작은 흉터 하나만을 남겨놓았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아프지도 따갑지도 간지럽지조차 않고 때로 아니 거의 그 흉터의 존재마저 잊고 잘 살아왔다. 그런데, 흘러간 그 옛노래는 그 당시의 내 기분까지 고스란히 담고있었다는 듯 노래를 듣는 나를 강제로 그 순간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허나 내가 서글펐던 것은 잊고 있던 안 좋은 추억들이 다시 되살아나서가 아니었다. 먼저 말했듯 먼지 앉은 흉터는 더이상 아프지 않다. 내가 진정 서글펐던 건, 바로 두껍게 무장한 내 심장 때문이었다. 이젠 정말 다 잊고 사라지고 그저 덤덤함만이 남게 되었나, 이런게 나이를 먹고 세월을 쌓아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나는 못내 서글펐다.
노래 아니 음악의 힘이 대단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번 화들짝 깨달았다.
그러나. 갑갑한 내 기분을. 내 심장은. 알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