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역에 관하여

누구나 읽어야 할 면역에 대한 모든 것


#2 우리에게는 병균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병균이 필요하다. 병균에 노출되지 않으면 아이의 면역계가 기능 장애를 일으키기 쉽다는 걸 이제 우리는 잘 안다. 1989년, 면역학자 데이비드 스트라칸은 아이에게 손위 형제자매가 있는 것, 대가족과 함께 사는 것, 과도하게 위생적이지 않은 환경에서 사는 것이 천식과 알레르기를 발달시키지 않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제안했다. 이 <위생 가설>에 따르면, 지나치게 깨끗하고 지나치게 질병이 없는 상태란 게 가능하다는 말이다.


위생 가설이 지지를 얻자 과학자들은 어떤 특정한 아동기 질병이 알레르기를 예방하는지 찾아보았으나, 이런 사고방식은 그보다는 환경의 전체적인 세균 다양성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 밀려났다. 2004년에 미생물학자 그레이엄 룩은 <오래된 친구들> 가설을 제안하여, 건강한 면역계는 비교적 근래에 생겨난 질병들인 아동기 질병을 통해서 확보되는 게 아니라 인류가 수렵 채집인이었던 시절부터 함께했던 고대의 병원체들에 노출됨으로써 확보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오래된 친구들>에는 우리 피부, 폐, 코, 목, 장에서 살아가는 세균은 물론이고 기생충도 포함된다.



요즘도 위생 가설을 감염성 질병을 예방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 친구는 내게 <아직 정확히는 모른다지만, 홍역 같은 질병이 건강에 꼭 필요할지도 모른대>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메리카 대륙의 선주민들은 몇천 년 동안 홍역 없이 살았고, 비교적 최근에 대륙에 홍역이 도입되었을 때 그 결과는 처참했다. 그리고 설령 우리가 백신으로 홍역을 근절하더라도(이론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 밖에도 수많은 병균이 남아 있다. 바닷물 한 티스푼에만도 약 백만 가지 바이러스가 담겨 있다. 비록 우리가 필요한 만큼 충분히 많이 미생물과 접촉하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세균이 지구에 부족할 일은 절대로 없다.


사람의 백신 접종으로 말미암아 멸종한 바이러스가 딱 하나 있긴 하다. 마마 바이러스나 두창 바이러스라고도 불리는 천연두 바이러스다. 그러나 바이러스는 유전자 변이에 특별한 재주가 있기 때문에, 지금도 끊임없이 새로운 바이러스가 알아서 만들어지고 있다. 바이러스는 병원체의 여러 종류 중에서도 제일 골치 아픈 존재일 것이다. 바이러스는 정확히 무생물은 아니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살아 있다고도 할 수 없다. 바이러스는 먹지 않고, 자라지 않고, 일반적으로 다른 생물들이 사는 것처럼 살지 않는다. 바이러스가 번식하려면, 아니 그 밖에 무슨 일이라도 하려면, 일단 다른 살아 있는 세포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바이러스 그 자체는 작디작은 불활성 유전 물질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워낙 작아서 보통의 현미경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다른 세포로 들어간 바이러스는 그 세포의 몸을 활용해서 자신을 복제한다. 바이러스의 작동 방식은 종종 공장에 비유되는데, 그것은 바이러스가 세포로 들어가서 그 속의 장치들을 탈취함으로써 수많은 바이러스를 새로 생산해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게는 바이러스가 산업적인 존재라기보다 초자연적인 존재로 느껴진다. 바이러스는 좀비, 아니면 시체 도둑, 아니면 뱀파이어다.



간혹 바이러스가 생물체를 감염시켰을 때, 바이러스의 DNA가 그 생물체의 유전 부호의 일부가 되어 그 생물체의 후손에게 전달되는 경우가 있다. 인간의 유전체 중 꽤 놀랄 만큼 많은 양이 그처럼 옛 바이러스 감염이 남긴 부스러기들이다. 그런 유전 물질 중 일부는 우리가 아는 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다른 일부는 특정 조건에서 암을 일으키며, 또 다른 일부는 우리의 생존에 꼭 필요하다. 인간 태아를 감싸는 태반의 바깥 막을 형성하는 세포들은 옛날옛적에 바이러스에서 유래했던 유전자를 사용하여 서로 결합한다. 많은 바이러스는 우리가 없으면 번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도 바이러스에게서 얻었던 것 없이는 번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면역계 중에서도 장기 면역을 발달시키는 일을 담당하는 후천 면역계는 필수 기술 하나를 바이러스의 DNA에서 빌려 왔다고 한다. 일부 백혈구는 마치 난수 발생기처럼 유전 물질의 DNA 서열을 무작위로 뒤섞음으로써 무수한 종류의 병원체를 인식할 줄 아는 무수한 종류의 세포를 만들어 낸다. 그런데 그 기술은 우리 기술이기 이전에 바이러스의 기술이었다. 과학 저술가 칼 짐머가 말하듯이, 인간과 바이러스 사이에는 <내 편 네 편이 없다>.




_ 『면역에 관하여』 출간 전 연재 3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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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man 2016-11-14 1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재 감사합니당 재밌어요.

