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담하는 말들을 믿을 수 없다. 특히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보면 희안할 정도로 자신의 말과 반대되는 행동을 한다. '사람들의 나이를 묻지 않는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겠다) 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물음에 앞서 제일 먼저 내 직업을 물었다. '소속과 연고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사람은 다른식으로 자신이 진보 계통 사람들과 잘 안다는, 궁금하지 않은 인연을 시시콜콜하게 늘어놓는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꼰대처럼 자신이 믿는 바를 강요하는 사람은 되지 말자(이건 나다)던 사람은 누군가의 고민만 나오면 그렇게 자기 얘기를 늘어놓으며 뭔가를 들려주고 싶어한다.

 

 따라서 내가 여기 서재에서 좀 모자르고 정리 안 되는 듯 구는 것에 속지 말아야 한다. 혹시 아는가. 진짜 그럴지.

 

* 골목길에서 술 취한 남자들이 물건 뽑기 기계를 흔들어대고 있다. 정말 저게 되는걸까. 술 취한 사람들한테 돈을 갈취하는 못된 기계를 저 남자들이 전복? 아니아니, 무찌를 수 있을까. 오, 된다, 된다. 무전기를 뽑고 소형 라이트를 떨어뜨린다. 기계를 설치한 사람의 사적 재산은 어쩌란 말인가. 퇴직금을 쏟아부어 기계를 설치한거라면?

 

이럴 때, '정의란 무엇인가'란 물음을 할 수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난 그저 취한 아치라 언젠가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 정도만 하고 말았다.

 

* 입이 까슬거려서 편의점에 들렀다. 요즘 아이스크림은 모두 달아서 먹기 싫었는데 오랜만에 보이는 더블 비안코의 샤베트가 먹고 싶어졌다. 불가리스와 더블 비안코를 들고 계산대에 들어갔다. 내가 들어올 때 서로 인사를 했던 알바생이 물건의 바코드를 찍으려고 준비하고 있다. 통신사 카드가 있다며 밧데리가 나간 핸드폰을 켜려고 지체했다.

 

 여기 한명의 아르바이트생이 있다. 그녀는 늦은 시간까지 사람들이 고른 물건의 바코드를 찍고 포인트 카드가 있냐고 물을 것이다. 재고 조사를 하고 무료하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친구들과 카톡을 할지 모르겠다. 밤에 등장한 낯선 여자는 할인을 받으려고 낑낑대고 있다. 군데군데 헤진 가방을 뒤지며 낫-스마트폰을 기어이 켠다. 한참동안 찾더니 멤버십 카드를 내민다. 다행히 나는 이 바코드를 어떤 메뉴에 입력해야하는지 안다.

 

* 좀 쫄았다. 서울에서 화려한 경력을 갖고 내려온 분이 시설에 대해 묻는다. 나는 딱히 할말도 없고 뭐가 안 돼요, 이건 없어요 하면서 지방과 수도권의 격차를 두고 탄식에 빠지는 대신 그 순간이 얼른 지나가길 바랐다. 그분이 가고 팀장님께 이랬어요 저랬어요 하는데 팀장님 왈,

 

 그럼 서울가서 하지 그런대.

 

 무식하면 용감하다? 아니, 자신의 현재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욤감해질 수 있다. 그 사람이 유별난만큼 나 역시 너무 저자세였다. 혹은 이런 곳에 있지만 노력하는 나를 알아봐달라는 신데렐라 돋는 짓을 한건지도. 그 사람이 인정하든 안 하든 내식대로 일할거면서 말이다.

 

* 일하는 곳에서 김미경이 강연을 했다. 그녀를 비판하는 소리에 익숙해 딴 짓을 하면서 강연을 들었다. 그녀는 화면에서보다 키가 크고 날씬했다. 성공보다는 성숙, 과거를 내게 힘이 되는 방식으로 구성하기(이건 인생학교에서도 나온 얘기), 처음 보는 점쟁이에게 내 얘기를 묻는 대신 자신의 맘을 들여다보기, 내가 특허내려고 했던 항상성 원리(뭐가 하나 잘 되면 다른 하나가 안 된다.) 등등. 귀담아 들을 내용도 있었다. 간간히 웃긴 얘기를 했지만 별로 웃기지 않았고 인터넷에서 떠돌던 영상처럼 무턱대고 자기 주장만 하지 않았다. 사업주를 위해 사람들을 열정 노동자로 만든다는 비판을 인용했으나 그 틀을 벗어나진 못했다. 20년 경력의 강연자답게 청중들을 쥐락펴락하면서 2시간 남짓 신나게 강연을 했다.

 

 김미경은 여자들의 얌체같은 면을 얘기하며 '언니의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가만히 들어보면 설득력이 있다. 낸시랭처럼 여자들은 자신을 꾸미는 비용이 많이 드니까 데이트 비용은 남자들이 내야한다는 주장을 하기엔 공정하지 않은 느낌이 든다. 난 꾸미지 않는 여성이고 어차피 남자나 여자나 주머니 사정은 뻔할테니 말이다. 그래서 설득력은 있지만 뭔가 개운치 않은 그녀의 주장을 이런식으로 반박해왔다. 남자들보다 적은 월급, 결혼해서 동원되는 시댁 경조사, 아이를 재생산. 혹은 생물학적으로 여자는 아이를 낳기 때문에 안정된 남자를 원한다? 이것도 아닌 것 같고.

