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눈은 기대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이모는 산타 할아버지처럼 굴었고, 그럴수록 아이들은 애가 탔다. 산타 할아버지는 착한 아이들에게만 선물을 주신데요. 아이들은 사설이 길어도 언젠가 가방은 열릴테고, 이모란 작자가 분명 자신들의 기대에는 못미치는 선물을 꺼낼거란걸 알고 있었다. 기대에 못미치는 것과는 별개로 이모가 귀찮게 괜찮지않냐고 물어댈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들이 얼마쯤은 감동하고, 놀라워해야할지 미루어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개봉만 남았는데,

갑자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할머니가 어딜 나간다고 하더니 같이 오신 어른과 황급하게 신발을 신는 것이었다. 옥찌야 조금 컸으니 상관없었지만 민은 불안했다. 민으로선 느닷없이 나타나 선물을 준다고 으쓱대는 이모보다 어수룩하지만 자기 뜻 다 받아주는 할머니가 더 좋았다. 민은 자기도 같이 갈 생각으로 신발을 신으며 나갈 차비를 하는데 할머니만 나간 후 문이 쾅 닫혀버렸다. 그때부터 민은 방바닥을 뒹굴고 화를 참지 못하고 악악 소리를 질렀다.

이모는 현명한 인간이 아닌지라 민을 조금 달래다 바로 윽박질러버렸다. 평소처럼 이유없이 고집을 부리는거란 생각을 한 것이다. 옥찌는 옥찌대로 얼르다 안 되겠으니까 이모보고 이모가 좀 잘 해봐라, 그래도 안 되니까 시끄러우니 그만 울라며 동생을 타박했다. 민도 민이었지만 옥찌가 당황해하자 이모는 자신이라도 제대로 훈육해야겠다는 맘이 생겼는데, 그건 후일 돌이켜보건데 그때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다짐이었다.

급기야 이모가 장난감을 버려버린다고 협박하는데까지 이르자, 옥찌는 울먹이며 그건 아빠가 마지막 남은 돈으로 사주신거라고, 그건 아빠가 준거란 말을 했다. 이모는 안다. 아이들 아빠가 얼마 전에 일을 그만뒀고, 그가 앞으로 별다른 계획이 없다는 것을. 이모는 모든걸 다 아는데도 했던 말은 지킨다며 장난감을 버리는 시늉을 하고, 민은 민대로 사정없이 더 거세게 저항하며 울어버렸다.

가까스로 서로 타협점을 찾다 화가 나는 민의 맘을 잘 몰라 다시 뒤엉키다 울음도, 화남도, 실망감도, 애타는 맘까지 잦아들었다. 이건 우는게 아니라 기침이 나오는거라는 아이의 말을 들으며 상황이 끝나갔다.

숨겨놨던 장난감도 주고, 다시 아이들의 관심이 가방으로 쏠릴 즈음, 그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렸을 때 떼쓰기 대장이었던 그 사람이 방금 전의 소요를 간단하게 정리해줬다.

- 정 떼려고 그러네.

우린 그렇게 정이 깊지 않았는걸? 그리고 큰 아이는 안 그러는데.

- 걘 컸잖아. 작은애는 아직 뭘 잘 모르고. 네가 갑자기 떠났으니까 배신감을 느꼈을거야. 그 앙금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네가 다시 돌아오니까 낯선거지.

그런가? 전화를 끊고 민에게 물었다.

- 민, 아까 울었던게 이모랑 있기 싫어서였어?

- 응.

화가 덜 풀린 목소리로 씩씩대며 민이 말했다. 민망하다며 웃었지만 민망하기보다는 미안했다. 살을 부비고 티격태격할때나 이모지, 갑자기 나타나 이모 행세를 하려고 했으니 얼마나 거리감이 느껴졌을까. 그걸 작은 머리로 알 리가 없지.

