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연극이랑 음악회, 극장에 다니는 커뮤니티에 가입해서 활동한적이 있다. 의기투합해서 서로 뭉치긴 했지만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할지 알 수 없어 분위기는 서먹하기만 했다. 다행히 영화를 보고 옮긴 자리의 흑맥주는 아주 맛있었다. 연신 맥주를 마시고 주절주절 떠들다보니 어느새 언니 동생하면서 찧고 까불게 되었다. 만화를 그리는 동생도 있었고, 인터넷 웹디자인을 하는 동생도 있었다. 그렇다. 이제 이런데 나가면 '나는 언니다.'
한참을 놀고 있는데 만화를 그린다는 친구가 인물화를 그려서 당사자에게 주는 장면을 포착했다. 상당히 미화되긴 했지만 쓱쓱 그려서 주는 그림이라니. '나도 갖고 싶다, 나도 그려줘요, 나도 나도'란 말은 초면이라 차마 대놓고 하지 못하고 괜히 표정관리만 하고 앉았었다. 혹시 나를 그리는데 못나보이고 싶지 않은 술 취한 사람의 발악 같은거? 어차피 얼굴은 벌겋고 음악 소리가 크다며 소리를 지르느라 목청 돋고, 사소한 얘기에도 뒤로 넘어갈 것처럼 웃어제끼느라 표정 관리가 될 턱이 없는데도 말이다.
두번째 맥주잔을 다 비울 즈음 그 친구는 그리던 그림을 내게 내밀었다. 그 속에 이가 하얀 아치가 있었다. 내 얼굴을 그린 그림을 받은건 처음이었다. 너무 고맙고 진심으로 기쁜데 전할 방법을 찾지 못해 그 친구에게 무슨 만화책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몇개의 만화책 제목이 나왔다. 토끼 드롭스? 토끼 드롭스. 육아에 관한 만화라길래 메모해놓았다. 학생이라 만화책 살 형편은 아니란 말은 기억 기억. 그래놓고 잊어버렸는데 어찌어찌 쿵짝쿵짝 이찌이찌해서 그 만화책을 얻게 되었다. 만화책 몇권 정도는 부담 느끼지 않고 살만큼 형편이 나아진 아치? 는 아니고 어쩌다 떠맡게 된 것.
라디오 프로에서 받은 홍삼치킨(작명센스 건강 돋네) 쿠폰과 토끼 드롭스를 들고 그 친구 학교에 갔다. 날씨가 살짝 추웠다. 우린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날도 추우니 얼른 들어가서 더 좋은 그림 그리라며 그 친구와 헤어졌다. 그 친구, 꽃남이었다면 언니 가슴 살짝 콩닥였겠지만 수수한 여학생이었다. 나는 수수한 언닌데.
그 친구가 그려준 그림은 빳빳하게 코팅해서 내 방 제일 좋은 자리에 세워놨다. 가끔씩 들여다보면 맥주 먹고 기분이 업돼서 볼이 발그레한 아치가 보인다.
토끼 드롭스에서 제일 좋았던 컷

프레이야님의 '첫문장을 주세요'에 도전!(도전은 좀 그렇지?)하고 싶지만 소설 아닌 책만 읽고 있는 지금으로선 괜찮은 첫 문장을 골라내기가 어렵네요. 만치님 페이퍼 보다가 이 책이 떠올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