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가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다고 했다. 우린 아주 당당하게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당당까지 했던건 둘의 수중에 동전 열개가 다였기 때문이다. 가게를 나오자마자 아이스크림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땀은 나고, 몸은 끈적거리고 탈지분유 많이 섞인 아이스크림을 먹기에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다행히 저녁 바람은 선선해서 걸을만 했다.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에 손이 찐덕거려서 그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 괜찮아요. 아까망시-이건 무슨 말이지?- 다 빨아먹었거든요.

 오늘 본 신문에선-오랜만에 신문 좀 봤나보다- 책을 통해 위로의 기술을 알려주는 이다혜가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동안 이런 저런 사람들의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찰떡같이 믿으면서도 내심 미심쩍었다. 내가 아는 사람이 저런 친구랑? 왠지 서로 어쩔 수 없이 만나는 것 같은데, 왜 하필 저런 친구? 뭐 이런 조합이 꽤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친구란 생각날때면 볼 수 있는 거리, 왠만해선 넘어갈줄 아는 무덤덤함, 너무 깊거나 얕지 않은 관심 정도를 지닌 사람들의 조합이란 얘긴데 난 그 말이 꽤 맘에 와닿았다.

 취향이 잘 맞고, 서로의 인생과 삶의 지향점이 꽤 일치하는 사람. 쿵짝이 잘 맞아서 내 속에 있는걸 쏙 빼닮은 것처럼 친숙한 사람, 아니면 감동적인 뭔가를 공유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추억 한 조각이라도 나눠갖은 사람만 친구가 될 수 있는게 아니라니. 

 왠지 아이스크림 다 빨아먹어서 안 흘린 그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 지난 누구누구 제사 때 아비와 딸년은 서로 술을 먹고 차를 안 몰겠다며 티격태격 싸웠다. 맨날 나만 대리 운전 하냐, 아빠 위도 쉬어야 한다. 어림도 없다, 네가 나 골탕 먹이려고 잘 먹지도 않는 술을 괜히 먹겠다고 고집피운다. 뭐 이런 상황. 한참 티격태격 하다가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란 생각에 둘 다 정신없이 술을 빨아들이는 중이었다. 딸년은 잔이 비었길래 맥주를 찾다가 엄마 옆에 있는게 보여서 달라고 했다. 엄마는 갑자기, 아닌 밤중에 박새도 아닌데 '빽'하고 -박새가 어떤 소리를 내는지 나는 몰라요- 소리를 지르는거다.
 
 딸년은 순간 눈물이 앞을 가리고, 내가 뭐하러 술을 먹겠다고 했나, 내가 이 나이 먹고 노인들과 싸우고 있나에서부터 시작해서 직장은 언제 다니나, 옥찌들은 제대로 자랄 수 있을까, B의 피부는 언제 낫나 등등 오만가지 생각과 걱정들이 뭉태기로 덤벼들었다. 딸년은 고개를 팍 숙이고 가만히 있다가 옆방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그러다 요행히 그즈음 근심거리를 한 세트로 짊어진 C를 만나 그네 집에 가서 새벽까지 술을 먹다 귀가했다. 

 그리고나서 며칠째 딸년은 엄마랑 말을 안 하고 있었던거다. 오늘 김탁구를 보며 술과 부침개를 나라 잃은 백성들처럼 -전유성이 했던 말- 먹다가 어매가 말을 거는데 요 딸년 아직도 꿍하게 있어서 틱틱거린다. 엄마는 엄마대로 요새 딸년 행동거지가 맘에 안 들었지만 뭐라고 했다간 무슨 소리 나올지 뻔해서 모른척 넘기며 예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딸년은 이때다 싶었는지 듣기 싫다며 자긴 꿍해 있단 얘기를 한다.

