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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컷
레이몬드 카버 지음, 안종설 옮김 / 집사재 / 1996년 3월
평점 :
품절
숏컷을 통해 본 카버의 단편들은 결론이 없다. 그가 정작 중점을 두는 것은 사건의 구성이나 진위보다 상황 자체의 진술인 듯 하다. 일이 일어난 인과나 전망은 작가도, 독자도 개입할 수 없으며 어떤 뚜렷한 해석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불명확한 추측만 난무하다. 이는 현상만을 기술하는 카버의 독특한 문체에서 비롯하는데 이러한 전개는 작품이 보여주는 소통의 불완전성과 심리묘사에 정확히 부합한다. 현실에서 많은 일들이 우리의 의지가 아닌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과 같이 그는 통제되지 않는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작품에 현실성을 구비하고 독자의 동의를 끌어내는 것이다.
그의 글을 이해하는 데 있어, 책의 마지막 단편 '심부름'은 작품에 대한 그의 생각을 독자에게 전하는 '심부름'이며 주인공 체홉은 그의 대변인이라 보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특히, 체홉에 대한 톨스토이의 평가 - 그는 체홉의 연극들이 지나치게 정적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 전망이 결여되어 있다고 평가했다. "등장 인물들이 자네를 어디로 데려다 주는가?" "소파에서 창고로 갔다가, 다시 소파로 돌아올 뿐이잖은가."- 나 체홉 자신이 그의 삶이나 작품 활동과 관련하여 "나에게는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세계관이 결여되어 있다네. 그런 것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바뀌기 마련이지. 따라서 내 작품 속의 주인공들이 어떻게 사랑하고 결혼하며 태어나고 죽어가며 또한 말하는가 하는데 대한 묘사만으로 나 자신의 작업을 한정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네."라고 말하는 부분은 생존했던 인물인 체홉에게서 동질감을 느낀 카버가 그의 이야기를 자전적으로 재구성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반영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