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오디세이 3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2004년 말 미학오디세이 전권을 구입했다. 2005년에 읽기 시작했고 6.15일엔 단국대학교에서 저자의 강의를 듣고 즉흥적으로 읽고 있던 미학오디세이2권의 앞면 간지에 사인을 받았다. '강우성님께 진중권'

2007.2.28
2월의 마지막. 2권까지 읽어 놓은 미.오 3권을 탐독했다. 미오 전권을 읽는데 2년여가 걸린 셈이다. 워낙에 텍스트를 느리게 읽기도 하지만 행간을 하나하나 지날 때마다 시를 읽듯이 곱씹고, 그림을 보느라 '촤라락' 페이지를 넘기기도 하고, 모두 설명하지 않고 의문으로 남겨둔 비교적 난해한 철학적 문제를 만나면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 허공 속에 하나하나 그려지던 텍스트와 생각들이다.

1.

"예술의 진리는 보지 못하더 것을 '보게 하는' 개시이며, 없었던 것을 '있게 하는 정초다"
이어서
"이렇게 일상적으로 우리에게 감추어진 것, 평소에 우리에게 망각된 것을, 예술 작품은 불현듯 우리 눈앞에 열어 보여준다. 이렇게 작품의 진리는 개시의 진리, 즉 은폐를 들춰내고, 망각을 일깨우는 탈은폐로서의 진리다."

책 속에서는 첫 번째 인용문이 두 번째 인용문보다 뒤에 있음에도 두 번째 인용문이 첫 번째 인용문의 내용을 상세히 말해주고 있다. 예술 작품과 더불어 언어에 있어 일상적으로 우리에게 감추어진 예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가끔 한 단어에 평소 이상으로 집중하고 호기심을 보일 때 그 단어가 굉장히 낯설어 지는 것을 느낀다. 가령, 내 경우에 언제 어디서나 쉽게 사용하는 미술, 미가 그렇다.
모임이 있어 가까운 친구들을 만나면 간간히 장소 불문하고 묻기도 한다. "미술이라는 단어가 뭐야? 그럼 미는 뭐야?" 그 순간 친구들도 미술과 미라는 단어가 낯설어지기 시작하나보다. 골똘히 생각하던 친구들은 대부분 사전적인 이야기 혹은 사전 밖의 이야기를 한다. 지금 당신이 손에 들고 있는 '책', 책이라는 단어. 그것이 책인가? 책은 언제부터 책인가? 책은 언제까지 책일까?

2.

"샤피로와 하이데거의 우주는 '근대적 미로'다. 이 미로는 선형적이다. 미로 안에서 바깥 출구로 이어지는 하나의 선이 존재한다. 샤피로는 합리적 시행착오를 통해서, 하이데거는 존재의 계시를 통해 출구를 발견한다. 그들의 해석은 문제 상황에서 해결에 이르는 선형적 구조를 갖고 있다. 반면 데리다의 우주는 '탈근대적 미로'다. 이 미로는 리좀이다. 그 안에는 하나의 길만 있는 게 아니라, 마치 나무뿌리의 조직처럼 서로 복잡하게 얽힌 수많은 길이 공존한다. 하지만 그 길들 중 어느 것도 우리를 출구로 인도하지는 않는다. 왜? 그것은 안과 밖, 시작과 끝이 없는 무한한 미로이기 때문이다."

인용문이 길다. 지루하다. 시작과 끝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이는 지루하고 어떤 이는 즐겁다. 다르다.
장 보드리야르도 '시뮬라시옹'에서 "어느 곳에 지시도 테두리도 없는 끝없는 순환 속에서 그 자체로 교환되어지는 시뮬라크르이다." 라고 했다.
정답이 없고 적합한 것이 적합해지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주입식이 아니라 자유로운 갈구를 추구하는 것이다.

3.