 딸년, 갸륵한 입에서 자신이 왜 삐졌는지에 대한 자초지종을 청산유수로 쏟아내는데 엄마는 청문회도 아닌데 자꾸 기억이 안 난다고 잡아떼는거다. 딸년 보기엔 엄마가 다 기억하는 것 같은데 잡아뗀단 생각이 앞서고, 어미 생각엔 모르쇠 아니면 한건 단단히 걸리겠다 싶어 내내 줄다리기를 하다 말다 하다 그만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딸년 재주가 신통해 거짓말 하면 머리 쥐나는 어른까지 잡아떼게 만드는거라 할 밖에.

* 연애는 마약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묻겠지만, 연애하려고 맘을 먹으면 혹하지 않아도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깊게 중독돼 있었다. 굳이 애써서 설레이려고 노력하지 않고, 호감을 갖거나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려는 노력을 접었다. 주위에서 위성처럼 맴도는 사람들에게 설렘과 호감과 알려는 노력을 기울인 것도 아니다.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니고 더 이상 연애가 하기 싫은 것도 아니다. 미친년 널 뛰듯 휘몰아친 맘이 널이 끊어지고 나서야 눈동자가 돌아온 것처럼 시큰둥, 좀 그렇다.

 아마도 다시 본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에서의 주인아(씨) 아니, 손예진처럼 두루두루 감정노동을 할 자신이 없는건지도. 연애의 전형은 왠지 영화처럼 '아주 열심, 단 관계를 위해'야 할 것 같은데, 난 그렇지 않으니까. 내 연애가 문제인건 남들처럼 하지 않고 내 감정만 앞서서인 것 같은데 왠지 그걸 바꾸면서까지 연애를 하고 싶지 않달까. 배가 부른달까.

 아이스크림을 다 빨아먹어서인가보다.

* 꼬박 꼬박 추천을 날리는건 B다. 요샌 서재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아, 아무래도 이러다 지워지려나봐, 즐찾도 줄은 것 같고, 아무도 댓글을 남기지 않아 등등 서재 소외 폐인 삼종 세트를 날려주자 B가 글도 잘 안 읽으면서 꼬박 꼬박 추천을 누른다. 나는 추천 따위야 흥흥 이러면서 B가 날리는 추천에 중독돼 있다. 삶이 중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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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7-16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쉿~ 저도 매번 들어와요.)

오늘 추천은 B님께 양보 하겠습니다.

Arch 2010-07-16 13:53   좋아요 0 | URL
정말, 추천은 양보가 없다니깐요! 바람결님이 들어오는구나~ 아항!

hanalei 2010-07-16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에 있어 양보는 없어요.

Arch 2010-07-16 13:53   좋아요 0 | URL
옳소!

2010-07-16 0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6 1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0-07-16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하 아까망시는 정말 뭐죠? ㅎㅎ

Arch도 기분 별로였는데 어젯밤에 나를 그렇게 웃겨준거에요? 응?
난 Arch 한테 중독되겠네. 오늘까지도 기분이 구렸는데 알라딘 들어와서 이렇게 Arch가 페이퍼 써놓은거 보니 좋아요. 기분이 조금쯤은 말랑말랑해져요. 오늘 기분이 너무 구려서 출근길에 크림빵을 뭉탱이로 사왔어요. 그리고 지금 커피 내렸어요.

우리 잘 버텨봐요, Arch!

그래도 꼬박 꼬박 추천을 날려주는 사람이 있다니, 축복받았잖아요! 무조건적인 신뢰는 아무나 얻을 수 있는건 아니죠.



Arch 2010-07-16 13:55   좋아요 0 | URL
아까 전에, 뭐 이런거 같아요. 자매품으로 아까침에란 말도 있죠.

나 기분 베리 굿이었는데 뭘요~ 크림빵, 크림빵, 입에다 크림 묻히며 먹는 크림 빵! 맛있겠다. 게다가 커피라니, 직장 안 다녀서 속상한 것 몇가지 중에 커피를 사서 먹어야한다는 것도 들어 있어요.

신뢰가 아니라요, 징징대는거 보기 싫으니까 던져주는거죠, 신뢰일 수 없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