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가르쳐 준 거짓말
제임스 W. 로웬 지음, 이현주 옮김 / 평민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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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선생님이 가르쳐준 거짓말>을 모두 읽었다. 미국 역사교과서의 역사왜곡을 뒤집는 사실의 선명성만을 본다면 이 책은 마치 촘스키의 글을 읽은 듯한 느낌을 준다. 아메리카 인디언이 백인을 습격한 것이 아니라 백인이 아메리카 인디언을 학살했다는 아주 고전적인 역사뒤집기에서 출발한 이야기들은 미국의 인종차별주의가 어떤 방식을 온존했으며 그것을 해결하고자 했던 진정한 영웅들을 어떤 방식으로 역사의 뒷편으로 묻어버렸는지를 말한다.

미국의 고전적인 '아버지'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채색되어 영웅화 되었는지를 밝히는 대목에 오면 갑자기 북한의 우상화 드라마가 떠오르기도 하고 민족자결주의의 영웅 우드로 윌슨이 의회의 반대를 무시하면서 러시아에 군대를 파견하고, 멕시코와 중미, 남미에 심심하지 않게 쳐들어가는 장면에 이르면 지구촌을 이끈다는 미국이 정말 초라해보인다.

그들의 역사는 짧지 않았으되 성조기 앞에 눈을 부릅뜨고 애국을 맹세하는 그들의 역사관은 진정으로 얕았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런 얄팍한 사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미국을 미국답게 만든 진정한 영웅들이 있었다는 것인데, 그들 대부분은 당대의 논점을 생략당한 박제로 남거나 간단한 에피소드로 남거나 삭제당한다. 어떤 경우에는 '미친 놈'으로 취급당하기까지 하는 걸 보면, 20세기 후반에서 현재에 이르는 미국의 역사가 어떤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부터 그들은 간헐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팍스아메리카나라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포장된 제국주의의 맹주였다. 잠깐동안 소련의 가냘픈 견제를 받은 것 외에는 한 번도 그 지위를 위협당한 적이 없는 독불장군의 위치에 있었다. 그들에게는 그에 맞는 역사가 필요했고, 그래서 그들의 역사는 '맹백하게 왜곡되어' 춘추필법으로 그들의 후손을 가르치는 '교과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바로 이런 '오만'이 제국을 무너뜨리는 출발이라고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저자는 바로 그점을 염려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아메리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미국의 학생들이 그 짧은 역사수업에서 역사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판에 박은 듯한 아름답고 숭고한 미국의 도전과 성취를 외우면서, 그들은 세상을 판단하는 지혜를 얻을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한탄한다.

그래서 월남전은 북한과 남한이 싸운 전쟁이라고 대답하는 다수의 학생들이 염려스러운 것이 아니라, 역사/사회 교과서가 하는 말을 더 이상 믿지 않으면서도 역사/사회를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 미국의 심각한 '우민화'가 어떤 재앙으로 다가올 것인가가 저자는 더 근심스러운 것이다.

더욱 불행한 것은, 우리가 그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전세계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면서 어느 놈이든 걸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삼류 조폭의 자세로 우뚝 서고있다. 그나마 미국의 역사에서 드물었던 60년대와 70년대가 거둔 미국의 반성을 조롱해버린 80년대와 90년대를 이제는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질서유지'에 필요하다면 파시즘이라도 하겠다고 선언해버렸다.('테러범에 대한 고문 운운')

