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리하는 것 같아.
CH는 이 말을 기분이 나쁘거나 나빠질 것 같을 때 주로 사용한다. 전에 막걸리 대작을 통해 나의 날선 말과 그의 날선 말을 동급으로 놓고선, 네가 형들을 등에 업고 있어서 그렇지 너나 나나 마찬가지라며 우겨댄 후 서로 대하기가 좀 더 편해져서 살짝 물었다.
- 왜 그렇게 생각해요?
- 여자들이 생리하면 좀 사나워지고 그래서.
-그럼 누구씨는 내가 언제 생리하는지 알아요?
그가 꿀먹은 벙어리처럼 나를 보면서 J씨에게 도와달란 눈짓을 보냈다. J씨는 그거 봐란 표정을 지었고, CH는 농치 아치에서 정색 아치라며 별명을 바꿔야겠다고 소리를 지르며 돌아다녔다. 아니, 나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건데, 궁금한거야, 라며 CH를 쫓아다니자 그는 무슨 내기하면 넘어갈거냐고 물어온다. 오, 살짝 구미가 땡기는데.
* Goal
분위기가 안 좋으니 오늘은 축구를 자제하자던 J씨가 어느새 밖에 나가 있었다. 누군가를 시켜서 머릿수를 맞추려고 나를 부르는걸 보자니 내가 이래서 이 양반을 좋아하는걸까란 생각도 들고. 아무튼,
어, 어 하다가 골을 넣었다. 골을 넣은 순간은 하늘에 붕 떠서 내가 골 넣는 장면을 보는 것처럼 낯설었다. 순식간에-누가 봤으면 슬로우 모션이었겠지만- 다가오는 공을 잽싸게 골대에 넣는 아치가 저기 있구나. 공중에서 나를 바라보는 나는 마치 그렇게 얘기하는 것 같았다. 그 느낌은 짜릿했지만, 너무 금방이라 모든게 순식간에 스쳐지나갔지만, 어쩜, 낚시하는 사람들의 손맛 어쩌고, 달리기의 오르가즘까지 죄다, 몽땅 이해할 것 같은 무한 포용의 순간이라니!
집에 가는 길에 B에게 앞으로도 종종 패쓰를 해서 아치가 골 넣고 공중으로 붕 뜨는 것 좀 보자고 했더니 이 녀석 하는 말이,
- 아치한테 공 가면 상대방이 이겨요.
라고 한다. 이 양반을 같은 편이라고... 혹시 결정적인 패쓰(아, 이걸 뭐라고 하더라?)도 실수로 잘못 건네준게 아니었을까.
* 에필
문세 아저씨 방송에서 '오늘 아침' 5주년 기념으로 5년 전 뉴스를 방송했다.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던 내용 중 하나가 콘돔 이름 공모전이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5년 전쯤에 콘돔의 새 이름 짓기 공모가 있었다. 여러 이름 중에 '에필'-에로스의 필수품-이 당선되었지만, 에필 아이디를 갖고 있는 네티즌들의 반대로 상용화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에필, 콘돔. 콘돔 어감이 그렇게 별로일까?
도리어 이름보다는 콘돔을 은밀하게 불러야할 것 같은 분위기 조성이 콘돔 사용률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콘돔을 챙겨 가지고 다니는건 왠지 '항시 섹스 준비' 상태란 느낌을 준달까. 차라리 콘돔을 성인들의 필수품으로 자리매김해서 영화나 드라마에서 섹스를 할 것 같은 순간, 주머니나 핸드백을 뒤지는 씬이나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 편의점을 보여주는 씬 등을 넣는 것도 효과적일 듯하다.
내 경우는 전에도 밝혔지만 서랍에 '항시 준비' 되어 있다.
* 말을 잘해보기
- 난 요새 카라의 'Mr' 엉덩이 춤이나 백지영의 쉬운 춤동작을 보면 못견디게 좋은거야. 그런데 이거 너무 여성주의적으로 옳지 않은 욕망은 아닌가란 생각이 드는거야. 내 욕망은 누군가가 제시하는 몸을 보고 싶어하는 것 뿐이지, 정말 내가 저들의 몸을 보고 싶어하는지 모르겠더라고. 뚱뚱한 여자애들이 나와서 막춤을 추면 내가 봤겠냐고. 난 미디어에 놀아나는 것 같아.
- 넌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여성 그룹을 보면 예쁘고 좋다는 생각을 해. 그건 순전히 네 욕망이지. 그런데 네 욕망이라는게 너로부터 나오는게 아니라 비율과 길이와 무게로 표준화된 '여자 몸'에 따르는 것에 의문이 생기는거야. 넌 너의 미의식은 어디서 온건지 궁금한거잖아.
* 발견
최근 들어 내가 그다지 책 읽는걸 좋아하는건 아니며 잘 읽지도 않는다는 놀라운 사실-다른 사람은 아마 다 알고 있었을거다.-을 알아내고야 말았다. 젠장. 공부해야겠다, 글을 잘 쓰고 싶다고 했지만 엉터리 글이나 쓰면서 바람은 보따리 가득이었다. 누군가의 잘 쓴 글이나, 좋은 책을 보면서 나는 내가 안 써서 그렇지,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책을 많이 안 읽어서 그렇지라며 자위해왔다. 알고 보면 앞으로 뭐뭐 해서 이뤄지는 일들은 그다지 많지 않을텐데도 터무니없었던거다. 언젠가는 나도 잘 할거라고? 긍정의 힘이라면 어깨라도 추켜세워야겠으나 낙관의 속성인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폐단은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내가 초반에만 열을 내고선 그 후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도 다 낙관의 힘이라고 쓰려다 핑계도 가지가지란 생각에, 참.
어쩌면 난 더 이상 이보다는 행복할 수 없다고 시위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안에는 끈질기게 떨어지지 않는 자격지심과 아직 죽지 않았다는 버둥거림, '이래도, 이래도'하면서 떨어대는 위악까지 고루고루 들어있다. 뭔가 근사한 것을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욕망은 여전하고, 막연한건 무효라는 맘도 여전하고, 그럼에도 여기까지 와준 나 역시 여전하다.
선반 위의 캐슈넛 쿠키를 몇 개쯤 먹어야 고요하게 잠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