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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평점 :
천명관의 상상력에서 우리 소설의 미래를 보았다,는 다소 격앙된 친구의 말을 듣고 당최 어떤 상상력이길래- 살짜쿵 삐딱한 시선으로 읽기 시작한 책. 1/3까진 뭐야 이거? 싶고 2/3까진 보르헤스랑 마르케스 좀 봤구만, 하다가 책장을 다 덮고났을 땐 젠장, 난 그럼 뭘 하라는거야! 분노케 만든 이야기 한 편. 문학동네소설상 10년 역사의 괄목할 사건이라 불리는 이 자는 놀랍게도 혹은 뻔하게도 영화쟁이였다! 바야흐로 모든 것이 모든 것을 향해 횡단하고 유목하는 이 시대, 영화쟁이가 우리 소설의 새로운 장을 연 것이 기실 놀라운 일도 아니라면 아닐 터. 어쩜 우리 영화의 미래는 어떤 공학자나 혹 어떤 의학도에 의해 한순간 도약할 지도 모른다.
<고래>는 등장인물의 내면이라든가 배경에 대한 묘사라든가 문체라든가 고전적인 소설에 쓰였던 장치를 거의 배제하고 오래 끓인 액체의 결정처럼 남은 '이야기'가 전부다. 그래서 400쪽 짜리 소설을 읽은 기분이라기보단 40일에 걸쳐 밤마다 세헤라자데 공주한테 옛날 이야기 들은 기분이랄까. 영화 시나리오를 써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건 가히 3편은 족히 나올 시리즈 영화의 트리트먼트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트리트먼트를 쓰다보면 이걸 확 소설로 내버려? 하고 유혹을 느끼는 경우가 더러 있다. 완성도 있는 트리트먼트는 웬만한 소설보다 재밌으니까.)
암튼, <고래>는 입담 좋은 영화감독 지망생이 술자리에서 안주 삼아 풀어놓는 이야기 하나를 뼈대로 이리저리 가죽을 덧대고 살을 붙여 만든 상당히 독특한 뻥이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역시나 플롯의 힘! 당신 영화도 도끼눈 뜨고 지켜보겠다. 하지만 그 전까진 당신한테 반했다고 말하지 않을테니 기대도 하지 마시라. 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