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박완서의 글에 대한 매니아적인 나의 애정과 문학작품도 음식과 마찬가지여서 자기 취향에 따라 그 평가가 천차만별일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더라도 역시 나의 결론은 박완서의 글에는 실망이 없다이다.
'그 남자네 집'은 현대문학 창간 50주년을 기념하여 발간한 박완서의 첫사랑을 이야기하는 연애소설이다.
50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첫사랑 그 남자가 살았던 기와집, 변합없는 모습으로 서있는 그 집을 찾게 되면서 나는 전쟁 중이었던 그 시절 그 남자를 추억하게 된다. 이 원수가 되기도 하고 돈 때문에 미군부대에서 몸을 팔기도 해야했던 어수선한 그 시절, 한국전에 징집되어 부상으로 명예제대한 상이군인인 그 남자와의 만남은 시절의 살벌함도 궁핍함도 견뎌낼 수 있는 힘이다. 사랑은 잔잔히 가라앉은 사람의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무료한 삶의 활력과 힘이 된다고들하지 않는가. 하물며 첫사랑의 힘이 아닌가.
그 시절 남자의 누나나 노모가 마련한 돈으로 물질적인 풍족함을 느끼던 주인공과 그 남자에게 시가 사치였다면 그들이 누린 물질의 사치는 시였을지 모른다. ' 그 암울하고 극빈하던 흉흉한 전시를 견디게 한 것도 내핍도 원한도 이념도 아니고 사치였다. 시였다'라고 주인공은 말한다.
사랑조차 무료해지고 궁핍의 그림자를 떨쳐버리고 싶은 어느때 쯤 은행원 민호와의 결혼 청첩장을 건네기 위해 그녀가 찾아갔을 때 그 남자는 울고 있다. 그녀 역시도 진실로 슬픈 이별의 눈물을 흘리지만 그 눈물은 그저 슬프기 때문이다.
결혼을 한 그녀의 남편이 '자유부인'이라는 연재소설에 빠져있을 무렵 다시 만나기 시작한 그녀와 그 남자는 선산 성묘를 핑계로 금지된 욕망의 고통에서 빠져나오려고 하고 그 약속의 날 남자는 나오지 않는다. 것이 그의 실명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찾아간 병원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그 남자의 전체, 보이는 상처와 보이지 않는 상처까지를 포함한 한 남자의 전체를 느낀다'.... 그것은 가슴 설렌 첫사랑, 감정과 욕망이 함께 하는 첫사랑이라기 보다는 그저 한 남자, 한 사람에 대한 담백하고 온전한 이해가 아니었을까. 한 시대를 함께 한 그래서 동일한 감정 속에 살았던 한 사람, 그러나 첫사랑을 나누었기에 더 친밀한 한 사람,,,
그리고 적당히 투자를 해가며 집을 늘려가고 이런 저런 집안일에 묶여 생활하던 그녀는 가는 세월 위에 오는 세월이 정확히 겹쳐지는게 지겨워지기 시작하면서 남편이 바람이라도 피워서 생기가 넘치고 젊어지고 덜 불쌍해지기를 원한다. 사랑만이 줄 수 있는 무한한 에너지 그리고 그 힘으로 달라지는 상상할 수 없는 변화에 대한 그리움, 어쩌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세월의 진리가 안타까워서 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남자를 다시 만난 것은 곧 헐릴 그녀의 친정집..이제 그녀는 혼외정사보다는 사람되라고 설교하는게 더 익숙한 정서가 되버린 두루뭉실한 여편네가 되어 그 남자의 부음을 접한다. 그러나 이미 결별을 끝낸 그녀는 문상은 가지 않는다. 그녀와 그 남자의 완벽한 결별은 불과 몇 개월 남짓의 첫사랑은 욕망이라고는 한치도 남아있지않은 50년 후의 포옹이었다. 첫사랑은 이렇게 과거의 한 순간이지만 전 생애를 통틀어 천천히 이별을 고한다는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진정한 결별은 세월을 건너 두 사람의 완전한 이해를 통한 결별로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