산타 할아버지 흉내는 그만두고 조잡한 장난감들을 꺼냈다. 우린 옥찌들이 여전히 좋아하는 스티커를 가지고 놀았다. 하나 붙일 때마다 어떠냐고 물어오는 옥찌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동작을 보여주며 멋지단 얘기를 해줬다. 민은 옥찌가 준 멋쟁이 공주에게 예쁜 드레스를 입히고, 옥찌는 귀여운 여자 아이에게 옷을 입히며 이건 이모라고 해줬다. 옥찌의 맘에 어떤 것들이 스치고 다져졌는지 난 모른다. 다른 때 같으면 이건 누구야, 저건 누구야, 제일 예쁜건 이모할래란 말을 애써 갖다 붙이며 내가 어설프게 앙탈을 부렸을텐데 이제는 이 꼬마가 알아서 다 챙겨준다. 참 미안했다. 민도 이제 좀 내가 보였던지 자꾸 고모라고 부르던걸 이모라고 해주고, 그것도 꼭 '큰'자를 붙여 큰이모라고 하는데 왜 좀 더 보듬지 못했을까, 왜 내 성질대로 하려고 했을까, 난 '왜'란 말들 앞에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이들과 같은 공간에서 보송거리는 공기를 들이마시다보면 자꾸 아랫배가 따뜻해진다. 미안함과 다시 또 미안함이 겹쳐진 목소리로 민에게 물었다.

- 민, 아직도 이모랑 같이 있는게 싫어?

민은 아까 말했던걸 기억해내곤 쑥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줬다.

이쁜 녀석,

할머니들이 아이들한테 하듯이

예쁜 사람. 예쁜 사람들이 내 옆에서 쿵쾅대며 나를 들었다 놨다 몸을 부딪쳐오며 신나게 놀고 있다. 신나게, 신나게 놀자, 응? 우리 신나게 놀면서 더 친해지자고! 전처럼 말고, 지금 이렇게 우왕좌왕하면서 이렇게 틈틈히 새어나오는 비밀들을 보듬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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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전화
일디코 폰 퀴르티 지음, 박의춘 옮김 / 북하우스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그렇군요. 하지만 원래 제 이름은 호프만입니다. 닥터 호프만
- 네 그렇군요. 미안합니다. 저는 휩시입니다. 코라 휩시
-네 알고 있어요. 자료에 있어요.
-네 물론이죠. 미안합니다. 저는 에에 어떠세요. 제 말은, 다시 좋아지셨는지요? 물의를 일으켜 정말 미안합니다. 
 닥터 다니엘 호프만이 나를 바라보았다. 절대로 친절한 눈길이 아니었다. 오히려 희안하게 단단해진 직장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내가 계속 생각했던게 뭔지 알아요? 왜 바닷가재를 들고 화장실쪽으로 달려갔어요? 거기 분위기가 당신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아니면 화장실에서 바닷가재를 먹는게 신조인가요?
  맙소사! 그걸 어떻게 설명하란거야! 몇마디 말로.
 나는 죽도록 설명을 했다. 아니 그보다 더 심했다. 제기랄. 그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 어쨌든 나는 그의 성기와 접촉까지 한적이 있으니.
 나는 '버터바른 빵을 가진 청소부', '계급투쟁', '마르크스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서 우물거리며 음미하듯이 천천히 그를 관찰했다.
 푸른 눈에 진한 색깔의 머리다. 그런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손은! 그런 손으로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죄악이다. 몇가닥의 검은 털이 그의 흰 셔츠 칼라 안에서 밖을 빠끔히 내다보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가슴에 털이 나 있다는 증거다. 나는 가슴에 털이난 남자를 좋아한다. 배꼽 부분으로 갈수록 점점 가늘어지다가 그곳에서부터 다시 털이 많은 중요한 부분으로 넓어지는 이 가슴 위의 검은 성을...... 좌우간 그렇다. 
 - 어쨌든 대단히 미안해요.
 나는 내 어지러운 보고를 끝냈다.
 그가 나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건 마치 정신병원에서 후견인에게 자신이 완전히 정상이라는 사실을 해명하려고 노력하는 위험한 정신병자를 바라보며 짓는 웃음과 같았다.
  

