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이 만난 링컨
노무현 지음 / 학고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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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과 아이들이 쓴 <노무현이 만난 링컨>을 전철간에서 다 읽었다. 노무현이 이 글을 모두 썼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땜에 보좌관들의 수고가 더 컸으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어쨌거나 독서의 내용만으로도 좋았다.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링컨은 결코 이상적인 노예해방론자가 아니었으며 노예해방이 미국의 헌법정신과 일치한다는 신념을 가졌을 뿐이었고, 연방이 해체될 위기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노예제를 지지할 준비도 되어있었다는 것, 오로지 연방의 복원을 위해서 원칙과 타협을 구사하며 온갖 비난과 모욕을 감수했다는 것, 결과적으로 연방은 해체되지 않았으며 노예는 해방되었다는 것...

노무현이 관심을 가진 링컨은 이런 상투적인 링컨의 이미지 보다는 정치인으로서의 링컨이 신념을 어떻게 지키고 정치력을 어떻게 발휘했던가 하는 부분에 있을 것이다. 링컨은 결코 과단성 있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신념을 쉽게 꺽지 않았고 원칙을 포기한 적은 없으나 이상을 지향하지도 않았고 고집스럽게 비타협적이지도 않았다. 미국연방의 통합과 한국의 지역분열 극복이라는 정치대의도 노무현이 공감을 가지고 볼 수 있는 부분이라면 숱한 낙선과 패배또한 책을 읽는 사람이 연민을 가질 노무현과 링컨의 닮은 점일 것이다.

나는 노무현을 지지하는 소박한 심정으로 이 책을 샀지만, 의외로 링컨은 많은 의미를 우리 사회에 던지고 있음을 알게된다. 우리의 정치대의는 무엇인가? 조국독립? 남북통일? 조국근대화? 신자유주의? 민주주의 완성?

아메리카 애국주의를 유치하다고 폄하하지만 우리는 그 작은 것조차 없다. 내 생각에는 아마도 민주공화국이라는 그 이념이 현실적으로 느껴지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 것이다. 우리가 어렵사리 그것을 이 땅 위에 세운 것이 불과 십수년 전이다. 노무현의 정치대의는 그것을 온전하게 만드는 것이리라. 민주화를 완성하고 지역분열을 극복하는 것은 결코 다른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할 것은 링컨이 당대에 결코 훌륭한 대통령으로 평가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노예옹호론자와 노예해방론자에게 각각 공격을 받았고 전쟁반대자와 전쟁지지자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며 심지어 그가 속한 당 내부와 군 장성들로부터도 음해를 받았다.

정치인이 당대에 인기를 얻는 것은 참으로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은 특정집단으로부터 표를 얻는 것일 뿐, 대다수의 사람에게 좋은 평판을 받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링컨은 인기를 고민하는 평범한 정치인이었지만 그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대범함과 관용과 치밀함으로 정치인의 능력을 발휘해 결과적으로 역사가 인정하는 최고의 미국대통령이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라면 노무현이 만나야할 링컨은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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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대구, 대구 사람들
대구.경북역사연구회 지음 / 중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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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구사람이다. 대구에서 태어나 중학교 3학년때 서울로 왔다. 그래서 지금은 서울사람이다. 좀 쉽게 이야기하자면 나는 서울말을 하는 대구사람이다. 이게 아마 정확한 내 정체성일 것이다. 이 정체성은 어린 시절 나에게 상당한 시련을 안겼던 촌놈 컴플렉스의 원인이었고, 지금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노스탤지어의 뿌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대구의 역사를 전혀 몰랐다. 이 책은 나같은 대구사람들에게 대구가 그저 드라마 『태조 왕건』에 싸움터로 나오는데서 끝나는 도시가 아니라 어쩌면 필연, 어쩌면 우연으로 이루어진 한국에서 3번째로 큰 도시임을 알려준다.

어린 시절, 가끔씩 사생대회를 하던, 분수가 뿜어져나오는 조그만 공원(중앙공원)이 경상감영인줄을 어찌 알았겠으며, 최고의 번화가라는 동성로와 남성로가 대구성의 성벽이 있던 자리라는 사실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하여 이 책을 읽은 후 나는 분명히 달라졌다. 역사로 파악하는 내 고향은 그저 어린 시절을 의탁하던 의미없는 지역과 분명 다른 것이었다.

거기다 나의 본적지인 경산이 한 때 대구보다 더 큰 읍성이었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충격이다. 언제나 대구의 부속물처럼 여겨졌던 이곳이 한 때 대구를 관할하던 곳이었다는 사실은 앞으로 대구광역시의 확장방향이 어디일 것인지를 알려주는 힌트이기도 하다.

