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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1.

사실 나에게 죽음이란 그다지 흥미로운 주제가 아니다.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고, 이처럼 당연한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왈가왈부하는 것은 시간과 정력의 불필요한 낭비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물론 데카르트 이후 수많은 이들이 강조하듯, 자명해 보이는 사실에 대해 의심해보는 것이 철학함의 기본적 태도라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사회적 통념과 자연과학적 사실은 구분할 필요가 있으며 철학적으로 의미 있는 의심은 전자여야지 후자로까지 나아간다면 결국 무의미한 회의주의나 극단적 상대주의로 귀결될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죽음이란 주제에 대한 나의 입장은 책에서도 언급된 에피쿠로스에 가깝다. 죽음은 사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한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다. 하지만 죽음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있든 이미 죽었든 간에 죽음은 우리와 무관하다. 살아있을 때는 죽음이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306) 명쾌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죽음이란 우리가 경험할 수 없고 인식조차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죽음에 대한 고민이란 인간의 인식 한계를 넘어선 것에 대한 탐구와 같은 모순어법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오히려 삶 쪽에 관심이 있다. 삶이란 매순간순간 내 앞에 예측과 우연으로 뒤섞인 새로운 것들이 펼쳐지는 기묘한 현실 아닌가. 다시 말해 이전 경험의 누적으로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삶의 경로가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또한 우연히 끼어든 하나의 경험으로 인해 완전히 새로운 경로가 열리기도 하는, 우연과 필연이 마구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놀라운 순간이 바로 삶이며, 이 신기한 경험이야말로 인간이 고민해야할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죽음이란 것이 인간에게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적극적 선택으로서의 삶의 중단’, 자살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저자인 셸리 케이건은 이런 나를 조심스럽게 다독이며 죽음자체도 음미할 가치가 있다고 조언한다. 어째서 그런가? 그가 보기에, 우리가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진지하게 마주할 때,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고민할 수 있게 되며, 나아가 우리 삶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정말로 중요한 건 이것이다. 우리는 죽는다.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 죽음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다.”(507) 과연 그러할까. 나 역시 조심스레 저자의 말을 경청해 본다.

 

2.

이 책은 저자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두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다. 1장부터 8장까지는 죽음에 대한 형이상학적 차원의 물음을 탐구하며, 이후 9장부터 14장까지는 죽음에 대한 가치론적 탐구가 이어진다.

 

먼저 앞부분을 보자. 형이상학의 물음은 보통 그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으로 이루어진다. 대상 자체가 가진 특성이나 외적 효과들을 검토함으로써 대상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노력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형이상학은 존재론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등과 같은 플라톤의 대화편들은 형이상학적 혹은 존재론적 탐구의 전범을 보여준다. 그러나 죽음이란 대상은 다른 것들과 달리 죽음이 발생하는 그 시점을 특정할 수 있을 뿐 그 자체가 가진 특성이나 외적 효과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가 죽은 후에 우리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가. 죽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이에 대한 어떤 정보도 갖고 있지 않다. 사후 체험에 대한 몇몇 증언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신빙성 있는 정보라고 보긴 어렵다. 과연 죽음에 대한 존재론은 가능한가?

 

이런 상황에서 저자는 일종의 우회 전략을 사용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먼저 살펴본 후 그러한 인간에 대한 이해를 통해 죽음의 본질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책의 전반부 대부분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이는 다시 두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영혼(혹은 정신)과 육체에 대한 이원론과 일원론의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의 자아정체성(personal identity) 문제이다. 심리철학에 약간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라면 이 두 주제가 얼마나 유명한 철학적 주제인지 눈치 챌 것이다. 저자는 심리철학에서 다뤄지고 있는 여러 입장들의 논점들과 쟁점들을 소개하며, 자신은 정신에 대한 물리주의적 관점과 정체성의 육체 관점이 가장 그럴듯한 주장이라고 밝힌다. 간단히 말해 저자가 보기에 영혼이나 정신이란 육체의 한 기능일 뿐이며 이런 관점에서 인간의 정체성은 육체를 기반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가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 무슨 상관이 있을까? 물론 죽음이란 것이 인간에게 닥칠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을 다루는 책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거의 책 절반의 분량을 할애하여 이토록 자세히 다룰 필요가 있을까? 내가 보기에 저자는 이것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대개 사람들은 죽음과 같이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현상을 신비화하는 경향이 있고, 인간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이러한 신비화를 부추기게 된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신비화는 오히려 죽음을 진지하게 대하는 걸 방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비주의를 깨는 일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작업이 된다. 철학자의 시선으로 볼 때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봤던 죽음이라는 개념에 더 이상 신비로운 것은 없다. 인간의 육체는 살아서 움직이다가 파괴된다. 결국 이것이 죽음에 관한 전부다.”(266)

