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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리즈먼: 이단의 역사
그레이엄 핸콕.로버트 보발 지음, 오성환 옮김 / 까치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중동의 마니교와 옥시타니아의 카타리파 사이에 있는 밀접한 교의적 연관을 분석하는 장면에서 갑자기 눈이 번쩍 떴던 나는, 책의 마지막에서 미국에 지었다는 그 잘난 빛의 도시들에 대한 무시무시한 (911이라고 부르는)테러가 수 천년 전, 무슬림이 예루살렘의 템플십자군을 공격해 성전을 사수하던 그들을 내몰아낸 것과 맥을 같이 한다는, 그야말로 레토릭 수준에 가까운 결론에 이르면 짜증을 내며 책장을 넘기고 있다.
평면적으로 이 짜증의 원인을 서술하자면, 고대의 비의가 현대로 내려와 빛을 잃은 때문이겠다. 허나 이 두터운 책을 들고다니며 지하철과 화장실을 가리지 않고 읽어온 나에게 행콕과 보발의 전개와 추적과 결언은 허망함을 넘어서 내 밑바닥 정서에 깔린 식민지 원주민의 심기를 건드렸다.
카톨릭의 카타리파 대학살에 대고 분노한 인문주의자의 이름으로 그것이 하느님의 뜻인지를 물었던 행콕은, 카타리파와 헤르메스파와 르네상스주의자들과 템플기사단을 비롯한 각종 유사 이단들이 어떤 식으로 기독교와 섞이며 근대 유럽의 사상적 중추인 이성주의파 결사로 귀결되는지를 증명하느라, 또한 가치판단이 사라져버린 사건와 인물을 추적하며 이야기를 잇고 이어 그 계보를 입증하느라 어느 새 프리메이슨 브리태니커 편집인으로 변모하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깨닫지 못하고 감격에 차서 이스라엘의 건국을 프리메이슨의 영광으로 선언한다.
행콕과 보발의 시야에서 빛의 하느님은 사라지고 피라미드와 오벨리스크와 헬리오폴리스의 도시공학이 어떻게 파리와 런던과 워싱턴, 필라델피아에 구현되었는지를 지루하게 입증하는데 남은 힘을 다한다. 하긴, 이 잡학적 책이 처음 시작 때 말하려 했던 이단의 의미와 의의,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과 이념, 그리고 그 좌절은 어쩌면 이집트의 지혜가 유럽과 미국에 부활했다는 결말을 가정하였기에 찾을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보기에 정통과 이단은 분별없이 섞였고 이단은 이제 정통이 되어 다른 정통이었던 무슬림의 대반격을 맏이하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조지 W 부시가 프리메이슨 성경에 손을 얹고 대통령 선서를 했다는 뜬금없는 이야기에 이르면, 나는 나의 저술가 리스트에서 행콕을 지우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