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음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평점 :
품절


어떤 작가나 어떤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할 때, 나는 과연 어떤 잣대를 쓰는 걸까? ...단 하나의 질문으로 축약하자면 '구원이 있느냐'는 것일게다. 그래서 작품 속에서 일체 구원의 여지가 없는 박찬욱보다 단선적이고 편견에 가득찬 김기덕의 손을 들어주는지도 모른다. 

얀 마텔을 읽으면서 책장 구석에 박혀있던 이 책이 생각나서 집었다. 첫장을 읽을 때부터 얀 마텔의 길고 무거운 문장에서 벗어나 가볍고 산뜻하고 세련된 문체에 마음이 끌렸다. (공교롭게도 번역자가 같았다) 고르게 포장된 뉴욕의 골목길에서 풍겨오는 갓 볶은 커피냄새가 이런 느낌일까, 폴 오스터의 주인공들은 부랑자거나 노숙자거나 사기꾼이라도 하나같이 지적이고 세련된 아우라를 풍긴다. 모든 등장인물이 맨 처음 '달의 궁전'에서 만났던 신선한 그와 닮았다. 책의 삼분의 이 쯤은 가볍게 유쾌하게 자기 주인의 픽션을 향해 달려간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때 허무한 느낌은 나만 그런 것일까? '현대인의 고독' 어쩌구 저쩌구 하는 작품들은 죄다 맘에 안드는 결말을 갖고 있다. 따지고 들면 이 소설 한 권은, 아니 이 삶 전체가 이 세계랑 우주 전부가 한 바탕 환타지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기왕에 이 세계에 환타지 하나를 펼쳐놓기로 했다면 좀더 시원하고 좀더 통쾌한 것을 내놓을 수도 있었을텐데. 폴오스터의 대단한 재능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인생의 뼈아픈 맛의 정수를 접해본 작가는 아니라는 생각에 살짝 씁쓸한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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