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그림자처럼 지내고 있다. 자기 일만 하는게 아니라 같이 어울리는 것도 일의 한 부분이건만 그 노릇을 안 하니 있는 듯 없는 듯 할 수 밖에 없다. 항상 낯선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다며 여행을 꿈꿨었다. 학교 졸업하면 안 올줄 알았던 모두와 어색해요 상황. 어른이 되고서 찾아온 낯선 상황에서 나는 수동적으로 전전긍긍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너희들과 친해지겠어, 의례적으로 잘 지내보겠어란 제스처도 없다. 내 책임이다. 커다란 벽이 있다면 하얀 분필로 '다 내 잘못이야'라고 쓰고 싶다. 나와 등을 진 사람이 호들갑을 떨며 사람들을 불러모을 때 콧방귀를 꼈고 얼마 안 가 서로 소원해질거란 잘못된 예상을 했다. 나와 등을 진 사람과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이 조직을 견딜 수 없어하기만 했던, 견딜 수 없지만 조직에 속해야한다면 참을만한 수준으로 만들 노력을 하지 않았던 내 잘못이 더 크다.


 그래서 페이퍼를 쓸 수 없었다. (그래서 페이퍼를 쓸 수 없었다 시리즈라도?) 책을 꾸준히 읽고 일기도 가끔 쓰는데 페이퍼를 쓸 수는 없었다.  실제로는 물론 추상적으로도 행복하지 않았고 쌓인 감정들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게 늘 우악스러워서 내가 쓰는 글에도 자신이 없었다. 그저 끄적이는걸 두고 자신 운운에 살짝 민망하기도 하지만 좀 그랬다. 


 그들과는 애매하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그럭저럭 잘 지내는 것 같다. 거의 아빠뻘 되는 아저씨들은 나의 고지식함을 '바르고 똑소리남'으로 받아준다. 그게 문득문득 고마울 때가 있다. 격 없이 구는 것도 귀엽거나 순수하게 받아들인다. 예의바른 행동이 아니면 어떡하지, 이런 말을 꺼냈다고 나를 미워하면 어떡하지 고민하고 있는데 너무 생각하지 말고 그냥 말하는게 더 좋다고 얘기해주는 어른도 있다. 자식 이야기에 돈 버는 이야기 하다가도 딸뻘 되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겠다고 투정을 부리면 당신 살아온 얘기를 한다. 어, 그건 내 얘기랑 상관 없다고 생각하다가 위로가 너무 흔해서 위로 받았다는 말은 순도가 부족하지만 그래도 그 말에 위로받는다.


 나는 아저씨들이 얘기할 때마다 '우린 형님 세대랑 달라요', '자기계발 책에서 다 나온 말이에요.' 라고 저항을 한다.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라고 하는데 사회적 안전망이 안 되어있는데 그렇게 살 필요가 없다고 건방을 떨기도 했다. 책에서 읽은 얘기를 앵무새처럼 읊으며 나의 게으름을 변명한다. 하지만 그 모든 얘기가 '하면 된다'에서 나온 게 아니란걸 어렴풋이 느낀다. 개인을 벼랑 끝으로 밀어놓고 '하면 된다'라고 세뇌시킬 땐 자기계발 피로가 더해지지만 내가 할 수 있는한 힘껏 하지 않는 사람은, 그래서 더더욱 자책하는 사람한테는 때론 '하면 된다'가 지금을 이겨내는 주문이 될 수도 있으니까.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다시마와 멸치, 아몬드를 같이 먹으면 묘한 맛이 난다. 이 조합을 권해준건 직장내 다른 부서의 어른이었다. 몸에 좋은 것만 드시는 것 같아 맛없지 않냐고, 생다시마까진 좀 그렇다고 했는데 한입 먹는 순간 나도 반하고 말았다. 다시마의 질긴 감촉이 입에서 흐물해지는 동안 짭짤한 멸치를 씹는다. 둘의 짜고 강한 맛을 아몬드의 텁텁함이 쓱 잡아주면 아, 이거는 어른만이 아는 맛이구나 싶어진다. 이건 이래서 힘들고 이건 저래서 고달프다고 징징거려도 웃으면서 받아준다. 그리고 나를 비난하거나 평가하는 대신 질문을 던진다. 어쩌면 나는 지금을 견딜 수 없어서 자꾸 핑계를 대고 이유를 찾고 의미를 갖는다며 회피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 너무 심각해.


 어제는 그 분의 지도(?) 아래 15일 동안 전기밥솥에 보온으로 숙성시킨 마늘을 깠다. 바로 꺼낸 마늘은 따뜻하고 촉촉했다. 혹시 그 마늘을 먹어본 사람이 있을까. 다시마와 멸치, 아몬드 조합보다 더 맛있다. 젤리처럼 촉촉한데 알싸한 마늘향이 나고 뒤끝이 흔적없이 옅게 아린 마늘 말이다. 좋은거 먹고 고민 대신 생각만 하고 누구 미워하지 않으면서 살면 좋겠다. 그냥 살면서 천천히 알아가면 되는데 재미없게 늘 심각하다. 어떨땐 내용도 없다. 그냥 살았다고 말한 누구는 요즘 외롭다고 온갖 곳에 푸념을 하고 다닌다. 그걸 보면 또 그냥 살면 안 될 것 같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십오 초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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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9-21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rch님 하얀 분필로 다 내잘못이야 하고 쓰신다면 제가 슬쩍 다가가서 흔적없이 싹싹 지우고 싶은데요....왠지 막 그러고 싶어요...(' ');;;;

Arch 2012-09-24 11:10   좋아요 0 | URL
아른님, 너무 감동적이에요. 감동적이란 말이 식상하고 쓸데없고 빈번하다는거 정말 잘 알지만, 그렇네요.

Forgettable. 2012-09-21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싱크로율 백프로 직장생활인데요?? 만나야겠음ㅋㅋㅋㅋㅋㅋ

Arch 2012-09-24 11:13   좋아요 0 | URL
말만~ ㅋㅋ
뽀는 잘 하고 있을 것 같은데... 조만간 꼭 봐요

맥거핀 2012-09-22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에 들으니 좋네요. 좋은 주말 보내세요.^^

Arch 2012-09-24 11:14   좋아요 0 | URL
좋아요, 좋아... 저는 아침에 듣는데도 참 좋네요.
맥거핀님 고맙습니다.

2012-10-24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24 17:0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