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ㅣ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수유+너머'라는 이름의 지식꼬뮨(?)를 만든 고미숙씨가 쓴 화제작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재해석해낸,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의 첫번째 권. 역사책 속에 박제되어 친숙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중세의 실학자를 옆집 아저씨처럼 생생하게 숨쉬고 말하고 글쓰고 행동하도록 살려낸 저자의 노력과 애정이 사뭇 정성스럽게 느껴진다.
이전에 고미숙씨가 쓴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를 무척 재미나게 읽은 데다가 공부라곤 생판 하질 않던 대학시절 마지막 학기에 운좋게 들뢰즈/가타리를 접할 기회가 있어 책 곳곳에서 드러나는 '전문용어'들이 생소하진 않았다. 그러나 연암이나 열하일기에 대한 관심은 차치하고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들뢰즈/가타리 철학의 기본 개념을 잘 모르는 사람이 처음 이 책을 집는다면 다소 갸웃할 구석도 있을 것 같다. 알고보면 전혀 어려울 것이 없는 얘기지만 역시나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아는' 것이 인지상정.
이 책을 읽고나니 그제서야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정약용 등 시대를 뛰어넘어 사유할 줄 알았던 선각자들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이후로 만나보지 못했다는 것이 참 아쉽게 느껴진다. 갈릴레이나 코페르니쿠스에 버금가는 선각자들을 조상으로 두었음에도 우리는 갈릴레이나 코페르티쿠스보다 우리 조상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이는 자기네 역사를 선택과목으로 지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라의 교육이 가진 최대의 문제점이자 부끄러움일 터이다. 나를 모르면서 남에 대해 알겠다고 덤비다니, 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서양에서 들여온 근대교육을 받으면서 우리 학자에 대해 이렇게 쉽고 친절하게 써준 책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 만남은 고미숙씨 말마따나 꽤나 유쾌하고 신선했다. 대륙 끄트머리에 조그맣게 붙은 반도에서 이런 인물을 낼 수 있었다는 것도 놀랍고, 서른이 되기 전에 그 인물과 '접속'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도 기쁘기 그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