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언씨를 위하여 외 현대희곡선 5
조오튼 / 현대미학사 / 1994년 10월
평점 :
품절


'전후 영국의 세 편의 희곡'이란 부제를 달고있는 희곡집이다.

조 오튼의 <슬로언씨를 위하여>와 피터 쉐퍼의 <다섯손가락 연습>, 콜린 히긴스의 <해롤드와 모드>가 들어있다. 

대학 4학년 때 극단 정미소에서 박정자 씨와 이종혁씨가 하는 <19 그리고 80(원작 '해롤드와 모드')>을 봤다. 지금은 영화와 드라마로 얼굴이 꽤 알려졌지만 그땐 무명에 가깝던 이종혁씨의 신선한 연기와 박정자 아줌마의 독특한 캐릭터가 잘 어우러진 감동적인 극이었다. 거기다 돈이 모자라 짓다만 정미소 소극장의 나이브한 분위기까지, 모든 게 작고 따뜻하고 아름다웠던 기억이 난다. 

요즘 작업하고 있는 각본의 힌트를 <해롤드와 모드>에서 얻어오느라 오랫동안 이 희곡을 찾았다. 책을 받아든 순간 어찌나 떨리던지, 앞의 두 작품은 보리밥 씹듯이 꼭꼭 씹어 읽고 '해롤드와 모드'는 완전 무장해제를 하고 읽었다.  

<해롤드와 모드>는 서양인이 썼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동양적인 사고를 담은, 보기 드문 작품이다. 작가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아 '생'을 그 자체로 누릴 줄 아는 '모드'라는 캐릭터를 통해 소유와 죽음과 상식과 편견, 이 모든 것들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점에서 재고하게 한다. 열아홉 해롤드와 여든살 모드, 두 남녀의 예쁜 사랑과 작별은 글로 읽어도 극으로 볼 때 못지않게 감동적이다. 약을 먹고 죽어가는 모드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해롤드와 그런 해롤드에게 "이제 그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며 숨을 거두는 모드의 마음은 '사랑'이 궁극적으로 가 닿을 데를 일러주는 것만 같다. 

영화와는 달리 연극은, 나이든 배우들을 위한 배역이 제법 있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멋진 역할을 더 제대로 해낼 깜냥이 생기는 편이다. '모드'가 그런 역할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이 먹은 여배우라면 '모드'를 꿈꾸지 않는 자가 없을 것처럼 어린 남자 배우라면 누구든 '해롤드'를 한번은 꿈꾸리라 생각한다. 물론, 이건 내가 '모드' 역을 탐내서 하는 말이다. ㅡ,.ㅡ  

<에쿠우스>, <아마데우스>로 유명한 피터쉐퍼의 <다섯손가락 연습>도 좋았다. 특별하게 강렬한 장치 없이 아주 매혹적인 극을 써내는 작가다. 존경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