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아는 이슬람권 문학이라면 '아라비안 나이트' 정도에 불과하던 차에 친구 소개로 읽게 된 터키소설. 오래된 땅답게 풍부한 이야기 전통을 갖고 있음에도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세계의 이야기다. 동서양에 각기 한 다리씩을 걸치고 있는 나라 터키, 비잔틴이었으며 콘스탄티노플이었던 천년고도 이스탄불에서 나고 자란 작가의 신비롭고 재미난 정체성 이야기.

책은 유럽 르네상스의 물결이 불어닥친 이스탄불의 궁정 세밀화가들을 둘러싼 살인, 추적, 예술에 대한 광기와 집착을 다룬다. 우물 바닥에 머리가 으깨진 채 죽어있는 화자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말, 죽음, 빨간색, 개, 모두가 자기 목소리를 낸다는 점이 독특하다. '추리소설'이라는 다분히 서양적인 양식을 빌려 동양적인 관점을 더한, 말 그대로 Cross-over.

첫 장을 읽고 너무나 아까워서 읽기를 망설였던 책인데, 이번 연휴에 단숨에 읽어버렸다. 예술가로서의 신념과 새로운 물결에 쓸려 잊혀지는 전통, 창작가로서 작품을 대하는 세계관에 대해서 주인공들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쉽게 읽히는 책은 결코 아니지만 읽는 순간이 아주 뿌듯하고 책장을 덮고난 지금은 가슴 한 구석이 애잔하다.

카파도키아에서 만난 메멧은 터키 사람들의 풍부한 문화적 유산과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자랑하며(그는 '에밀 쿠스트리차'가 터키의 후예인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ㅁ-; 부러워) 얼굴 가득 뿌듯한 표정을 지었는데, 결국 얄팍한 사기꾼으로 밝혀진 메멧에게서도 그때 그 순간의 표정만큼은 잊을 수 없이 인상적이었다. 오르한 파묵을 알고나니 그때 그 메멧의 자부심 어린 표정이 되살아나며 예전보다 한결 더 그가 부러워졌다.

아야소피아 사원에서 멋모르고 샀던 세밀화 부분 엽서가 책상 밑에 깔려있어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화려하고 강렬한 색채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더없이 아름답게 드러내고 있다. 소설 속의 톱카피 궁전과 아야소피아, 이스탄불의 꼬불꼬불 울퉁불퉁한 골목길과 에메랄드빛 보스포러스만이 어제 본 것처럼 떠올랐다. 잘 익은 감빛 가로등이 즐비한 술탄 아흐멧에 다시 가고싶어지는 매우 아름다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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