당신이 대구사람이 맞다면, 이 책을 꼭 한 번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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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과 김용옥 - 상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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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 강준만은 글과 말이 잘 구분되지 않는 사람이다. 글을 말하듯 쓰기로 유명한 사람이고 그래서 가끔 그의 글은 가볍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거기다 엄청난 다작으로도 유명하다. 이 책도 그 '다작' 중의 하나인 셈이다. 지난 잡지와 그 자신이 발행하는 인물과 사상에 발표했던 글과 새로쓴 글을 묶어낸 이 책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그의 단편적인 인물평이 이제 특정한 인물에 대해 한 권의 책이 될 정도로 오랫동안 진행되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첫 주제가 세간에 항상 화제를 몰고오는 이문열과 김용옥이라는 점이다. 그 의도가 무엇이었건, 이 책은 그가 썼던 『김대중 죽이기』나 『김영삼 이데올로기』 형식을 크게 벗어나고 있지는 않다. 이것이 지겨워해야할 일인지 아니면 그 일관성을 칭찬해주어야할 것인지는 책을 읽을 독자의 몫이다.

그런데 독자의 몫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강준만이 심심치 않게 주장하듯, 그는 많은 독자와 만나기 위해 많은 책을 쓴다. 또 같은 주제를 가지고 이 사람 저 사람을 평가한다. 만약 독자가 강준만이 추구하는 의도를 안다면 책을 사는 것은 '그를 돕고 행동에 동참하는' 지지선언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이 책은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예전에 읽었던 글에 새로 쓴 글을 몇 개 추가한 잡서에 불과할 수도 있다. 물론 강준만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는 '인물에 대한 집중적인 비평'이라는 한국에서 보기 힘든 아주 신선한 경험일 수 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이 책은 나에게는 정말 기이한 경험이다. 비록 철이 들고 쑥스러운 기억만으로 남았지만 스무 살을 전후하여 신처럼 떠받들었던 이문열과 아주 최근까지 존경과 흠모를 보냈던 김용옥을 당분간 내가 글을 쓰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칠 강준만의 해설로 들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세 사람은 내 인생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다. 오래되었거나 최근이라는 차이만 빼면 그 강도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 신기한 경험을 내가 어찌 마다하랴.

이 책이 주장하는 바를 한 마디로 설명하기는 좀 힘들다. 강준만은 이 책에서 '문화권력'과 '지식폭력'이라는 현상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매우 다양한 사례를 조합하는데 독자 입장에서는 그것이 생각처럼 일관되게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뚜렷하게 남는 것은, 이문열과 김용옥이라는 권위주의적 지식인의 문화권력에 대한 정당한 역할과 책임에 대한 추궁이다. 먹은 만큼 토해내고 누린 만큼 비판받으라는 아주 상식적인 요구인 셈인데, 한국사회에서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참 드물다. 그래서 강준만의 정말 시시한 주장이 그 소리를 듣는 사람에게는 '폭력'으로 느껴질 것이 틀림없다. 내 예상에 이문열과 김용옥은 틀림없이 강준만에게 '지적으로 폭행'당했다고 여길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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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와 테레비 - 미디어시대의 고전읽기
데이비드 덴비 지음, 황건 옮김 / 한국경제신문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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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호메로스와 테레비>를 모두 읽은 기분은 무덤덤하다. 내가 읽지 않은 고전이 거의 대부분이었고, 나는 고전보다는 그런 평론을 통해 고전을 접하는 경우가 더 많았으니 그런가보다 그러고 말아버릴 수도 있는 문제다.

내가 본 것은 저자의 균형있는 시각이었다. 스스로를 문화적 좌파라고 칭하지만, 그는 좀처럼 경도되지 않는다. 그는 역사의식이 있다. 역사의식이란 바로, 현재의 나를 잊지 않으면서도 과거의 실제와 의미를 바르게 해석하는 능력이다.

물론 어디까지가 현재의 나고 어디까지가 과거의 실제이며 어디까지가 해석과 판단이 가능한 부분인지는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오늘 내가 인종차별을 증오한다고 해서, 인종은 당연히 차별적이라는 사상에 근거해 운영되었던 몽골제국을 우두두두 비난하는 것은 역사의식의 발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여성억압적인 과거의 체제에서 씌어진 글들이 여성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그 글을 폐기처분해야한다는 유아성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강간 때문에 섹스를 폐지해야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고방식에 매우 익숙하다. 흔히 그렇지 않은 척하지만, 공생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비판을 보면 별로 그렇지 않다. 상대를 죽여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그 스타일이 특별히 뛰어난 세련미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매우 유치하면서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대한민국의 파시스트 시대에 횡횡하던 매도와 압살은 그들의 반대자들이 도덕적으로 옳아봐야 생존을 보장하진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도록 만들었고, 극과극의 정쟁은 우리 사회 곳곳을 갈라서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극단적인 정치적 특징이 우리의 시각 곳곳에 머물러있다.