 

 SNL에 나온 컬투는 된장녀를 욕하며 된장녀 역할을 한 여장 김태균의 얼굴에 된장을 칠한다. 별로였다. 된장녀가 된장녀인 것은 여성들의 허영심뿐 아니라 나이 많고 돈 많은 사람들의 욕망도 들어있기 때문이다. 돈으로 젊은 여성의 몸을 탐하는거나 명품백을 갖고 싶어하는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런데 왜 된장녀만 욕을 얻어먹는걸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몸보다 돈이 더 가치있기 때문일까. 발렌타인데이에는 쵸콜릿, 화이트데이에는 명품백이라고 하면서 여자를 욕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안 사주면 되지 않을까? 남자친구 입장에서 맘이 편치 않으니 여자들을 싸그리 욕한다는데 나는 명품백이 없으니 그 혐의에서 벗어나는걸까. 나는 인습적인 인간이라 알게 모르게 확고한 양성평등은 한 것 같지 않은데 말이다.

 

* 오월부터 다른 곳에서 다른 마음가짐으로 일을 시작한다.  옮길까 말까 고민이 많았는데 결혼은 아니지만 해보고 후회하자 싶었다. 나는 딱 군산 같은 규모의 도시가 편한데 지금 사는 곳은 너무 과밀했고 옮기는 곳은 좀 휑할 것 같다. 당분간 자동차 대신 자전거로 움직이며 마음을 좀 더 다잡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러고 보면 이 일을 시작하면서도 잘하고 싶다고 각오가 엄청 대단했는데 제대로 못해내고 막판에 가서 하는 시늉을 한걸 돌이켜보니 대단한 각오는 아직 꺼내놓지 말아야겠다. 대신 느긋하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같이 살랑살랑 시작할 참이다.

 

 

 

 

 

 

 

 

 

 

 

 

 

분홍발 멍멍이.

나 좋으라고 쓴 페이퍼, '좋은 글을 쓰자' 했건만.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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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3-04-12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꽃만나러 가는 바람에서 나는 왜 연꽃막걸리를 떠올리는가????

Arch 2013-04-12 21:14   좋아요 0 | URL
보성에 있는 대원사 가는 길에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이란 술집이 있어요. 그런거에요?

숲노래 2013-04-12 0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흥에서 살아가는 저로서는 군산만 해도... @.@ 시끌시끌 눈이 돌아가요.

스스로 좋은 마음 품으며 지내면, 글이야 어떻게 쓰건
다 좋은 글이라고 느껴요.

지난 닷새 동안 봄바람이 좀 모질다 싶게 불어
자전거 타며 뼈마디 욱씬욱씬 쑤셨는데
이제 좀 봄바람답게 따스하고 포근히 불기를 빌어요.

Arch 2013-04-12 21:19   좋아요 0 | URL
각자 맞춤하는 밀도가 있는 것 같아요. 요즘 생각해낸 제 밀도론입니다.
좋은 마음 품어도 좋은 글이 안 나오더라구요. 잘 모르면서 가르치려는 글만 나올 때도 있고.
바람이 너무 많이 불 때 자전거는 안 좋아요. 슝 날아갈 것 같아요.
곧, 봄이 오겠죠

치니 2013-04-12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 저 구슬픈 눈매의 강아지는 누규? 아치 님이 키우시는 거에요? 으아아, 무장해제 됩니다.

김미경 씨는, 저는 감당할 수 없는 타입이던데, 아치 님은 은근 강단 있으신가 봐요. 저는 티비에서 딱 1분 보고 괴로워서 채널 돌림. 뭔가를 너무 열심히 전달하는 사람에 대한 알레르기가 너무 심해요.(그리고, 친언니 아닌데 자신을 언니라고 지칭하는 사람이 너무 시러요.ㅠㅠ) 그러면서 저 자신, 제대로 하는 거 하나도 없는데. 쩝. 언제쯤이면 이렇게 말도 안되는 고집을 부리며 사는 철없는 미성숙형 인간에서 벗어날런지.

그나저나, 연꽃 만나러 살살 ~ 와, 좋습니다. 가셔서 즐거운 일이 많기를!

Arch 2013-04-12 21:24   좋아요 0 | URL
전통주 시간에 놀러온 강아지예요. 태어난지 한달도 안 됐는데 엄마 품 떠나서 다른 사람한테 가야한대니까 풀이 죽었어요. 저희 집 강아지는 항상 팔팔해서 ^^

치니님뿐 아니라 서재에 있는 분들은 김미경씨 안 좋아할 것 같아요. 저도 그랬거든요. 그런데 나이 먹은만큼 자꾸 고민하고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모습, 태도, 뉘앙스(이건 아닌 것 같지만)를 느끼면 살짝 감동되기도 해요. 주위에 관습적인 어른만 봐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저는 20대에 인생 고민 끝내고 안정적으로 살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성숙한 인간은 없나봐요. 성숙하고 싶은 사람만 있지. 요새 인생학교를 보면서 나만 새로운 일 하면서 겁내는게 아니구나, 나만 자신없는게 아니구나 이런거 느끼니까 안심되더라구요.

치니님도 항상 즐겁길 바랍니다. 이글루스 못됐으니까 서재에 글 많이 쓰셔요 ^^

2013-04-13 1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17 0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