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과 김용옥 - 상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글을 쓴 강준만은 글과 말이 잘 구분되지 않는 사람이다. 글을 말하듯 쓰기로 유명한 사람이고 그래서 가끔 그의 글은 가볍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거기다 엄청난 다작으로도 유명하다. 이 책도 그 '다작' 중의 하나인 셈이다. 지난 잡지와 그 자신이 발행하는 인물과 사상에 발표했던 글과 새로쓴 글을 묶어낸 이 책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그의 단편적인 인물평이 이제 특정한 인물에 대해 한 권의 책이 될 정도로 오랫동안 진행되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첫 주제가 세간에 항상 화제를 몰고오는 이문열과 김용옥이라는 점이다. 그 의도가 무엇이었건, 이 책은 그가 썼던 『김대중 죽이기』나 『김영삼 이데올로기』 형식을 크게 벗어나고 있지는 않다. 이것이 지겨워해야할 일인지 아니면 그 일관성을 칭찬해주어야할 것인지는 책을 읽을 독자의 몫이다.

그런데 독자의 몫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강준만이 심심치 않게 주장하듯, 그는 많은 독자와 만나기 위해 많은 책을 쓴다. 또 같은 주제를 가지고 이 사람 저 사람을 평가한다. 만약 독자가 강준만이 추구하는 의도를 안다면 책을 사는 것은 '그를 돕고 행동에 동참하는' 지지선언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이 책은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예전에 읽었던 글에 새로 쓴 글을 몇 개 추가한 잡서에 불과할 수도 있다. 물론 강준만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는 '인물에 대한 집중적인 비평'이라는 한국에서 보기 힘든 아주 신선한 경험일 수 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이 책은 나에게는 정말 기이한 경험이다. 비록 철이 들고 쑥스러운 기억만으로 남았지만 스무 살을 전후하여 신처럼 떠받들었던 이문열과 아주 최근까지 존경과 흠모를 보냈던 김용옥을 당분간 내가 글을 쓰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칠 강준만의 해설로 들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세 사람은 내 인생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다. 오래되었거나 최근이라는 차이만 빼면 그 강도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 신기한 경험을 내가 어찌 마다하랴.

이 책이 주장하는 바를 한 마디로 설명하기는 좀 힘들다. 강준만은 이 책에서 '문화권력'과 '지식폭력'이라는 현상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매우 다양한 사례를 조합하는데 독자 입장에서는 그것이 생각처럼 일관되게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뚜렷하게 남는 것은, 이문열과 김용옥이라는 권위주의적 지식인의 문화권력에 대한 정당한 역할과 책임에 대한 추궁이다. 먹은 만큼 토해내고 누린 만큼 비판받으라는 아주 상식적인 요구인 셈인데, 한국사회에서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참 드물다. 그래서 강준만의 정말 시시한 주장이 그 소리를 듣는 사람에게는 '폭력'으로 느껴질 것이 틀림없다. 내 예상에 이문열과 김용옥은 틀림없이 강준만에게 '지적으로 폭행'당했다고 여길 것이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메로스와 테레비 - 미디어시대의 고전읽기
데이비드 덴비 지음, 황건 옮김 / 한국경제신문 / 1998년 9월
평점 :
절판


<호메로스와 테레비>를 모두 읽은 기분은 무덤덤하다. 내가 읽지 않은 고전이 거의 대부분이었고, 나는 고전보다는 그런 평론을 통해 고전을 접하는 경우가 더 많았으니 그런가보다 그러고 말아버릴 수도 있는 문제다.

내가 본 것은 저자의 균형있는 시각이었다. 스스로를 문화적 좌파라고 칭하지만, 그는 좀처럼 경도되지 않는다. 그는 역사의식이 있다. 역사의식이란 바로, 현재의 나를 잊지 않으면서도 과거의 실제와 의미를 바르게 해석하는 능력이다.

물론 어디까지가 현재의 나고 어디까지가 과거의 실제이며 어디까지가 해석과 판단이 가능한 부분인지는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오늘 내가 인종차별을 증오한다고 해서, 인종은 당연히 차별적이라는 사상에 근거해 운영되었던 몽골제국을 우두두두 비난하는 것은 역사의식의 발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여성억압적인 과거의 체제에서 씌어진 글들이 여성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그 글을 폐기처분해야한다는 유아성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강간 때문에 섹스를 폐지해야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고방식에 매우 익숙하다. 흔히 그렇지 않은 척하지만, 공생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비판을 보면 별로 그렇지 않다. 상대를 죽여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그 스타일이 특별히 뛰어난 세련미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매우 유치하면서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대한민국의 파시스트 시대에 횡횡하던 매도와 압살은 그들의 반대자들이 도덕적으로 옳아봐야 생존을 보장하진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도록 만들었고, 극과극의 정쟁은 우리 사회 곳곳을 갈라서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극단적인 정치적 특징이 우리의 시각 곳곳에 머물러있다.

