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타지 않는다. 농로와 옛길을 걸을 뿐이다. 헌데 모두들 화려한 등산복 차림이다. 모두들 입을 맞추어 등산복을 입고 나오기로 했나보다. 스웨터에 청바지 차림인 내가 겸연쩍어졌다. 내 옷차림이 거슬렸다면 시간을 내서 등산복을 사러 매장을 기웃거려야겠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등산화를 신는다고 더 잘 걸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등산복의 높은 가격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혹은 높은 가격에 비례하는 만족감을 느낄 수 없을까봐 걱정이 됐다. 옷가격은 이만큼이나 하는데 내가 생각한 범위를 벗어난 가격에 신경쓰느라 사놓고 후회하면 어쩌나.
이렇게 살기로 했으면 좀 더 쿨하거나 대범하게 '화려한 등산복'을 무시해야 한다. 하지만 그게 되나. 살 수 없는 걸 두고 사지 않기로 했다며 자기기만을 저지르며 애써 모른척 할 뿐.

등산복아, 기다려!
요즘 왠지 미운 사람이 생겨 틈만 나면 사람들 앞에서 그 사람 얘기를 한다. 자칭 날 아끼는 분께서 자꾸 내 말을 막지 않았다면 말 속에서 말이 됐을거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사람 앞에서 미운 맘 때문에 얼굴을 찌푸리거나 나도 모르게 격한 반응이 나오면 곤란하겠단 판단이 들었다. 곤란한 건 여태 살아오면서 저지른 과오로 충분했다. 해서 '나는 너에게 아무 감정 없다. 너는 내게 의미가 없다. 너는 나를 기분 나쁠만한 존재도 되지 못한다'란 자기기만을 하고 있다.
자기기만의 순기능일까. 일정 정도 효과가 있다. 그 사람이 싫은 얘기를 하고 나를 짖누르려고 자기가 갖고 있는 교활한 에너지를 포장해서 뻔뻔하게 굴어도 그런갑다 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이 힘은 내가 만들어낸 건 아니다.
그 사람과 한판 붙었다기보다는 어이없게 당하고 나면 자기 일도 바쁜데 한잔 하면서 풀자고 하는 직장 언니와 가끔 흐린 날도 있지만 다음 날은 맑을거라고 해주는 동료와 이동하면서 나보다 더 열을 내며 그 사람을 씹어주는, 평소 때는 이런 모습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어른'이 있으니까. 이런 자기기만쯤은.
그러고보니 등산복도 크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뭐든 좀 심각해지는 경향이라 그런 거라고, 옷의 기능이 아니라 '남들처럼'이 목적이라면 좀 더 저렴한걸 사도 된다고, 차려입은 듯한 등산복엔 취미없다는 식의 자기기만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게 될까. 기웃거리기만 한 게 아니라 굳이 들어가 살짝 다리를 넣어본 등산 바지는 입을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가볍고 편했다. 등산화는 튼실해서 자갈밭에서도 끄떡없이 발목을 보호해줄 것만 같았다.
자기기만으로도 어찌해볼 수 없어 길을 걷지 말아야하나까지 고민중이란건 아니고 그냥 이런 소재로도 글까지 쓰는 나도 참, 싶다.
자기만족이란 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