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먹은 누룽지로는 부족했을까. 조이 듯이 배가 고팠다. 당면 국수랑 삼각 김밥을 먹으러 근처 편의점에 갔다. 라면을 그만 먹어야는데 맨날 컵라면으로 때우니까 요새 몸에 두드러기가 나는건 아닐까, 요새 가슴이 아프던데 라면 때문은 아닐까 등등의 건강 걱정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왜 참치마요네즈가 없을까란 생각도 곁들여서 하고 있는데 왠 입김이 훅하고 귓가에 느껴졌다. 뭔가하고 옆을 봤는데 아침 10시에 취해 있는 분홍 셔츠의 사내가 보였다. 술이 취해서 균형을 못잡나.

 계산을 하려고 돈이랑 멤버십 카드를 내밀었는데 분홍 셔츠는 자기도 멤버십 혜택 없냐며 백화점 카드를 알바생에게 건네준다. 이달의 우수 점원으로 뽑혀 건성으로 일 하지 않고 더 열심히 하겠다는 소감까지 발표한 알바생은 왜 그 카드가 안 되는지 설명을 해준다. 분홍 셔츠는 그 말을 알아듣고 그랬다기보다는 그냥 좀 더 비틀거리고 싶었는지 계산대를 떠나 국수 물을 받고 있는 나를 툭 치고 지나쳤다. 작작 좀 하지.

 전자렌지에서 삼각김밥을 꺼내 포장지를 벗기려고 하는데 다시 한번 훅, 남자의 입김이 와닿았다. 이건 술이 취해서 몸의 균형을 못잡은거나 실수한게 아니었다.

 지금 뭐하는거에요. 몇번씩이나. 왜 내 근처에서 얼쩡거리는거야.

 나도 깜짝 놀랄만한 크기로 소리를 질렀다. 남자는 입 주위에 질질 흘린 우유를 손등으로 닦아내고선 두리번거리다 이내 나갔다. 마치 내가 유령과 대화하는 미친 여자라도 되는 듯이 나를 지나쳐서. 

 나는 왜 별 것도 아닌 일에 큰소리를 냈을까나 알바생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그 남자가 좀 무안하지 않았을까, 술 먹어서 그런건데 내가 좀 과했나란 생각은 절대로 들지 않았다. 나는 오늘의 작은 승리에 기뻐했다. 나는 오늘 단지 생물학적인 성이 여성이란 이유로 당한 희롱과 폭력적인 시선을 처음으로 거부했다. 내가 원하는게 뭔지, 내가 지금 상대방 때문에 얼마나 불쾌한지 처음으로 대놓고 말했다. 그동안 착하지도 않은 주제에 착한척 아니 방어적이고 굴종적인 태도를 보이고선 얼마나 후회했던가. 후회의 더께가 많이 해소된건 아니지만 수줍게 자신감이 피어났다. 피하지 말고 직접 말하기. 누군가 이 상황을 정리해주거나 '객관적으로' 보고선 중재해주기를 기다리지 않기.

 이런 느낌이 좀 과하다는걸 안다. 하지만 이 나이 먹도록 그런 순간에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이 느낌이 과한 것 만은 아닌 것 같다. 지하철에서 성기를 엉덩이 주변에 대고 문대던 녀석, 데이트 핑계로 옷춤에 손을 집어넣어 가슴을 만지려 했던 놈, 강제로 키스를 하고, 힘을 써서 자신이 남자인지 보여주려고 애를 썼던 사람. 그들 앞에서 욕을 하거나 때려주는 대신 조용히 그 상황을 합리화하면서 아무 소용없는, 다시는 그런 일이 안 생길거라고 나를 위로했던 일은 이제 안녕. 

 모든 장담이 그렇듯 내가 모든 순간에 능수능란하게 대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오늘 같은 경우는 텀이 있어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고 상대가 별거 아니란 심리적 우위도 있었으니까. 만약 다른 경우라면 어떻게 될지, 또 같은식으로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오늘은 그저 이 날의 기쁨을 남기고 싶어 이렇게 페이퍼를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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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1-05-07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혀 과한 느낌이 아니에요. 저라면 역시 무서워서 슬슬 피하고 나중에 짜증만 냈을 거 같아요. 짝짝짝, 아치님. :)

Arch 2011-05-08 09:21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치니님. 사람이 별로 없어서 좀 더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붐비는 지하철이나 버스에선 엄두도 못냈을거에요. 그렇지만 앞으론 여러번 생각하는 대신 확 질러버리려구요.

다락방 2011-05-08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져요, 아치님. 정말 잘했어요. 나 역시 아무런 말도 못했을 거에요. 아치는 정말 용감한 여자에요!!

Arch 2011-05-12 09:16   좋아요 0 | URL
저는 그때만 '용감했던 여자'예요. 한번 해보니까 이제는 덤벼만 봐라, 이렇게 자신만만해졌지만 앞으로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nada 2011-05-08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한 문장, 한 문장이, 절절하게 공감되어요.
아치님이 느꼈을 그 기쁨, 충분히 이해되고 저도 기뻐요.
축하해요!

Arch 2011-05-12 09:17   좋아요 0 | URL
꽃양배추님 고마워요. 좀 뻘쭘하지만.
같이 기뻐하고 축하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에디 2011-05-08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도 치니님처럼 저어어어어어언혀 과하지 않아요. 고! 아치! 고!

Arch 2011-05-12 09:17   좋아요 0 | URL
히~ 에디님 어디로 가라는거에요. 벽 뚫고 막 가? ^^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