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와 테레비 - 미디어시대의 고전읽기
데이비드 덴비 지음, 황건 옮김 / 한국경제신문 / 1998년 9월
평점 :
절판


<호메로스와 테레비>를 모두 읽은 기분은 무덤덤하다. 내가 읽지 않은 고전이 거의 대부분이었고, 나는 고전보다는 그런 평론을 통해 고전을 접하는 경우가 더 많았으니 그런가보다 그러고 말아버릴 수도 있는 문제다.

내가 본 것은 저자의 균형있는 시각이었다. 스스로를 문화적 좌파라고 칭하지만, 그는 좀처럼 경도되지 않는다. 그는 역사의식이 있다. 역사의식이란 바로, 현재의 나를 잊지 않으면서도 과거의 실제와 의미를 바르게 해석하는 능력이다.

물론 어디까지가 현재의 나고 어디까지가 과거의 실제이며 어디까지가 해석과 판단이 가능한 부분인지는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오늘 내가 인종차별을 증오한다고 해서, 인종은 당연히 차별적이라는 사상에 근거해 운영되었던 몽골제국을 우두두두 비난하는 것은 역사의식의 발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여성억압적인 과거의 체제에서 씌어진 글들이 여성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그 글을 폐기처분해야한다는 유아성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강간 때문에 섹스를 폐지해야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고방식에 매우 익숙하다. 흔히 그렇지 않은 척하지만, 공생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비판을 보면 별로 그렇지 않다. 상대를 죽여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그 스타일이 특별히 뛰어난 세련미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매우 유치하면서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대한민국의 파시스트 시대에 횡횡하던 매도와 압살은 그들의 반대자들이 도덕적으로 옳아봐야 생존을 보장하진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도록 만들었고, 극과극의 정쟁은 우리 사회 곳곳을 갈라서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극단적인 정치적 특징이 우리의 시각 곳곳에 머물러있다.

우리의 시각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공정하며 여유로울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편과 적을 가르고 위와 아래의 눈치를 찾아헤아리도록 훈련된 몰모트들이다. 우리는 세상을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얼마나 지혜롭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아마 우리는 땅위에서 일어나는 먼지마저, 하루를 사는 꽃 한송이마저, 저 푸른 하늘마저, 그것이 내 편인지 적인지를 갈라야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분류법의 효능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우리는 아직 살아남기 힘든 세상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호메로스와 테레비>에 대한 내 독서는, 가관이었다. 나는 내 대학시절을 떠올렸다. 4지선다형 문제에서 갓 풀려난 고등학교 4학년이었던 나는, 답을 주관식으로 쓰는 "신선한 체제"를 거부하고, 아예 문제를 폐하는 방식을 시도했다. 물론 그 만용에 대해 조교들은 훌륭하게 답해주었다.

나는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왜 다시 버렸던 책을 다시 들고 있는 것일까?

<호메로스와 테레비>를 읽고도, 나는 호머의 <일리아드>를 읽고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루소의 <사회계약론>도 마찬가지고 니체의 <선악의 계보>는 물론이며, 맑스의 <경제학 수고>도 읽고싶지 않다. 더더군다나, 울프는 왠 말이며, 브론테는 어인 일인가. 이 지경이니 당연히 어거스틴의 <고백록>과 단테의 <신곡>과 괴테의 <파우스트>는 앞으로도 읽을 일이 없을 것이다.

내가 읽은 것은 그들이 그들의 고전을 대하는 방법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훌륭한 독서법이다. 그들에게는 고전이 있다. 단순히 오래된 이유가 아닌, 그 엄청난 시간을 지금 이 자리까지 이어가는 문화와 전통의 힘을 그들은 쌓아가고 있다. 우리의 문화를 이토록 서글프게 단절시키고도, 그들은 정말 잘 먹고 잘 살고있다.

하긴 역사에 무슨 도덕과 윤리가 있겠는가. 한낱, 교조적 민족인 우리가 역사에 가진 환상일 뿐이다. 덕분에 우리는 여전히 세상에는 나쁜 나라와 좋은 나라가 있다고 믿는 바보나라로 남아있고, 그게 다가오는 도덕적 세기에는 세계의 지도국이 될 자격조건이라는 휘황찬란한 예언조차 기분좋게 들리는 이유이기도 하니, 대단한 교조주의 나라요 백성이다.

그러는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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