  몇가닥의 검을 털이 빠끔히 밖을 내다보다니. 이 구절을 보고서야 정신없이 이어지던 이토록 수다스럽고 사랑스러운 소설의 정체를 눈치채고야 말았다. 작가는 전화를 기다리는 여자 얘기를 할 것처럼 멍석을 깔아놨지만 실은 독자들이 코라 휩시라는 유머 감각있고, 생동감있는 여성을 사랑하게 만드려는 의도를 가졌다. 의도를 알아버렸는데도 책은 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알듯 모를듯 감질맛 나는 닥터 호프만에 대해서도 궁금하고, 앞으로 이 두사람은 첫만남의 오해를 풀고 사랑하게 될까 역시 궁금해졌다. 그러니까 책을 손에 잡는 순간 순식간에 쉼없이 읽어내려갔다는거다. 속독의 반대편에 느림독, 잡다하게 여러권 읽기, 그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읽지 못할 때가 부지기수인 독서 습관에 비춰봤을 때 손에 꼽을만한 몰입이었고, 몰입의 만족감은 컸다. 

 이 책에서 여자들은 대체 왜 전화를 기다리고,(직접하면 되잖아의 반대편에 상대방의 맘에 확신을 갖으려는 맘이 도사리고 있다) 왜 상대와의 첫 섹스 후 그 시기와 분위기, 오간 말들에 대해 분석을 하고, 분석의 와중에도 전화가 안 온다면 슈퍼 컴퓨터에 버금가는 속도로 낱낱히 다시 재분석에 들어가는지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는다. 그저 나와 비슷한 코라를 통해 내가 병적인건 아니었구나 정도의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위안은 아주 훌륭한 소통의 방식인지라 그녀에게서 위안을 받으며 금세 그녀의 행동에 응원을 보내고-그렇다고 먼저 전화하라고 부추기는 맘이 전혀 없는건 아니다.- 대체 이 미스터리한 호프만이란 작자의 말과 행동을 코라와 같이 분석을 하기 시작한다. 

 분석은 분석대로 감정이입의 완벽한 일치를 자아내고, 코라는 코라대로 나처럼 좌충우돌하며 그녀의 사랑 얘기의 첫장을 펼치게 된다. 전화만 오면 되는데가 애초의 갈등을 불러일으켰다면 갈등의 해소, 즉 전화가 온 것으로 책이 끝났느냐, 글쎄 그건 스포일러 전문인 나로서도 쉽게 밝힐 수가 없다. 어떻게 되는걸까,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거야, 소설을 읽으면서 누구나 한번쯤 책장을 움켜쥐고 애가 타는 그 순간을 어떻게 방해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기다린다는 행위가 수동적인가?  굳이 사랑의 단상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기다리는 것 안에 잠재된 가공할만힌 고통과 흥분과 좌절의 정서를 모르는건 아니다. 그렇지만 사람 안에 갇힌 사랑의 에너지는 기다림마저도 황홀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본다. 수동적이란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관계의 양태만으로 섣불리 짐작할 수 없다. 게다가 능동적인 처신으로 코라가 먼저 전화를 했다면 이토록 감질나게 맛있는 소설이 나오지도 않았을 것 아닌가. 능동적인 것만이 수는 아니고, 수동적인 것이 무찌르자 뭐뭐류가 될 수 없는 것은 관계야말로 유동적으로 변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유동적으로 변모하는 코라와 호프만의 관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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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의 발레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김의석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피를 뽑으려다 철분이 부족하니 시금치를 많이 먹고 오란 소리를 들었다. 시금치는 너무 새파래선 겨울에 구해질까 싶어  교보문고에 들렀다. 시금치 말고 철분이 든 음식에는 뭐가 있을까 찾아보자란 생각이었지만 망망대해의 서점에서 영양소를 검색할 마음은 싹 달아나고 말았다. 대신 바닥에 앉아 화집을 들여다보고 스케치를 한다며 부지런히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림 실력이야 뻔하니 몇번 그리다 소재도 창의력도 고갈되고 손은 손대로 아파 눈을 들어 사람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아주 또렷한 그림이 떠올랐다. 