우리의 시각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공정하며 여유로울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편과 적을 가르고 위와 아래의 눈치를 찾아헤아리도록 훈련된 몰모트들이다. 우리는 세상을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얼마나 지혜롭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아마 우리는 땅위에서 일어나는 먼지마저, 하루를 사는 꽃 한송이마저, 저 푸른 하늘마저, 그것이 내 편인지 적인지를 갈라야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분류법의 효능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우리는 아직 살아남기 힘든 세상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호메로스와 테레비>에 대한 내 독서는, 가관이었다. 나는 내 대학시절을 떠올렸다. 4지선다형 문제에서 갓 풀려난 고등학교 4학년이었던 나는, 답을 주관식으로 쓰는 "신선한 체제"를 거부하고, 아예 문제를 폐하는 방식을 시도했다. 물론 그 만용에 대해 조교들은 훌륭하게 답해주었다.

나는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왜 다시 버렸던 책을 다시 들고 있는 것일까?

<호메로스와 테레비>를 읽고도, 나는 호머의 <일리아드>를 읽고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루소의 <사회계약론>도 마찬가지고 니체의 <선악의 계보>는 물론이며, 맑스의 <경제학 수고>도 읽고싶지 않다. 더더군다나, 울프는 왠 말이며, 브론테는 어인 일인가. 이 지경이니 당연히 어거스틴의 <고백록>과 단테의 <신곡>과 괴테의 <파우스트>는 앞으로도 읽을 일이 없을 것이다.

내가 읽은 것은 그들이 그들의 고전을 대하는 방법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훌륭한 독서법이다. 그들에게는 고전이 있다. 단순히 오래된 이유가 아닌, 그 엄청난 시간을 지금 이 자리까지 이어가는 문화와 전통의 힘을 그들은 쌓아가고 있다. 우리의 문화를 이토록 서글프게 단절시키고도, 그들은 정말 잘 먹고 잘 살고있다.

하긴 역사에 무슨 도덕과 윤리가 있겠는가. 한낱, 교조적 민족인 우리가 역사에 가진 환상일 뿐이다. 덕분에 우리는 여전히 세상에는 나쁜 나라와 좋은 나라가 있다고 믿는 바보나라로 남아있고, 그게 다가오는 도덕적 세기에는 세계의 지도국이 될 자격조건이라는 휘황찬란한 예언조차 기분좋게 들리는 이유이기도 하니, 대단한 교조주의 나라요 백성이다.

그러는 너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래된 정원 - 상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을 모두 읽었다. 햇살이 따거운 차창가로 '잘가요, 여보'라는 글이 내 눈 안으로 들어오고, 나는 순간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참았던 듯한 울음을 터트렸다. 내 스스로는 감잡기 힘든 깊은 슬픔으로 눈물줄기가 한참을 타고내려 나는 책을 덮고있어야했다.

하긴 내 눈물의 의미는 대부분 신파조의 것이리라. 내가 이 소설이 말하는 동시대인의 사회적 삶에 공감하면 얼마나 공감할 것이며, 허구라는 소설에 빠지면 얼마나 빠졌을 것인가. 그저 나는 감옥 안과 밖에서 서로 만나지 못한채 저렇게 한 인생을 살아버린 주인공들의 애닲은 사연에 목이 메었을 뿐이리라.

허나 순간순간 내 기억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들은, 내가 겪었던 80년대와 내가 겉돌며 지켜보았던 그 활동가들의 삶이 적어도 헛것을 보거나 나만의 공상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 삶은 치열했고, 하다못해 병정놀이 같은 일상의 연속이었다하더라도 그런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오늘 내가 누리는 이런 최소한의 자유가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그런 정언적인 확신을 느낀다면 그건 감정이 메말랐다는 증거일테고, 오히려 황석영의 서정성은 운동가들의 삶과 사랑도 바로 '사람의 그것'임을 느끼도록 한다. 역사 속에서 특별히 분리되어 '무슨 권'으로 설명해야할 필요가 없는, 사람의 삶이라는 이야기다.