"과거의 조작은 사실을 날조하거나, 해석을 왜곡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오늘날의 조작은 그렇게 유치하지 않다. 더 중요한 조작은 편집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조작은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지 서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 같은 예는 대한민국의 신문에 그 예가 차고 넘친다. 각 신문마다 이해관계에 따라 편집이 달라지는 것이다. 물론 그 이해관계는 대한민국에서 대개 돈 때문이다. 보여주는 것과 보여주지 않는 것. 대한민국에서 신문만 읽고 판단하는 이들은 대개 이해관계에 따라 편집된 조작 프로그램의 캐릭터다. 한 가지더 근래 TV를 보면 늦은 저녁 시간에 토론 프로그램을 볼 수 있다. 보통 그들의 대화는 많은 사람들이 보고 듣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서로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보면 그들은 자신의 입장에 따라 말해야할 것과 말하면 안되는 것을 가려서 말한다.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행동한다.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개 지키고 싶고 더 늘리고 싶은 이들이 그런다.


4.

"우리의 문제는 이것이다. 실재와 가상을 가르는 기준 역시 가상이며, 현실과 허구를 나누는 기준마저 허구일 수 있다는 것, 도대체 무엇이 실재이며 무엇이 가상인가? 대체 어디까지 현실이며 어디부터 가상인가? 그런 의미에서 사라지는 것은 예술만이 아니다."

적절한 예를 소개한다.
"근원이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존재하여야 한다. 다음 그 근원으로부터 유래한 두 번째가 있다. 그 다음 세 번째....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에서 과연 첫 번째라는 서열이 어떻게 해서 주어지게 되는가? 첫 번째는 두 번째가 있기 때문에 첫 번째가 된다. 즉 두 번째 없는 첫 번째는 있을 수가 없으며, 첫 번째로 존재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첫 번째는 첫 번째가 되기 위하여 두 번째를 미리 상정하여야만 한다. 따라서 첫 번째는 두 번째 이후에 첫 번째가 된다. 결국 첫 번째는 두 번째 이후에 존재하게 되므로 세 번째가 된다. 이와 같이 하게 되면 순서나 질서의 의미는 완전한 허구임이 드러나고...."

데리다의 우주를 보았다. 무한한 미로. 순환의 미로.
모두 다르면 모두 같다. 모던은 포스트 모던을 안고 태어났다. 포스트 모던은?

 

참고서적

진중권, 미학오디세이1,2,3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손석춘, 신문 읽기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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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고맙다 - 내게 주는 선물... 33가지
다사카 히로시 지음, 김윤희 옮김 / 세계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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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파울로 코엘료의 장편소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의 한 구절이 있다.
"외부로부터 어떠한 위협도 침투해 들어올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를 세우려 하는 사람들은 외부 세계-모르는 사람, 낯선 장소, 새로운 경험-에 대한 방어에만 지나치게 치중한 나머지 정작 내부 세계는 방치해둔다."
흔히 하는 말로 마음을 열 때, 이 책은 익숙하지만 유익한 시간과 경험, 또 다른 경험으로 다가온다. 주입식을 견뎌야 하지만 그것만 견대낸다면 문제 없을 것이다. 이 책의 말미에 인상적인 구절이 있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주파수를 맞추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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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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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5. 지금으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10대 중반, 중학생 때 속셈학원에서 내 주된 관심사는 자살이었다. 관심은 호기심으로 호기심은 으레 질문으로 변화한다.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죽고 싶어요. 자살하고 싶어요." 속셈학원 선생들-지금 생각해보니 물리선생과 수학선생에게 질문을 했던 것 같다-은 퉁명스러운 얼굴로 나무라기도 했던 것 같다.-진지한 대답이 기억나지 않는다. 자살하고 싶다는 다소 악취미처럼 보이는 내 호기심은 흔히 뉴스에서 보는 학업성적에 비관하거나 따돌림이 두려워 한 자살과는 달랐던 것 같다. 어디까지나 지금 생각해보건데 인생이 너무 무료하다는 생각이 그 어린 나이에 들었더 것 같다. 학교, 집, 오락실, 학원, 오락실, 집. 같은 일상과 항상 마주하는 얼굴들이 지겨웠던 것 같다. 25. 나는 지금도 그때처럼 뭐든 한가지에 충실하지 못한다.
어떤 이의 말처럼 주역의 요는 '지루하면 변해야하고 변하면 지루하지 않고 변하는 것은 영원하다'고 한다. 그래서 세상에 모든 것이 변한다는 말을 제외하고는 모두 변하나보다.
그 때는 우물 안 개구리여서 변화를 몰랐다. 대학에 들어가 생활하면서 더 넓은 세상과 더 많은 사람을 보게됐고 군대 생활을 통해 그것이 다듬어져 갔으며 그 경험으로 다시 사회를 항상 변화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그래도 정말 사람 질리게하는 일들 투성이지만 그것들은 극히 작은 일들이다.

