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200쇄 기념 한정판)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지난 2일, '78년 초판 발행 후 200쇄를 맞은 난쏘공의 작가 조세희씨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쌀 협상 비준안과 고 전용철씨 사망 책임을 묻는 집회에 가는 길이라는 그는, 이제 카메라를 들고 자신의 삶과 문학에 대해 말하고 있다.
30년 전에 쓰여진 이 글이, 밀레니엄을 말하고 축포를 쏘던 - 두번째 샴페인은, 세기를 넘는 비약을 기대했다 - 이제에도 사람의 그래,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이유가 아프다. 40대 아버지가 중학생 아이에게 이 책을 선물하자 아이는, "이 소설 옛날이야기가 아니네." 말했다지.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던 그도, '생존'을 말하는 집회의 사람들도 '좀 더 나은'을 위해 목숨 밖에는 담보할 수 없었던 가난함도 실상 내겐, 건물 유리창을 통해 내려다보는 시선으로만 존재한다는 걸 안다. 그만큼 치열해보지 않았으니까. 내 부모의 가난, 그에서 비롯된 멸시와 울분은 어린 나에게는 여과된 가난이고 멸시였으니까. 내가 느끼는 감정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아니면 조금, 피곤한 것인지.
김훈은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이 사회에서 가난이란 단순한 물질적 결핍이 아니다. 이 사회에서 가난이란 차별이며 모멸이다.', '어릴 적 가난했기 때문에 가난이 싫었고 전기밥통 속에서 익어 가는 그 평화롭고 비린 향기에 한평생 목이 메었다.'고 말한다. 김규항은 『나는 왜 불온한가』에서 다큐멘터리 감독 김동원의 말을 끌어들인다. 그는 "무엇보다 가난해야 한다. 강요된 가난은 죄악이고 극복해야 하는 것이지만 자발적으로 선택한 가난은 바로 예수의 모습이다. 가난해야만 가난의 가치를 가질 때만 세상의 여러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고 나는 그걸 따라가는 거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를 지지한다. 너무 이상적이라 생각하면서.)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건전하고 바람직한 사회상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데 항상 어려움을 느낀다. 사회적 부의 균형,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 인권과 자유.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이고 성실한 사람도 집단이나 구조에 속하게 되면 굉장히 이기적이고 무감각해진다는 생각을 한다. 이미 표준화, 관습화된 제도적 장치 안에서 개인은 무력해진다. 원하지 않아도 "그래, 이게 대세다." 따라가게 되는 것 같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다.)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만 없다면 개입조차 꺼려한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할 때 그 '우리'라는 인칭은 화자와 몇몇 지인만 발끈하는 성질의 것은 아닐까. 따라서 '자발적으로 선택한 가난'이란 말은 어쩐지 순진하게만 들린다.
그래도 내가 그를 지지하는 이유는 막연한, 인간에 대한 신뢰와 애정에 있다. (왜 자꾸만 눈물이 나려는지 모르겠다. 하하.) 이는 어쩌면 낙관적 낭만주의자의 감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인간의 여린 면을 믿는다. 평범하고 우둔하게 보이는 사람들의, 다소 짜증스럽고 별나게 보이는 사람들의, 유치해서 찬란한 아이들의. 그리고 매번 이들을 배신하는 '희망'에 대해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