아직도 이들의 행동을 일상에서 벗어난 기괴한 운명적 삶으로 인식하는 우리 시대를 향해, <오래된 정원>은 그것이 더욱 깊어진 사람의 삶이라는 점을 분명히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때로 다른 연애소설보다 더 깊은 마음의 슬픔을 그릴 수 있음도 아울러 이야기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금지된 신의 문명 1 금지된 신의 문명 1
앤드류 콜린스 지음, 오정학 옮김 / 사람과사람 / 200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인류가 간직한 문명의 태고에 대한 기억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일까? 아마도 이것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은채 묻힐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는 이제 관심조차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만에 하나, 그것이 우리 인류의 기원을 풀 수 있는 열쇠가 된다면 인류의 생각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근대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사람들의 생각을 뒤바꿀 수 있다면 말이다. 도서출판 '사람과 사람'에서 발행된 <금지된 신의 문명>은 나에게 그레이엄 행콕의 「신의 지문」이후 오랜만에 초고대사를 향한 갈증을 씻어주었다.

치열한 조사작업과 과감한 추정, 정밀한 검증으로 무협지나 미스테리 파일같던 기존의 초고대사에 대한 저술방법을 순식간에 아카데믹 저널리즘으로 바꾸어놓은 행콕 이후로 앤드류 콜린스라는 이 이름을 우리는 기억해야할 필요가 있을 듯 싶다. 1957년생이니 이제 나이 마흔 다섯의 소장파 인류학자, 그의 다음 작업에 기대를 거는 내 마음이 너무 성급한 것일까? 두 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각각 8천7백원이다. 값으로 치면 꽤 비싼 책에 속하지만 방대한 사진자료와 재미난 서술로 치자면 돈이 별로 아깝지 않다. 특히 초고대사에 약간의 관심을 가지고 노아의 홍수나 메소포타미아의 고대문명, 구약 에덴동산의 실체를 궁금해하시는 분이라면 이 책은 그 값을 충분히 할 것이다.

각설하고 책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자. 간단한 정리로 마치려는 이유는, 시간과 내 능력 탓도 있겠지만, 내가 다이제스트한 글을 읽고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 선입견을 주기 싫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오는 여러 갈래의 종족이야기는 다이제스트 하기에도 쉽지 않고 다이제스트한 글을 통해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책 읽는 즐거움을 다이제스트로 뺏고싶지 않은 그런 책이다. 앤드류 콜린스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거인족, 즉 네피림에 주목한다. 하느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합하여 낳았다는 이 거인족, 현생인류와는 틀림없이 무언가 다른 모습이었던 이 이상한 종족의 탄생과 지속적인 출현에 주목하다보면 매우 공통적인 흐름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타락천사의 모습이거나 아니면 천사 그 자체, 때로는 아담과 이브를 유혹한 뱀의 모습, 사탄이나 악마, 성스러운 존재, 기괴한 거인 등등의 모습으로 각 종족의 고대설화와 문헌에 반영되어 있으며 그 공통적인 여러 특징을 조합해보면 깃털, 독수리와 관련되거나 뱀같은 얼굴, 큰 키 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저자는 이들을 '주시자', '타락천사'로 대표된 고대 종족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영적인 모습의 천사나 우리 마음 속의 악마가 아닌, 실재했던 어느 종족이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길고긴 여정을 통해 저자는 그들이 에덴동산이라고 여겨지는 소아시아 북부에서 살았던 고대종족이었으며, 이 종족의 아주 오래된 근원은 이집트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혹여 날개달린 천사를 생각하고 계시는가? 저자는 각종 문헌의 특징을 정리하여 '주시자'라고 불리우던 이 고대종족의 모습을 추정해본다. 특히 삽화가에게 의뢰해 재현한 '천사족'의 모습은 바로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이덕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책 제목이 주는 어떤 열망의 느낌을 그대로 담고있습니다. 어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책을 쓰는 이덕일씨의 작품이고, 그 내용이 알려지지 않은 한 독립운동가의 일생이며 그 독립운동가의 사상적 궤적이 남북한 정권의 주류가 아닌 아나키즘이기에 더욱 무게를 더해옵니다. 그러나 무게는 무게고 처음 페이지를 열면서 울컥일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사람의 삶이 너무 파란만장하고 비감하고...거기다 어쩌면 잊혀져버렸다는 것이 사람의 누선을 자극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나를 울컥이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 자체가 하나의 예술일 수 있다는 것,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일신의 영달이나 입신양명이 얼마나 예술적으로 아름다울지는 모르겠고, 거짓으로 덕칠한 자서전의 예술성을 도저히 가늠 못하겠으며 나라를 팔아먹고 적들에게 달라붙은 은혜를 입어 아직까지 호령하고 있는 모리배들이 한 세상을 판치는 지금, 그저 한 사람이 겪고간 그 세월 자체가 이 말도 안되는 세상을 간단히 뒤집어엎는 하나의 대하 역사드라마일 수 있을 때, 그것을 아름답다고 할 밖에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