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꾼의 품격'이 영화 속 술을 설명하는 고품격 안내서라면 '내가 만난 술꾼'은 술, 사람, 그들과 부대끼며 먹어온 술자리에 대한 에세이다. 임범은 줄곧 집요하거나 껄렁하지 않은 시선으로 지인들의 이야기를 썼는데 간혹 불편한 지점들이 있다. 자신이 학창시절을 보낸 공간이나 학연으로 얽힌 사람들과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부분에선 특히 그랬다. 서울대라는 상징적인 공간-저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에서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사람들의 일화를 들려주는건 독자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지잡대라고 일컬어지는 어떤 사람이 자신이 만난 술꾼이란 타이틀로 글을 쓴다면 어떨까. 책을 출판하는 것은 물론, 아무도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지방대의 누군가와 그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읽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인물 에세이에서는 저자의 관찰력과 글쓰기 실력만큼이나 '누가'도 중요하니 말이다. 모처럼 나온 술 에세이가 문제라고 말하는게 아니다. 임범이 작정한 듯 학교 얘기만 하는 것도, 자신이 인식하지 못한 특권의식을 내세우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오히려 그는 시종일관 소탈한 문체로 술꾼 이야기를 했고 담담한 시선으로 일화를 풀어냈다. 그런데도 왠지 이런 기획이 먹힐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알만한 사람들만 아는' 술자리에 끼고 싶다기보다는 자꾸만 그래야했을까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readercolumn/410710.html
윗 기사는 김의겸의 사설을 비판한 글이다. 비판받은 사설처럼 이 책이 직접적으로 자기성찰이 부족하고 객관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애써서 쌓고 관리해야할 '인맥'을 '친목질' 하나로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는게 불편하달까.
한의원에 갔다. 몇마디 끝에 약 지어준걸 먹으면 된다고 한다. 침은 안 놔도 되냐니까, 맞을거면 맞으란 식이다. 침을 맞고 접수 창구에 갔더니 약값으로 몇 만원을 내야한단다. 의사한테 왜 이 약을 먹어야하는지, 어떤 성분인지 설명 들은게 전혀 없었다. 결국 건강보험 되는 치료만 받고 나왔다. 그 순간, 왜 나는 대범하게 몇 만원 정도 약값으로 낼 수 없는지에서부터 시작해 왜 의사들은 설명을 해주지 않는지 등등을 생각하다 귀까지 빨개져버렸다.
서문부터 맘에 든다. '철학자 가다머, 현대의학을 말하다'와 같이 보고 있는데 완전 쑝 간다. 의약분업 이야기만 나오는게 아니라 한국 의사들의 전반적인 비리와 관행에 대해 예리한 칼날을 대고 있다. 설마 이렇게 비합리적이고 '제 얼굴에 침 뱉기'를 할 수 있나 싶은 대한의사협회의 말바꾸기와 국민을 인질로 해서 벌이는 의료수가 인상과 의료파업, 리베이트와 탈세, 치료 오남용까지. 차라리 저자가 너무 비판적이라 글이 센게 아닐까 싶은 부분이 한두군데가 아니었다. 물론 이 책의 모든 내용을 진실이라고 믿을 수는 없겠지만 반절만 믿는다고 해도 기가 찬다.
기가 찬 건 이 책의 리뷰 역시 마찬가지다. 예스보다 알라딘의 리뷰가 좀 더 세고 재미있다. 그렇게 깔거면 제대로 까던가, 인신공격은 김빠진 콜라처럼 맥없고 논리는 허술하다. 도리어 이 책이 화제가 되었다면 비난이든 또다른 고발이든 온갖 얘기들이 풍성하지 않았을까란 아쉬움이 남을 정도다.
본의 아니게 두 분야 직업군의 사는 법이나 산다는 것에 대한 책을 읽고 있다.
문학사상 주간 권영민이 소설가들에게 창작론을 의뢰했다. 소설가들은 각자의 색깔에 맞는 창작론을 보내왔다. 이 책은 그 글들을 묶은 것이다. 작가간 어떤 유기적인 연결고리가 보이지 않고 각각 따로 봐도 무리가 없으며 소설 창작론 같은 기획 의도에 맞는 글을 찾으려다간 큰 코 다칠 수 있다.
엮인 글, 기획된 주제로 묶인 글을 모아서 만든 책은 태생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그건 바로 글쓴이가 간절하게 쓰고 싶어서 쓴 글이 아니란 것. 정말 쓰고 싶어서 쓴 글도 호불호가 갈리는데 주문에 따라 쓰는 글은 얼마나 더하겠는가. 물론 때때로 예기치않게 영리한 기획자의 의도로 꽤 괜찮은 책이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완성도나 글의 성격은 물론 기획에 맞는 글인지조차 오리무중. 결국 이름빨로 독자를 낚고 작가들은 원고료를 받고 출판사는 책을 팔아먹을 수 있는 것이다. 너무 거칠게 말하는걸까.
김경욱의 글을 볼 때까지만 해도 막연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괜찮잖아! 미시마 유키오와 다자이 오사무의 문학에 대한 글은 3인칭 관점과 화자가 저자인 관점의 차이를 명료하게 보여주잖아. 식견이나 경험의 잉여가 아닌 해석의 잉여를 통해 소설이 열린다는거지. 왠지 다시 소설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부푼 희망까지 생겨났다. 그런데 계속 덜커덩거린다. 여름과 작별하는 일은 마흔여덟 번도 더 남았다던가, 마음이 시큰했다는 감상이 공감 안 되는 김애란의 글에서부터 조사에서 말문이 막힌다는 김훈-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김훈이 조사의 선택에서 망설이는 것마저 사랑하겠지만 나는 그의 소설이 인상적이지도, 재미있지도 않다. 그럴 때면 어떤 조사를 사용할지는 부차적인 문제가 아닌가.- '소설가가 아닐지라도 어쩌면 모든 사람들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란 얘기를 하기 위해 문을 잠근 남편 때문에 밖에서 밤을 지세운 얘기를 왜 하는지 모르겠는 서하진, 콜라에 정액을 빠트리면 어떨까란 시답잖음식의 자유연상법으로 희롱하듯 글을 쓰는 박민규까지. 아직 책의 반절도 읽지 못했는데 더 읽고 싶은 맘이 안 생긴다.
헐렁한 창작론에도 관대했는데 왜 이러는걸까. 헐렁한 창작론, 글쓰기 방법론에 관대했던건 그 글이 짚고 있는 부분이 실용적이기도 했지만 괜히 이름값에 기대어 무리를 하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애초의 기획의도대로 글을 취합하겠다는 집념마저 없다. 그렇다고 당당하게 책 팔아보려고 이 책을 냈다고 하지도 않는다. 솔직하지 못하다. 결국 이 책을 삐딱하게 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