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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 - 우연적 삶에 관한 문학과 철학의 대화
이유선 지음 / 라티오 / 2008년 10월
평점 :
철학이 인기가 없고 더불어 철학 책을 읽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은 자본주의 시대의 물신숭배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삶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루어야 할 철학이 삶의 이상만을 다루었기 때문일 것이다(게다가 고도의 추상적 언어를 사용하는 철학자들의 언어를 읽어내는 것도 만만치 않다). 물론 철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기에 현실에서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는 진리를 보기 위해 저 멀리 존재할 지도 모르는 이상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필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철학이 계속 이상만을 고집하고 혼자 부르짖는다면 철학은 더욱 괄시 받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철학이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긴 되는 것일까?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철학은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다. 철학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문제로 겪는 고통과 세상살이의 고단함과 각박함에 대해 이해하고 왜 그런 고단함과 각박함이 삶을 짓누르는 지 고찰해 보며 발상을 전환시키는 일종의 상상의 낙원으로서의 역학을 하는 것이다. 간혹 철학자들 자신이 “철학이 일반인들에게 점쟁이만큼의 역학도 하지 못한다면 철학이라는 학문은 없어져야 한다”는 자조 섞인 말을 하는데 이런 말을 통해 현재 철학이라는 학문이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들에 대해 엘리트주의적이고 추상적이기만 한지 여실히 알 수 있다.
이유선의 책 이 책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은 철학이 마냥 거대담론과 이상(理想)만을 말할 것이 아니라 사적이고 현실적인 것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철학은 삶의 구체적인 문제에서 발생하는 궁극적인 물음에 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편성, 합리성, 객관성에 집착하기보다는 삶의 우연성, 구체성, 유한성을 기꺼이 감수하고 거기서 나름대로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유선은 “삶의 구체적인 문제”와 다양한 질곡을 문학에서 찾는다. 그리고 이런 문학 작품에 대해서 철학을 통해 자기 “마음대로” 해석한다. 그런데 이유선 식 “철학과 문학의 대화”, 즉 철학으로 문학 해석하기는 절묘함이 있다. 별로 연관성이 없을 것 같은 철학 텍스트와 문학 텍스트가 엮여 어떤 지점에서 접점을 찾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철학의 본질에 가장 가깝게 접근한 철학 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예를 들어 존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이 책에서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엮여 삶의 특정한 질곡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 그 의미를 갖고 있는데, 존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이 책에서 언급되는 다른 문학 작품인 《눈먼 자들의 도시》, 《우상의 눈물》, 《콧수염》등과 같은 작품과 엮여도 접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에 있어서 강약의 차이를 보이겠지만 분명 이런 추론이 비약은 아니다.
그럼 철학과 문학의 접점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유선은 이런 철학 텍스트와 문학 텍스트의 접점을 통해 삶을 이해하고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의 삶을 확신하고 요약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러니스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지막 어휘가 다른 사람에게서 가지고 온 것이 아닌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라는 확신이다. 아이러니스트의 자신의 용어로 자신의 삶을 요약할 수 있기를 원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일차적으로는 아이러니스트 자신의 사적인 완성과 관련이 있다. 자신의 인생이 자신을 넘어선 어떤 것에 의해서 좌우되거나 자신보다 큰 힘에 동화되는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기 삶의 우연성을 긍정하는 것, 곧 삶의 자율성을 획득하는 것이야말로 아이러니스트의 관심사이다.”
이유선이 최인훈의 《광장》을 해석할 때 이유선이 말하는 아이러니스트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광장”은 연대와 공동체의 상징이고, “밀실”은 사적인 개인의 상징이다. 광장과 밀실을 둘 다 간직하는 것은 그 속성상 서로 배척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아이러니를 안고 있는 사람을 아이러니스트라고 부른다. 아이러니스트는 사회 속에 살면서 자신만의 개인성을 가져야 하며 사회 전체는 이런 아이러니스트의 개인성을 인정(認定)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광장이나 밀실, 이거 아니면 저거를 선택해 ‘결사항전’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아닌 그 둘을 모두 안고 있는 우연적이고 유한한 아이러니의 세계임을 인정하고 받아 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감성을 지닌 철학, 이성을 사용하는 문학”으로 “삶의 우연성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