고귀한 수영이 2016-11-14 1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오늘날의 의학의 발달로 마치 모든 병원균과 병에 대해서 마치 정복을 한 것 처럼 생각과 착각을 하지만 사실은 양날의 검처럼 재앙으로 덮혀진 바는 없지 않아 있죠. 극단적인 결벽적 위생 붐으로 인해 면역력이 극단적으로 낮아져서 더욱 바이러스와 균에 노출이 되었다고도 하고, 어떤 병을 치유했다고 생각을 했더니 더욱 심각하고 완전 다른 바이러스를 양산을 하였다고도 하고, 세상과 주변의 공생하는 세균과 미생물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 해도 극단적인 파멸로 인한 재앙은 우리가 많이 생각을 해야할 숙제로 남은 듯 합니다.

샛별투 2016-11-14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내용은 ˝가슴이야기˝(플로렌스 윌리엄스,강석기,Mid,2014)와 연결이 되어 같이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원서와 한글판 모두에서 차용한 그림이 루벤스의 그림 ‘Thetis dipping the infant Achilles into the River Styx‘으로 아이가 일찍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아킬레스의 어머니 Thetis가 Styx강에 아이를 담가서 불멸의 신체를 주고자 하는 장면이라던데, 300쪽 넘는 양장본이니 표지에도 신경 많이 써주세요. ^^

고양이라디오 2016-11-15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s://twitter.com/hogook42/status/798422443278876672

좋네요~ 재밌네요ㅎ 연재 글을 읽어보니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시각으로 쓰인 책으로 보입니다. 세균과 바이러스는 우리의 적이자 오랜 친구이기도 합니다^^

비니루 2016-11-15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이러스와 인간의 기묘한 공생관계(?)가 흥미롭네요. 조금 어렵지만... 아직 흥미를 놓지 않고 있겠습니다.

성현주 2016-11-16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너무 깔끔한 환경에서 큰 아이들은 적당한 바이러스가 면역성을 만들어 주지 못해 오히려 면역이 낮아진다는 연구결과를 보게되었어요. 저는 어렸을 때 시골에서 자라서 어떻게 보면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뛰어놀았는데요. 그래서 그런지 잔병치레도 해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너무 위생적인 환경으로 인해 면역력이 낮아진다는 역설적인 시대가 도래했는데 바이러스와 인간의 공생관계 역사에 대해서 알고 면역력에 대해 접근한다면 더욱 흥미로울 것 같네요!

클로이 2016-11-16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내용이지만 약간 어려워서 도전정신이 생기네요😊 꾸준히 읽어봐야겠어요

ICE-9 2016-11-18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생 가설에 대한 정의에 대한 번역이 얼른 와 닿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깨끗하고 지나치게 질병이 없는 상태란 게 가능하다는 말이다.‘란 부분과 앞 부분에 대한 설명이 모순처럼 보이는데, 저만 그런 것일까요? 위생 가설은 지나치게 깨끗한 환경이 오히려 면역 질환을 일으킨다는 것을 뜻하는 것 같은데, 오히려 ‘가능‘이 아니라 ‘불가능‘으로 말해야 되지 않나 생각됩니다. ‘지나치게 깨끗하다고 해서 지나치게 질병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식이랄까요^^;

어쨌든 이 이야기는 흥미롭네요. 그렇지 않아도 1918년 있었던 지금도 악명 높은 스페인 독감에서 70%에 가까운 희생자가 20대와 30대 사이의 건강한 남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준 바 있었죠. 아무리 봐도 독감에서 가장 살아남을 것 같았던 이들이 오히려 더 많이 희생되었다는 것이 꽤 오래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는데 최근 그것이 바로 면역으로 인한 과민 반응 때문이었다는 게 밝혀졌다는군요. 이 독감 바이러스는 독특하게도 인간의 면역 시스템을 위험할 정도로 과열시키는 작용을 하는데 그래서 면역이 강한 젊은 사람들이 더 많이 희생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례만 봐도 지나친 면역이 때로는 위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현대인들은 면역이 만능이라는 환상을 여전히 품고 있지요. 율라 비스의 이 글은 그런 환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중대한 도전이 될 것 같네요. 특히 바이러스와의 공존 부분은 정말 흥미롭습니다.
앞으로의 이야기도 기대되네요^^


stillmyhero 2016-11-22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연재 끝나면 책 살 거에요!

Chloe 2016-11-24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전 물질 중 일부는 우리가 아는 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다른 일부는 특정 조건에서 암을 일으키며,
또 다른 일부는 우리의 생존에 꼭 필요하다는거에
다 아는건데도 현실적으로 참 무섭기에 남일같지
않음에 무서워요ㅠ

하루한쪽 2016-11-28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우리의 유전자 안에 옛 바이러스의 흔적이 남아있다니, 재밌네요. ˝인간과 바이러스 사이에는 <내 편 네 편이 없다>˝는 말이 모든 내용을 정리해줘서 정리가 깔끔하게 되고요 :)

https://www.facebook.com/hanabi.tschoe/posts/1869540729999291

carpe diem 2016-11-29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상들이 남긴 유산. 바로 면역.

james6133 2016-11-30 19: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제 출판됩니까? 빨리 보고 싶네요

열린책들 2016-12-02 11:20   좋아요 0 | URL
현재 서점에서 판매 중입니다. 기대하고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

shahote 2016-12-21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출판 버전의 번역도 지금과 비슷한가요?? 읽으면 읽을수록 번역이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