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 김열규 교수의 열정적 책 읽기
김열규 지음 / 비아북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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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보기만 하던 눈이 마침내 읽게도 되었다. ‘보기’만 하는 눈과 ‘읽기’하는 눈, 그건 사뭇 다른 것이었다.…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을 때 비로소 보기는 읽기가 된다. 이렇게 읽기는 그 대상이 무엇이든 ‘그 내면을 보는 것’이다. ‘해석’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46쪽

요즘 유행하는 기호론의 용어를 빌리면 주어진 텍스트(작품)의 의미를 읽을 때 그 텍스트와 관련된 외적 상황이나 외적 조건들, 이를 테면 작가의 경향이나 사상, 해당 텍스트의 시대 배경 등등이 고려되어야 하는데, 이를 ‘콘텍스트context’라고 부른다. -134쪽

읽다 보면 이 지경이다. 지겹고 고깝고 넌더리가 난다. 독자라면 누구나 읽을까 말까, 마음을 잡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책 읽는 사람은 이 때문에 작품에서 눈을 떼서는 안 된다. 느긋하고 차분하게 소설을 따라가야 한다. 요컨대, 하품을 토하듯이, 아니면 산책이나 하듯이 유유자적 해야 한다. -213쪽

재미가 먼저다. 신명이 앞서야 한다. 교양이니 지식이니 하는 그 고상한 소득은 나중 문제이다. 흥청거리는 게 독서의 제일보이다. -2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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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김열규 교수의 열정적 책 읽기
김열규 지음 / 비아북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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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앎 없이 삶은 없다. 앎이 삶이고 삶이 곧 앎이다. 그러니 내게 읽기 없는 삶 또한 있을 수 없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읽음이 앎이다. 앎은 삶이다. 그렇다면 읽기가 삶이고 삶이 읽기이다. 이건 자명한 일이다.  
   


이 책에서 저자 김열규의 ‘읽기’에 대한 심적 속성을 열정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은 어딘가 부족하다. 이건 읽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을 것만 같아 생사를 걸고 읽는 사생결단의 읽기다. 좀 과장해서 말했지만 저자의 읽기에 대한 ‘열망’을 보면 이런 과장도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엔 저자의 자전적 읽기에 대한 수사가 너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70세 이상 나이를 먹은 노인이 지난 날을 돌아보며 썼기 때문에 자신의 ‘읽기’의 과정을 미화한 것 같이 느껴졌다는 말이다. 아직도 그런 의문은 지워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차분히 책을 읽었을 때 느껴지는 김열규의 책과 읽기에 대한 ‘열망’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책에 대한 사랑’이라든가 ‘앎과 지식에 대한 열정’ 같은 지루한 수사들이 많아 온 몸에 닭살이 돋기도 했지만 그것도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우리는 글이나 책만 읽는 게 아니다.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그리고 만지는 것, 이 모두를 읽는다. 오늘날 기호론은 그걸 가르쳐주었다. 세계, 우주, 하늘, 파도, 그 모두를 읽는 것은 사람이다.  
   


김열규의 ‘읽기’에 대한 ‘열망’은 영화 <고고 70>의 젊음과 닮았다. 시대와 권력의 억압을 무시하고 지하 클럽 ‘닐바나’에서 “열반”에 도달하는 그 젊음들. 온 몸이 군부독재의 매질로 상처투성이지만 “니네 놀고 싶지?”란 한 마디로 음악과 춤을 열망하는 젊음과 인생 자체를 ‘읽기’로 일관해 온 김열규의 열망은 그 방식과 정도를 빼면 같다고 할 수 있다.

   
  재미가 먼저다. 신명이 앞서야 한다. 교양이니 지식이니 하는 그 고상한 소득은 나중 문제이다. 흥청거리는 게 독서의 제일보이다.  
   


김열규의 읽기는 ‘재미’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그의 읽기는 선∙악, 좌∙우 같은 특정 이데올로기에 구애 받지 않는다.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읽”고 생각한다. 왕성한 지적 호기심이다. 김열규의 읽기는 그런 의미에서 편협함을 이겨낸 균형적 읽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균형적 읽기로 김열규는 자신만의 ‘마지막 어휘’를 창조해 냈다. 책을 쓴 작가나 책을 평가하는 평론가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의 언어가 아닌 자신만의 언어로 책의 텍스트를 창조해 낸 것이다. 정확한 과정은 알 수 없지만 책 속에서 김열규 자신이 언급하는 것으로 볼 때 책 속에 인용되어 있는 시나 소설은 거의 다 김열규의 기억에 의한 것이다. 출처도 정확하지 않고 원문과 비교해 같은 문장들인지 따지지 않는다. 읽기를 통해 텍스트를 자신의 언어로 만들고 그것을 음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만의 ‘마지막 어휘’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행간과 행간 사이에 나만의 ‘읽기’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내 읽기의 시작 그리고 앞으로의 읽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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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 - 우연적 삶에 관한 문학과 철학의 대화
이유선 지음 / 라티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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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연대성에 대한 욕구와 사적인 진리에 대한 소망을 병렬적으로 추구하는 아이러니스트를 자처한다면….-12쪽