 여자 아이가 열심히 교과서를 쳐다 보고, 남자 아이는 여자 아이의 몸을 조심스럽게 만지는 장면. 그 장면은 에로틱하기보다건강했고, 더군다나 학구적이었다. 무슨 시험을 공부하는 것 같은데 답을 묻던 여자 아이가 콘돔은 꼈냐고 물었던 기억도 났다. 내가 이 책의 구절을 어디서 봤더라. 정혜윤. 아, 발레 그래, 발레. 그 다음은 뭐였더라?

 맘이 급해져 도서 검색대에서 책을 검색해 위치를 확인했다. 에세이 코너로 달려가 정혜윤의 '그들은 한권의 책에서 시작했다'를 펼쳤다. 내가 또렷하게 기억한 이미지는 변영주의 책 이야기에서 발레교습소 얘기가 나오며 인용되었던 구절이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뜬금없는 구절이었지만 언젠가 우리가 인연이 되면 꼭 만나자고 약속해서 따로 메모를 하지 않았던 책. 빅토리아의 발레. 그녀는 내게 어떤 발레 동작을 보여줄까? 어, 그런데 저기 두꺼운 패딩 잠바를 걸쳐입고 건들거리는 녀석은 누구야?  

 성 안토니오의 축일에 대통령은 일반 수감자의 사면을 발표했다. 책은 작은 천사 앙헬이 감옥에서 풀려나며 시작된다. 앙헬은 사면에도 그다지 기뻐하지 않으며 간수에게 이를 갈았고, 간수는 앙헬을 아무도 모르게 죽이라며 무기징역인 마린이란 사람을 붙인다. 그 다음에 나온 인물은 베르가라 그레이. 칠레에서 알아주는 금고털이꾼으로 수감돼, 공범을 끝까지 밝히지 않은 죄로 오랫동안 감옥에 있었다. 그는 나가기만 하면 자기 몫의 돈을 찾아 아내에게 모두 바치고, 집에 들어서는 것 밖에 바라는게 없었지만 그의 아내는 그를 쉽게 용서하지 않을 것 같다. 

  이야기의 첫 얼개를 접하면서 책을 살까말까 고민이 됐다. 두 명의 출소자가 한건을 할 것 같았고, 둘 중에 하나는 왠지 엉킨 실타래의 끝에서 살아나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넋나간 해피엔딩을 좋아하는건 아니지만 내가 만약 주인공을 사랑하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니까. 하지만, 표지가 무척 예뻤고,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지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를 믿기로 했다. 게다가 아직 빅토리아 폰세를 만나지도 않았는걸.  

 앙헬은 빅토리아를 만난다. 여느 연인처럼 그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상투적인 만남이었지만, 청춘에게는 사랑하는 순간의 하루하루가 감동이고 숙명인지라 빈털털이 앙헬은 빅토리아와 그녀의 가난까지도 사랑한다. 그녀가 학업을 포기하려하자 기억력이 비상한 앙헬이 시험 공부를 같이 한다. 발레 레슨비를 내지 못하는 빅토리아와 앙헬을 죽이려는 마린. 공범이었던 친구가 자신의 돈을 날려먹은걸 알고, 마지막으로 한건을 생각하는 베르가라. 그리고, 앙헬이 빅토리아를 위해 준비한 이벤트를 위해 힘이 되어준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들이 얽히면서 소설 읽는 재미를 주는 한편, 앙헬이란 친구가 우리식대로의 '최선을 다하면 성공한다'가 아니라 자기식의 삶의 개척하는 면도 흥미롭게 다가온다. 독재정권이 물러난 칠레 정권의 사회적 분위기가 지금의 한국과 비슷하단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특히나 기사가 아닌 야설을 쓰는 칠레의 신문의 행태는 점잖게 호박씨 까는 누구의 뒷태와 닮았단 생각도 들었다.  

  빅토리아의 발레가 인도 소설 Q&A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건 소설 속 주인공이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란 것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은 길에서 한번쯤 지나쳤을 법한 어둡고 초췌한 인상의 누구지만 어느 순간, 이 사람은 상대방이 자기를 어떻게 봤는지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환하게 웃을 것이다. 주인공은 무채색 풍경의 한 부분이 아니라, 내 옆으로 한발짝 다가온 누군가가 되고,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손을 내민다. 취향 따위는 마린의 개에게 던져주란 말을 내뱉었을 법한 겁없으면서도 한없이 여린 앙헬이 바로 당신에게도 손을 내밀 것이다. 그때는 서슴없이 잡아야한다. 그리고 마지막장을 다 읽을때까지 그 손을 놓지 말길.  