아쉽지만 서평은 여기서 마치기로 하자. 더 이상 이야기하는 것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국정 교과서 달랑 한 권으로 온 국민이 같은 이야기를 읽고 같은 문제로 시험을 쳐서 사회적 등급을 정하는 나라에서, 그마저 수능시험에는 필수과목에서 제외된 나라에서, 그 교육을 그대로 받으며 살아온 내가 미국의 역사교육을 운운하는 것이, 뒷골이 당기는 일이라는 것은 안봐도 뻔한 일이다.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 눈의 티끌은 커보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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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속의 암호 - 신들의 귀환, 신의 3부작 2
에리히 폰 대니켄 지음, 이영희 옮김 / 삼진기획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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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첫째 단원은 놀랍게도 '소설'이다. 『성 베르리츠의 돌』이라는 짧은 글인데, 데니켄이 하고픈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소설이 은유하는 것이 바로 현대인류의 초고대에 대한 태도다. 대파멸 이후 어렵게 살아남은 종족들이 지식과 기술은 전수하는데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었는지 현대 인류는 상상하기 힘들 것이고, 그래서 전설과 신화로 흘러온 것들을 순진한 고대인들의 상상으로 넘겨버리지만, 알고보면 그것은 우리의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데니켄이 쓴 『미래의 수수께끼』로 그를 처음 만났던 때보다는 많은 초고대와 미스테리 관련 도서가 쏟아져나왔지만, 그래서 그의 글들이 이제는 좀 거칠다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는 선구자다. 불행하게도 이 방면에는 텍스트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데니켄의 책이 기본서라고 주장할 근거는 없지만, 그래도 이 분야를 연구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예의상 데니켄 한 권 정도는 읽어야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차라리 입문하는 사람에게는 길게 쓴 그레이엄 행콕의 책들 보다는 데니켄의 횡설수설이 더 재미있다. 그의 변명처럼 자신의 저서를 처음부터 읽지 않은 사람을 위해 했던 이야기들을 모두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듬성듬성 엮을 뿐이라고는 하지만, 맹성렬이나 김진영 형제와 비교해봐도 책을 엮는 기술과 정성이 모자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데니켄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노구를 이끌고 여전히 초고대의 정확한 진실을 찾아 헤메고 있다. 비록 이 학문은 결론이 나지 않을 것이어서 당대에 끝을 보기는 힘들겠지만...

그러나 생각해보라. 100년 전에 현대물리학은 '애들이 하는 잠꼬대' 취급을 받았고 신화학과 성경의 접목은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데니켄의 이야기들이 평가받는 날들이 오는 날, 그날은 우리 지구인류가 새로운 차원으로 개화하는 날이 틀림없다. 내 느낌으로는 별로 멀지 않았다...

데니켄은 이 책에서 성경에 나오는 여러가지 서술들을 근거로 인류가 과학물질문명을 보유한 외계인들과 접촉했다는 것을 재구성해간다. 종교적 편견을 가지지 않고 읽어가면 수긍이 가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우리의 과학기술문명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역사기록인 성서는 현재 천주교와 개신교의 경전이자 그 일부는 이슬람의 성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 속에 나오는 이런 이야기들을 데니켄처럼 분석하는 행위와 그 결론이 신앙인들에게 못마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찬찬히 생각해보라, 우리 인류가 하느님을 어느 수준으로 해석해낼 수 있을 것인지. 우리 인류는 현재 수준에서 하느님을 해석하고 믿을 뿐이다. 그리나 그것이 하느님의 모든 형상과 내용이라고 우격다짐할 수 있을까?

데니켄은 신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객관적인 사실로 볼 경우, 여기에 출현하는 사람(?) 또는 실체(?)들은 결코 우리가 신앙하는 신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류의 무지가 강력한 힘을 지닌 외계인을 신의 모습으로 떠받들었을 수 있다는 아주 당연한 가정을 하고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개미』라는 소설에서도 철없는 어린아이가 개미와 교통할 수 있는 언어제조기를 이용해 개미들의 신으로 군림하고, 개미들은 그 강력한 이름, '손가락 神'을 신앙한다. 어쩌면 그 모습과 그렇게 꼭같을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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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몰락
고든 G. 창 지음, 형선호 옮김, 전홍철 감수 / 뜨인돌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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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2억 시장 중국, 한류열풍, WTO 가입, 최근 신문방송에서 자주 듣는 이야기들이다. 90년 초에 중국과 수교할 당시만 해도 사태가 여기까지 진전되리라는, 그러니까 우리나라 가수들이 중국에 가서 공연을 하고 중국의 팬클럽이 환호성을 지르는 상태까지 진전되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중국은 비지니스맨들이 촉각을 기울이는 최대시장으로 부상했다. 앞다투어 중국말을 배우고 중국의 역사를 보고 중국시장을 공부하고 중국사람과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일들이 내 주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일이 되었다. 중국 가서 옷 사다 오퍼하는 친구, 중국사무소로 전화를 걸자 어색한 한국말로 전화를 받는 중국인 회사동료...저자의 책 제목처럼 중국이 몰락한다면, 지금 우리가 하는 짓은 모두 허사가 된다는 말일까?