"외부로부터 어떠한 위협도 침투해 들어올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를 세우려 하는 사람들은 외부 세계-모르는 사람, 낯선 장소, 새로운 경험-에 대한 방어에만 지나치게 치중한 나머지 정작 내부 세계는 방치해둔다."

"스트레스는 대부분 자기 문제를 과대평가 하는 데서 발생한다." - 마이클 르뵈프

[베로니카...]의 한 구절, 마이클 르뵈프의 말처럼 그것들은 삶이라는 변화의 소용돌이, 우주에 비하면 티끌이다. 견뎌낼 수 있는 지금 이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고 있다면 아주 작은 일에 불과하다.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끔찍한 일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마치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를 돕고 싶다는 듯 아주 근심스런 표정을 짓지만. 실제로는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그들 자신은 그나마 행복하다고, 삶이 그래도 그들에게는 관대했다고 믿으며 즐거워한다."

사람들이 비열해보이고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위의 베로니카가 그렇다.

"미쳤다는 게 도대체 뭐죠?"
"미친 사람이란 자기 세계 속에서 사는 사람이야."

하지만 베로니카는 그런 불쾌함도 삶의 티끌에 지나지 않다는 깨달음을 얻기에 아직 어렸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몇 편을 보았고 그 안엔 사랑과 자유라는 공통점이 존재했다. 베로니카가 자신 안에서 자유와 사랑을 찾고 열정적일 수 있는 삶의 의미를 찾은 것처럼 각자 나름의 자유와 사랑이 존재한다고 파울로 코엘료는 말하고 싶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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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 유쾌한 미학자 진중권의 7가지 상상력 프로젝트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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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명쾌한 문체

연속되는 몽타주처럼 저자의 '텍스트 몽타주'가 매력적이다. 저자는 텍스는 직물짜기를 이야기했다. 직물짜기와 몽타주는 많이 닮았다. 씨줄과 날줄의 교차, 시간과 공간의 편집. "...두 개의 장은 십자로 교차한다." 발견했다. 십자. 새로운 상상력. 직물짜기와 몽타주.


저자의 전공과 독일유학

미학자인 저자는 미에 관한 모든 것을 글쓰기의 소재로 삼기에 비교적 제한 없는 글쓰기가 가능하다. 시각을 비롯해 모든 감각의 글쓰기가 대상이고 문자, 그림, 조각, 설치예술 등 모든 장르의 글쓰기가 가능하다. 더불어 이 책은 그 이점을 살려 다양한 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이 왜곡의 진리-아나몰포시스였다. 저자가 책의 뒷부분에서 언급하지만 자연스럽게 독자가 책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마치 책이 장난감인 듯 관찰하고 즐기게 한 저자의 노력이 돋보일 뿐 아니라 많은 영감을 안겨준다. 문자에 관심이 많은 나는 독일 유학 중에 보았다는 한국 유학생의 요한계시록 왜상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책 속의 본문 디자인에 문제가 있어 불편함을 느꼈다. 번호가 언급된 그림이 두 세장을 넘겨야 있는가 하면 번호와 문자의 분별력이 비교적 떨어져 그냥 지나치기도 한다. 다시 번호를 찾고 그림을 찾아가려면 눈이 피로해 잠시 쉬고 싶어진다. 아무래도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디자이너의 역량 부족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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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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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구술문화의 감정적인 비관주의와 상상력을 가진 한국인이다.