 

이처럼 죽음을 덮고 있던 신비의 장막을 벗겨버린 후 저자는 죽음의 가치론을 탐구한다. 가치론이란 쉽게 말해 그것이 좋은가 나쁜가를 따지는 일이다. 죽음이란 우리에게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이 역시 삶의 중단이라는 죽음의 특징으로 인해 삶과의 관계 속에서 해명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삶과 죽음의 가치를 다루고 있는 여러 논의들, 삶의 박탈로서의 죽음이나 영생의 지루함, 삶에 대한 낙관론-비관론-중간론적 입장,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의 논의를 거친 후 다소 뻔한 결론에 도달한다. 죽을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삶과 상호작용해 삶을 더 위태롭고 일시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삶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긴다.”(394) , 죽음에 대한 인식은 곧 삶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며, 삶의 한계를 인식할 때 우리는 삶을 더욱 풍요롭게 꾸며나가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은 삶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가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인간이 음미할 가치가 있는 주제이다. 죽을 운명이라는 진실에 직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지금과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죽음과 관련된 사실들을 모두 무시하는 게 바람직한 태도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적절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태도다.”(403)

 

3.

여기까지 저자의 얘기를 듣고 나니, 그간의 내 태도가 적절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태도였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한번 반문해 보자. 삶이 이미 충분히 흥미롭고 즐거운 이들에게도 죽음을 직시하는 일이 필요한가? 저자의 결론에 따르면 죽음이란 삶에 대한 도구적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도구란 그것이 필요한 이들에게 유용할 뿐이다. 즉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괴로움에 빠져 있는 사람이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삶이 가지는 본질적가치에 대해 재고하게 되고 삶의 새로운 의미를 되찾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의 삶이 충분히 만족스러운 이들에게 이러한 도구는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이런 이들이 굳이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니까 내가 죽음이라는 주제를 무시하고 있던 데에는 내 자신이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항변해 볼 수도 있을 듯하다.

 

행복에 대해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저자는 행복에 대한 쾌락주의적 관점을 논하면서 최고의 쾌락을 얻을 수 있는 경험 기계를 예로 든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경험 기계 속의 삶을 거부할 거라고 단정한다. 왜냐하면 경험 기계 속에서는 어떤 성취도 없다. 자신에 대한 인식도 없다. 그리고 사랑하는 관계도 없다. 행복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이처럼 부수적으로 수반되는 경험이 아니라 실제로 가치 있는 것들을 포함하고 있어야 할 것이”(364)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상당히 이상하게 들린다. 물리주의자로서 인간의 정신이나 의식을 뇌 기능의 결과라고 받아들인다면 성취감이나 자기 인식 혹은 사랑과 같은 감정도 뇌가 산출하는 효과일 뿐이고, 그렇다면 경험 기계 속의 경험이나 실제의 경험은 결국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상상과 같은 내적 경험과 실재라는 외적 경험을 구분하는 것이라고 항변하겠지만, 그가 제시한 경험 기계란 외적 경험과 똑같은 자극을 부여하는 것이기에 자극 없이 혼자서 떠올리는 상상과는 분명 다르다. 나 역시 물리주의자로서 이런 식의 경험 기계가 만일 만들어진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할 것이다. 빨간 약을 선택하는 것은 영화 속 영웅이나 할 일이 아닌가. 세속적이고 쾌락적인 나는 아마 그러지 못할 것이다.

 

저자는 영미철학의 훈련을 받은 사람답게 이 책에서 여러 입장들과 이를 토대로 한 다양한 가능 세계를 보여주며 각 입장이 가진 논리적 정합성을 꼼꼼하게 검토한다. (물론 어떤 부분에서는 단순히 상식에 호소하고 지나가는 부분도 있지만, 이는 교양 강의나 대중 철학서의 한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방식의 서술에 익숙지 않은 이들이나 죽음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 아포리즘을 기대한 이들에게는 다소 짜증나고 지루한 책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이란 것이 결국 논증으로 구성되는 학문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이 책은 죽음이라는 익숙한 주제로 철학을 연습하는 훌륭한 교재가 될 것이다. 만일 이런 강의를 직접 들었다면 나 역시 뒷표지에 실린 학생들과 같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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