 한탕을 위한 과정은 초라할 정도로 짧게, 그들이 점점 가까워지는 과정은 낯설게, 마지막은 가슴이 아파서 차마 못읽을 정도로 저릿하게.

 제목의 에드워드 호퍼는 아마 책을 읽은 사람만이 앙헬과 나눠가질 수 있는 비밀이 될 것이다. 한창 책읽기에 열을 올리다 공백기가 생겼을 때 나를 북돋아준 한 줄. 앙헬이 한 말이었기에 그 구절이 더 와닿았을거란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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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4 17: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는 녀석이 술이나 한잔 하자며 불러냈다. 시국 걱정과 신자유주의의 해결방안을 고민할리 없는 나는, 선뜻 나가겠다고 했다. 물론 어떤식의 분위기가 될지는 살짝 걱정이 됐다. 오랜만의 술자리인데 실마리도 보이지 않는 고민 퍼레이드가 되지는 않을지, 함께 자리한 누군가로 민망한 상황이 연출되진 않을런지... 에잇, 뭐 별로면 휙 오지.  

 술자리와 집은 가까울수록 좋은 법이다.


  녀석은 친구와 같이 있었다. 친구가 화장실 간 사이 그가 방금 여자친구랑 헤어져서 정신이 피폐해졌다는 정보를 흘린 녀석은 잘해보란 눈짓을 했다. 내가 무슨 잔반처리기도 아니고. 뭐, 요샌 아무나하고 갖다 붙인다. 나이 먹는게 이래서 약간 리들빗! 서러운건지도. 그런가보다 하고선 맥주를 홀짝이는데, 녀석의 친구라는 남자, 좀 수상했다. 혼자 기분이 업되더니 느닷없이 간다고 하는게 아닌가. 아무리 내가 천하의 썰렁한 인재라지만 이건 좀. 조금만 잘 생겼으면 더 있도록 억지를 부려봤을텐데, 나도 모르게 막 가라고 부추기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태는 참 아담하고 귀엽다던 소견은 붙이게 되고.
 

 녀석의 친구가 가고 녀석과 나는 좀 더 조용한 자리로 이동했다. 시답잖은 얘기만 하다가 여자 친구 만들고 싶네 어쩌네 해서 얼마나 굶었는지 물었다. 그리곤 시작되는 섹슈얼한 이야기라고 지칭되는 질펀한 이야기들. 이 녀석이 평소에도 제법 말을 웃기게 하는데 야한 얘기엔 물만난 고기처럼 신이나서 어찌나 방방 뛰어대던지. 하마터면 웃겨서 틀니 빠질뻔했다.
 

 그 중에서 재미있었던 얘기를 하나 옮기자면,
 노상방뇨 얘기가 나왔었는데,
 어느 날, 애인이랑 즐겁게 술을 마시고 모텔에 가려고 길을 걷는데 여자가 갑자기 요의를 호소했단다. 늦은 시간이고, 화장실 문을 다 닫아놓는지라 들릴 곳이 마땅치 않았단다. 그래서 자기가 망을 봐주고 여자는 골목으로 들어가 야심찬 노상방뇨를 하려고 했단다. 잠시 후 야심한 밤의 정적을 홀딱 깨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녀석이 표현하기론 아스팔트가 깨지는줄 알았단다. 평소에 이미지 관리에 능했던 그녀인지라 충격이 컸고, 그 다음부터는 더 이상의 내외 없이 모든 소리를 서라운드로 탐닉했단 뭐 그런 얘기.
 

 그렇게 깔깔대며 놈의 재치에 나의 맞장구까지 덧붙여 시간가는줄 몰랐는데 녀석이 계속 머리가 아프네 속이 울렁거리네라며 한마디씩 해댔다. 그 통에 이제는 우리가 집으로 가서 발닦고 잘 시간이란걸 알게 되었다.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서 택시를 잡았다. 어서 타라는 손짓을 보냈는데 좀 있다가 간단다. 지금 택시를 타면 속이 안 좋아 세차비 물어줘야한다나 뭐라나. 별로 먹지도 않은 주제에 엄살은!
 