결론은 꼭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다. 저자는 거대 중국이 자본주의로 편입된 이상, 기성 정치체제와 사회문화체제로 버티어나가기가 힘들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중국의 몰락은 구체적으로 공산주의/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중국공산당 체제의 몰락을 의미한다.

저자는 그 근거를 여러 곳에서 들고있다. 경직된 정치체제로 인한 낭비와 비효율, 부패와 실업, WTO가 줄 충격...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은 사실들은 겉으로만 중국을 알았던 나에게 상당히 충격이다. 과연 중국은 저자의 예언대로 분리되거나 몰락할 것인가?

나는 이 책에서 중국 몰락의 근거보다는 오히려 이미 과포장된 중국의 현실이 눈에 띈다. 12억중 몇 억이 절대빈곤에 시달리지 않는, 구매력이 있는 '시장'일까? 중국시장은 과연 매력있는 시장일까 아니면 그저 값싼 노동력이 득시걸대는 제3세계에 불;과한가? 무엇이 현실일까? 감을 잡지는 못하겠지만 중국은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와는 무언가 다른 혼란한 곳이라는 느낌이 든다. 아시아적 정체성을 표현하는...

예언과 현실을 들어보았으니 전망도 봐야겠지만, 필자는 이미 현실로 모든 예언을 마무리한다. 적어도 WTO에 가입한지 5년내로 다가올 중국의 변화는 어떤 모습일까? 정말 궁금하다. 80년대 초 한국에서 붐을 조성했던 소설 '단'의 주인공 권태훈 옹도 그런 예언을 했었다. 북부의 공산주의자들과 남부의 자본주의자들 사이에 분열이 생기고, 거대중국은 쪼개진다...

사족으로 이 책의 저자는 상당한 글솜씨가 있는 사람이라 책을 읽는 것이 별로 어렵지는 않다. 분량이 많다보니 반복되는 말이 없지는 않지만 중국을 알고픈 사람은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할 책이 아닌가 싶다. 나도 친구에게 이 책을 한 번 권해봐야겠다. 장사 잘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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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6-23 0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만들어진 고대 - 아시아연대총서 5
이성시 지음, 박경희 옮김 / 삼인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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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바른 지침을 줄 수 있는 좋은 책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렇다면 고대 만들어내기 경쟁을 어떻게 피해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라는 답이 나온다는 점에서 아쉬운 책이다. 문제는 해석과 상상력을 어디까지 허용해야할 것인가, 근거와 실증을 어디까지 요구해야할까 하는 것인데, 이 점에서 저자는 비교적 상식적이고 객관적인 모습을 보이기 위해 상당히 노력한다. 그렇다고 만들어진 고대의 본 모습을 밝히지는 않는다. 저자의 의도는 '그것이 그런 것이다'를 알려주는데 있으므로.

중국의 입장에서 발해는 변방의 지방정부였고, 한국의 입장에서 발해는 고구려의 진정한 계승자요 남북조시대의 북조였으며, 러시아의 입장에서 자국의 영역에 문화의 흔적을 남긴 다양한 고대 종족국가 중의 하나였을 뿐이라는, 다양한 시각에 대한 해석은 빛나지만 서태지의 노래 '발해를 위하여'를 알고있는 한국인에게 그리 즐거운 결론은 아니다. 저자의 입장에 동의한다 해도, 그러니까 현재의 민족국가 입장에서 고대를 재해석하는 것이 결국 각 국가의 입장에서 고대를 만들어내는 것임을 인정한다 해도 문제는 남는다. 과연 사실은 무엇인가? 고구려가 대한민국의 시조가 아니라 하더라도 과연 호태왕비의 진실은 무엇인가?