친구의 성공스토리를 듣는 것이 늘 즐거운 일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엄청난 스트레스다. 친구의 성공을 통해서 어쩔 수 없이 내 자신의 실패를 되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친구가 평소에 인생살이의 어려움을 함께 토로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친구라면 스트레스는 더 심해진다. 그리고 그 친구의 성공이 더 빛나는 것일수록 스트레스는 더 심해진다. -38쪽

일만 빨리 하는 것이 아니라 여가까지도 우리는 빨리 끝내게 되었다.-93쪽

광장과 밀실의 문제는 여전히 주요한 사회철학적 문제이다. 로티의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면 광장은 공적인 연대성의 영역이고, 밀실은 사적인 자율성의 공간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이 두 영역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거나 통합하려는 시도를 해 왔다. 최인훈의 광장과 밀실에 대한 언급은 철학자들의 그런 시도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해 준다. 니체, 하이데거, 푸코 같이 사적인 자율성의 소망을 가진 철학자들이 인간의 연대성에 대한 욕구를 폄하하거나, 자유로운 공통체를 꿈꾸는 듀이, 하버마스 같은 철학자들이 사적인 완전성에 대한 소망을 ‘심미주의’로 치부하는 것은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 쪽에 가두어" 버리는 것이다.-129~130쪽

아이러니스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지막 어휘가 다른 사람에게서 가지고 온 것이 아닌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라는 확신이다. 아이러니스트의 자신의 용어로 자신의 삶을 요약할 수 있기를 원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일차적으로는 아이러니스트 자신의 사적인 완성과 관련이 있다. 자신의 인생이 자신을 넘어선 어떤 것에 의해서 좌우되거나 자신보다 큰 힘에 동화되는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기 삶의 우연성을 긍정하는 것, 곧 삶의 자율성을 획득하는 것이야말로 아이러니스트의 관심사이다. -131~132쪽

합리적인 이성과 충동적인 감성, 도덕적 품위와 일탈의 순수함, 정신적인 삶의 고결함과 육체적인 쾌락의 천박함은 음악의 리듬처럼 분리되지 않은 채 흘러가면서 삶의 본질을 개시하는 것이 아닐까?-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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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 - 우연적 삶에 관한 문학과 철학의 대화
이유선 지음 / 라티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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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인기가 없고 더불어 철학 책을 읽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은 자본주의 시대의 물신숭배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삶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루어야 할 철학이 삶의 이상만을 다루었기 때문일 것이다(게다가 고도의 추상적 언어를 사용하는 철학자들의 언어를 읽어내는 것도 만만치 않다). 물론 철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기에 현실에서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는 진리를 보기 위해 저 멀리 존재할 지도 모르는 이상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필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철학이 계속 이상만을 고집하고 혼자 부르짖는다면 철학은 더욱 괄시 받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철학이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긴 되는 것일까?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철학은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다. 철학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문제로 겪는 고통과 세상살이의 고단함과 각박함에 대해 이해하고 왜 그런 고단함과 각박함이 삶을 짓누르는 지 고찰해 보며 발상을 전환시키는 일종의 상상의 낙원으로서의 역학을 하는 것이다. 간혹 철학자들 자신이 “철학이 일반인들에게 점쟁이만큼의 역학도 하지 못한다면 철학이라는 학문은 없어져야 한다”는 자조 섞인 말을 하는데 이런 말을 통해 현재 철학이라는 학문이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들에 대해 엘리트주의적이고 추상적이기만 한지 여실히 알 수 있다.

이유선의 책 이 책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은 철학이 마냥 거대담론과 이상(理想)만을 말할 것이 아니라 사적이고 현실적인 것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철학은 삶의 구체적인 문제에서 발생하는 궁극적인 물음에 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편성, 합리성, 객관성에 집착하기보다는 삶의 우연성, 구체성, 유한성을 기꺼이 감수하고 거기서 나름대로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유선은 “삶의 구체적인 문제”와 다양한 질곡을 문학에서 찾는다. 그리고 이런 문학 작품에 대해서 철학을 통해 자기 “마음대로” 해석한다. 그런데 이유선 식 “철학과 문학의 대화”, 즉 철학으로 문학 해석하기는 절묘함이 있다. 별로 연관성이 없을 것 같은 철학 텍스트와 문학 텍스트가 엮여 어떤 지점에서 접점을 찾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철학의 본질에 가장 가깝게 접근한 철학 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예를 들어 존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이 책에서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엮여 삶의 특정한 질곡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 그 의미를 갖고 있는데, 존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이 책에서 언급되는 다른 문학 작품인 《눈먼 자들의 도시》, 《우상의 눈물》, 《콧수염》등과 같은 작품과 엮여도 접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에 있어서 강약의 차이를 보이겠지만 분명 이런 추론이 비약은 아니다.