 그래, 겨울날씨치곤 포근해 우리는 좀 걸었다. 그 밤에 목적지도 없고, 괜히 공원을 돌다 형님들한테 쥐어터질지도 몰라 큰길가를 끼고 어영부영 밤거리를 헤맸다. 그래서 이제 괜찮으면 들어가라고 했더니


 녀석은 뜬금없이
-야, 자러 가자.
 이러는거다. 무슨 잘만한 분위기도 아니고, 평소에 호감을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녀석 말대로 쿨하게(이거 정말 웃겨!) 할만한 자질이 되는 것도 아닌데, 이 무슨 뜬금없는 발언?

 

 아휴, 애들 앞에선 숭늉도 못먹는다는 말이 정말 딱 맞다. 그러는 넌 어른이고?  

 그러게 말이다.  (머리통에 물을 주며) 얼른 얘가 자라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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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색 비닐 잠바에 가장자리에 털이 달린 모자를 뒤집어쓴 여자와 잿빛 외투에 정체불명의 요란한 목도리를 두른 여자가 해물떡찜을 세상에서 제일 맛있게 한다는 집에 나란히 앉아 있다. 다른 테이블에서 광고의 한 장면처럼 북적대며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두 여자는 아무 말이 없다.

목도리녀가 힘겹게 한마디를 꺼낸다.

-핸드폰은 왜 그러냐.

-술 처먹다 잃어버렸어요.

- ......

음식도 안 나오고, 읽을만한 것도 없어 둘은 이 음식점이 얼마나 방송매체에 많이 나왔었는지를 보여주는 선전물을 한자도 놓치면 안 될 기세로 읽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일주일동안 뭘 먹고 다녔고, 어디서 잤으며, 잘 때는 뭘 입고 잤는지를 빼곡이 보여주는 흰 패딩에 염소수염을 기른 남자가 그들의 맞은편에 앉았다.

- 시켰어?

- 네

셋은 다시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이럴 때는 직장인용 겉도는 얘기 실용 교본이라도 출판되어야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문득, 셋 중 하나는 예리한 감각으로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음식은 맵거나 달았다. 맛있는 해물 중에 굳이 맛이 살짝 간 오징어를 짚어내며 아쉽다면서 고사를 지내는 흰 패딩과 쿨피스를 먹어야는데 아무도 시키지 않자 조바심을 치는 목도리, 이게 웬 진수성찬이냐며 허겁지겁 먹는 털모자. 흰 패딩은 털모자와 목도리에게 연장자다운 위엄으로 게의 도톰한 살을 하사했고, 털모자는 그건 많이 먹었다며 안 먹겠다고 하고, 목도리는 그래도 준거니까 먹으라는 문제로 아주 잠깐 눈 부라림이 있었지만 그리 길지는 않았다.

지금은, 먹는 중이니까.

더치페이라는 합리적이나 살짝 어색한 방법을 놔두고 목도리가 계산을 했다. 털모자가 한번, 흰 패딩이 세 번 돈을 권했으나 목도리는 거절했다. 털모자는 돈을 주려고 할 때 목도리에게 무심코 팔짱을 끼었다가 그 추운 날 얼굴이 벌개질 정도로 민망해지고 말았다. 흰 패딩은 주차 문제로 두서없이 전화를 걸어대기 시작했고, 목도리는 어디 구석에 박혀 담배를 피웠다.

길이 막혀 무려 40분이나 차 안에 갇혀 발을 동동 굴리다 결국 먹게 된 해물떡찜. 셋 중의 하나는 분명 맛의 비밀 어쩌고는 조미료 맛 때문일거야라며 거길 가자고 드러누웠던 목도리를 의심했을 것이다. 목도리는 맛과 상관없이 매운 맛이 땡겼을 뿐이라고 덧붙일테지만.


흰, 목, 털은 돌아오는 길에도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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