우리의 시각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공정하며 여유로울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편과 적을 가르고 위와 아래의 눈치를 찾아헤아리도록 훈련된 몰모트들이다. 우리는 세상을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얼마나 지혜롭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아마 우리는 땅위에서 일어나는 먼지마저, 하루를 사는 꽃 한송이마저, 저 푸른 하늘마저, 그것이 내 편인지 적인지를 갈라야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분류법의 효능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우리는 아직 살아남기 힘든 세상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호메로스와 테레비>에 대한 내 독서는, 가관이었다. 나는 내 대학시절을 떠올렸다. 4지선다형 문제에서 갓 풀려난 고등학교 4학년이었던 나는, 답을 주관식으로 쓰는 "신선한 체제"를 거부하고, 아예 문제를 폐하는 방식을 시도했다. 물론 그 만용에 대해 조교들은 훌륭하게 답해주었다.

나는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왜 다시 버렸던 책을 다시 들고 있는 것일까?

<호메로스와 테레비>를 읽고도, 나는 호머의 <일리아드>를 읽고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루소의 <사회계약론>도 마찬가지고 니체의 <선악의 계보>는 물론이며, 맑스의 <경제학 수고>도 읽고싶지 않다. 더더군다나, 울프는 왠 말이며, 브론테는 어인 일인가. 이 지경이니 당연히 어거스틴의 <고백록>과 단테의 <신곡>과 괴테의 <파우스트>는 앞으로도 읽을 일이 없을 것이다.

내가 읽은 것은 그들이 그들의 고전을 대하는 방법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훌륭한 독서법이다. 그들에게는 고전이 있다. 단순히 오래된 이유가 아닌, 그 엄청난 시간을 지금 이 자리까지 이어가는 문화와 전통의 힘을 그들은 쌓아가고 있다. 우리의 문화를 이토록 서글프게 단절시키고도, 그들은 정말 잘 먹고 잘 살고있다.

하긴 역사에 무슨 도덕과 윤리가 있겠는가. 한낱, 교조적 민족인 우리가 역사에 가진 환상일 뿐이다. 덕분에 우리는 여전히 세상에는 나쁜 나라와 좋은 나라가 있다고 믿는 바보나라로 남아있고, 그게 다가오는 도덕적 세기에는 세계의 지도국이 될 자격조건이라는 휘황찬란한 예언조차 기분좋게 들리는 이유이기도 하니, 대단한 교조주의 나라요 백성이다.

그러는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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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정원 - 상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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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을 모두 읽었다. 햇살이 따거운 차창가로 '잘가요, 여보'라는 글이 내 눈 안으로 들어오고, 나는 순간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참았던 듯한 울음을 터트렸다. 내 스스로는 감잡기 힘든 깊은 슬픔으로 눈물줄기가 한참을 타고내려 나는 책을 덮고있어야했다.

하긴 내 눈물의 의미는 대부분 신파조의 것이리라. 내가 이 소설이 말하는 동시대인의 사회적 삶에 공감하면 얼마나 공감할 것이며, 허구라는 소설에 빠지면 얼마나 빠졌을 것인가. 그저 나는 감옥 안과 밖에서 서로 만나지 못한채 저렇게 한 인생을 살아버린 주인공들의 애닲은 사연에 목이 메었을 뿐이리라.

허나 순간순간 내 기억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들은, 내가 겪었던 80년대와 내가 겉돌며 지켜보았던 그 활동가들의 삶이 적어도 헛것을 보거나 나만의 공상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 삶은 치열했고, 하다못해 병정놀이 같은 일상의 연속이었다하더라도 그런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오늘 내가 누리는 이런 최소한의 자유가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그런 정언적인 확신을 느낀다면 그건 감정이 메말랐다는 증거일테고, 오히려 황석영의 서정성은 운동가들의 삶과 사랑도 바로 '사람의 그것'임을 느끼도록 한다. 역사 속에서 특별히 분리되어 '무슨 권'으로 설명해야할 필요가 없는, 사람의 삶이라는 이야기다.

아직도 이들의 행동을 일상에서 벗어난 기괴한 운명적 삶으로 인식하는 우리 시대를 향해, <오래된 정원>은 그것이 더욱 깊어진 사람의 삶이라는 점을 분명히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때로 다른 연애소설보다 더 깊은 마음의 슬픔을 그릴 수 있음도 아울러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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