보통 진보적인 저자의 진보적인(?) 책을 탐독하고 있자면 개그콘서트를 보고 터뜨리는 폭소와는
다른 개념의 웃음이 터져나오기도하고 정신적인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 이유인 즉, 진보적인 책들은 항상 현상에 의문을 갖고 조목조목 따져보기 때문이다.
어려운 말로 빙빙 돌렸다가 다시 제자리로 옮겨 놓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정곡을 찌르기 때문이다.

지금은 조금 잔잔해졌지만 김규항님의 를 읽을 당시만해도 피 끓는 젊음을 느끼며 분개하고
항상 "이 놈의 세상, 정말 그지 같아서, 확 뒤집어 엎어야지 원" 비관적으로 지껄였다.
이 책에서 저자 진중권님이 언급한대로 나는 구술문화의 감정적인 한국인이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무조건적으로 감성이 비관적으로 치달아 현상을 파악하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황우석 논문이 조작임을 모두가 알았을 즈음, 학교 수업을 마치고 세종문화회관에 내려
5호선 광화문역으로 걷고 있는데 정면의 조선일보 건물에 박힌 대형TV에서
'미국, 줄기세포 신기술 개발'이란 문구가 한 눈에 들어왔다.
상상력이 발동했다. "혹시 미국의 공작으로 황우석 교수의 기술을 미국에 빼앗긴 것은 아닐까"
사건의 진실 여부는 이미 내 관심 밖에 있었고 오로지 "역시 미국 더러운 새끼들"이라고 비관했다.
그리고 이 상상력을 여러 사람들에게 진실인 것처럼 다른 이들에게 말하고 다녔다. 구술문화의 최전선이다.

지금은 사실과 관계 없는 상상을 하지 않으려고 하고
내 상상력을 다른 이들에게 함부로 지껄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비관주의에서 벗어나 현상에 대한 끈임없는 의문을 통해 삼천포에서 상상하지 않으려 한다.

-

내 신체는 정보적인 신체에 조금 더 가까운 산업적인 신체다.

"압축 성장으로 한국인의 몸속에는 전근대와 근대와 탈근대의 세 지층이 압착되었다.
물론 세대마다 이 세 층위가 배합되는 비율은 달라, 가령 노년층은 농경적 신체, 장년층은 산업적 신체
신세대는 정보적 신체가 우세하게 나타날 게다."
내 신체는 산업적 신체와 정보적 신체 중간에서 정보적 신체에 조금 더 가까운 신체가 아닌가 싶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며 내 신체를 정보적 신체로 개조-이 책의 표현에 따르자면-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가끔 아니 자주 정보적 신체로 변해가는 내 몸이 산업적 신체의 내 몸과 불화를 빚어
정보적 신체의 훈련을 대표하는 조교인 컴퓨터 앞에 앉아 오래 작업하는 것이
신체 노동하는 것보다 괴로울 때가 있다.
디자이너들은 신체 노동 못지 않게 '디지털 노가다'도 힘들다는 말을 자주 한다.

-

새로운 상상력과 필요한 것들의 재배치가 필요하다.

"오늘의 고통을 제거하고 미래를 준비하려면 한국인의 몸을 이루는
세 가지 역사적 층위가 최적의 배합을 이루도록 배치해야 한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존재의 미학, 즉 요소들을 선택하는 테크네(techne)와
그것들을 배치하는 매트릭(matrik)이다."
과거의 파시즘을 제거하고 지금의 천민자본주의를 제거해야한다.
가끔 물건을 다루거나 컴퓨터를 다룰 때 직감적으로 '아, 이거 아닌데'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땐 반드시 문제가 발생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업한 시간보다 긴 시간이 필요할 때가 있다.
지금의 한국이 그렇다. 뭔가 부자연스럽고 불안하다. 새로운 상상력과 필요한 것들의 재배치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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