물론 저자는 이런 입장을 배제해야만 진실이 보인다는 참 당연한 입장에 서있지만, 근대 민족국가가 국가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역사를 개발해내기 이전에도 동아시아 각 민족간의 역사란 존재했다. 그것을 서구적인 민족국가의 개념으로 묶기 이전부터 왕조와 신민의 역사는 존재했으며 결국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그것을 계승하고 있다. 우리는 얼마간 그런 입장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저자의 독특한 정체성이 이 책을 저술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동아시아는 여전히 전근대냐 아니면 근대냐 하는 선택 밖에 없어보인다. 역사의 영역에서도 그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저자의 결론처럼 만들지 않으면 고대는 없어져버릴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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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식의 창조놀이
이차크 벤토프 지음, 이균형 옮김 / 정신세계사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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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식의 창조놀이 / A Brief Tour of Higher Consciousness>는 이차크 벤토프라는 공학자의 마지막 책이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우주심과 정신물리학>이라는 책을 읽어야한다. 그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이 책은 반쪽짜리 역할밖에는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만이 아닌, 이차크 벤토프를 아는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생각일 것이다. 그렇다고 절대로 읽을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서평이라는 이름으로 이차크 벤토프의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한심한 일은 없을 것이다. 허나 정보를 공유한다는 측면에서 이야기한다면, 그는 신비주의나 명상가들이 알쏭달쏭한 이야기로 전해주는 초월계, 정신계, 비물질계의 모습을 중학교3학년 정도면 이해할 수 있는 물리학과 수학으로 설명하는 참으로 기아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드물지 않지만, 이 사람은 꽤 오래전 사람이다. 이미 70년대 말에 세상을 떠난.

일찌기 <우주심과 정신물리학>을 번역한 류시화는 번역하는 내내 이차크 벤토프의 '의식'과 교통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책을 읽지 못한 사람에게 그 고백은 귀신을 만나는 스산한 상상이겠지만, 책을 읽고나면 본인 스스로도 이차크 벤토프를 만나고 온 일에 놀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참으로 당연하다. 우주의 지혜가 문자로만 이해되겠는가. 당연히 책을 쓴 사람의 영혼과 만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놀랐던 것은 이차크 벤토프가 니르바나, 즉 열반(涅槃)을 최고의 의식상태가 아니라 허공이 자신을 통과하도록 한, 진화의 한 단계에 불과한 상태라고 본 것이다. 열반을 지고의 경지로 알고있는 불교신자들은 받아들이기 힘든 입장이겠으나 서구적 배경에서는 그것을 지고의 경지로 받아들이기 힘든 측면이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봐야겠다.

열반과 같은 수준에 있는 것이긴 한데 허공이 자신을 그대로 통과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허공에 약간의 자기생각을 미치게 하는 것이 있다. 주로 한 행성계(지구같은)의 의식을 관장하는 높은 수준의 영혼들이 하는 일인데, 쉽게 이야기하면 행성수호신의 역할이다. 그는 이런 역할을 열반과 같은 수준으로 보고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소승과 대승을 그 나름대로 이해해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열반은 혼자만을 위해 하는 것이고 수호신 역할은 보살행이라는...

허공에 최고 위에 있는 절대자를 찾았더니 그게 바로 나였고, 순수의식계에 있는 나를 물질계의 내가 찾는 것이 바로 구도의 끝이라는 이야기의 흐름은 정말 재미있다. 정신계에 대한 과학적 서술은 신비주의보다는 더 읽기가 쉽다. 그러나 숭산스님의 말대로 김치를 환상적인 경험으로 설명하든 과학으로 설명하든 직접 먹어보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이차크 벤토프는 과학에 경도된 서양인들과 겉모습만 동양인인 오늘날의 우리에게 '쉬운 언어로 설명하는 명상과 초월계의 이야기 입문서'에 해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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