그럼 철학과 문학의 접점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유선은 이런 철학 텍스트와 문학 텍스트의 접점을 통해 삶을 이해하고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의 삶을 확신하고 요약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러니스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지막 어휘가 다른 사람에게서 가지고 온 것이 아닌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라는 확신이다. 아이러니스트의 자신의 용어로 자신의 삶을 요약할 수 있기를 원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일차적으로는 아이러니스트 자신의 사적인 완성과 관련이 있다. 자신의 인생이 자신을 넘어선 어떤 것에 의해서 좌우되거나 자신보다 큰 힘에 동화되는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기 삶의 우연성을 긍정하는 것, 곧 삶의 자율성을 획득하는 것이야말로 아이러니스트의 관심사이다.”

이유선이 최인훈의 《광장》을 해석할 때 이유선이 말하는 아이러니스트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광장”은 연대와 공동체의 상징이고, “밀실”은 사적인 개인의 상징이다. 광장과 밀실을 둘 다 간직하는 것은 그 속성상 서로 배척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아이러니를 안고 있는 사람을 아이러니스트라고 부른다. 아이러니스트는 사회 속에 살면서 자신만의 개인성을 가져야 하며 사회 전체는 이런 아이러니스트의 개인성을 인정(認定)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광장이나 밀실, 이거 아니면 저거를 선택해 ‘결사항전’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아닌 그 둘을 모두 안고 있는 우연적이고 유한한 아이러니의 세계임을 인정하고 받아 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감성을 지닌 철학, 이성을 사용하는 문학”으로 “삶의 우연성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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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어 사전
남경태 지음 / 들녘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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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컨대 이 책은 남경태 자신이 읽은 책들의 핵심 개념 혹은 개인적으로 처음 접하거나 흥미 있는 개념들을 따로 노트정리 한 원고를 가지고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최초 남경태의 손에 원고로 존재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리고 개념들을 역사적, 철학적 맥락과 함께 정리하고 자신의 “주장”을 덧붙여 만든 원고이기 때문에 개념어에 대한 해석 중엔 적잖이 뉴스 매체에서 칼럼을 읽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개념어들은 남경태 개인의 관심영역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주로 인문학 용어들이 등장한다. “과학이나 시사로 분류될 만한 개념어들도 일부 있으나 그것들도 주로 인문학의 관점에서 다루었다”. 인문학 용어들은 하나의 개념에 여러 가지 속성들이 요약되어 있기 때문에 그 개념의 역사적, 철학적 맥락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이 그 개념을 이해하는 데 주요하다(이 문장에서는 ‘이미지’라는 용어의 ‘정확한’ 개념이 궁금할 것이다.). ‘유토피아’처럼 어원을 들어 한 문장으로 설명 가능한 개념어도 있지만, 예컨대 ‘프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개념어의 경우 이 개념어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역사적, 철학적인 맥락의 복합적인 의미와 연관성을 내포하고 있다. 남경태는 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맥락을 탁월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맥락을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이 《개념어 사전》의 한계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런 한계는 시대의 혹은 남경태 자신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정확한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없다면 개념어들은 갈수록 모호해지는 것 아닌가.

 

그런 모호함은 차치하고 이 책은 두 가지 유용한 관점에서 읽을 수 있다. 하나는 참고 서적, 다른 하나는 상식 서적이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읽을 때 ‘리비도’, ‘욕망’, ‘이드’와 같은 개념어들이 등장하면 한 번쯤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라는 것이 참고 서적의 관점이다. 상식 서적의 관점은 간단하다. 상식을 키우거나 상식의 오류를 수정하는 것이다. 증산교의 창시자가 강일순이라거나 좌익/우익이라는 개념이 프랑스 혁명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 파시즘이라는 개념어가 고대 로마의 개선식에서 사용하던 권력의 상징물인 파스케스에서 비롯됐다는 것같이 알아두면 삶을 살아가거나 다른 책들을 읽을 때 유용한 상식들을 키울 수 있다.

일상생활을 살다 보면 그 어원과 정확한 의미를 모르면서 사용하는 용어들이 많다. 그런 용어들을 사용할 땐 어딘가 찜찜하고 뒤가 개운치 않다. 이 책을 읽으면 그런 무지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다(물론 굳이 그런 무지에서 자유로울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기억력이 좋다면 (결코 가벼운 내용의 책은 아니지만) 친구들과의 대화 중에 잘난 척을 할 수도 있고, 좋아하는 이성과의 데이트에서 과용하지 않는다면 지적으로 보여 좋아하는 이성에게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 실용서의 역할도 하는 책이 《개념어 사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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