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달한 것 타령이 아니었어도 읽고 싶은 소설이었다. 가을이었고, 가끔씩 베갯머리에서 내 냄새뿐 아니라 묵은 바람 냄새가 나기도 했으니까. 후각으로까지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는 적절했다. 책을 읽으면서 서재에 올리려고 에미와 레오의 유머를 메모하고, 책 귀퉁이를 접어놨다. 이거 정말 웃기지 않았냐며 당신도 거기서 에미의 신랄하고 예리한 재치에 웃지 않았냐고 공감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 지점에서 한참이나 빗나가버렸다.
자전거를 굴리며 산의 바람을 가득 얼굴에 품었다. 추웠지만 움츠려지지 않았고, 한달 전의 그 바람보다 배는 차가워진 바람에도 마냥 신나 있었다. 집에 가서 얼른 읽어야지, 에미가 이번엔 무슨 얘기를 할까, 레오는 어떤식으로 대응을 할까. 그러다 문득 바람처럼 맘의 소용돌이가 가라앉아버렸다. 그건 조빔의 속삭임 때문도 아니고, 그리운 사람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에미와 레오가 곧 150페이지를 넘어서는 어딘가에서 분명 자판을 치며 이거 어떡하면 좋지라는 차마 칠 수 없는 말들을 주워삼키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특정한 사건은 생각나지 않았다. 꼭 그쯤에서 얘기가 진전된다는 것도 아니다. 둘은 지금처럼 씩씩하게 아웅다웅하면서 친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제목에서, 귓가에서 씽씽대는 바람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마음 속에선 작은 목소리로 해피엔딩을 바라면서도 그들이 너무 쉽게 행복해져버리면 좀 허탈할 것 같단 생각이 떠올랐다. 드라마의 다음회를 기다리는 심정이랄까. 그저 책장만 펴놓고 가만히 등받이에 기대어선 읽기만하면 되는데도 마음은 벌써 다른 곳에 홀려버린 듯 홀리고 싶은 듯.
빠져든다거나 몰입하고 싶다는 수사는 너무 반복적이다. 나는 좀 재잘거리고 싶고, 좀 더 벅차오르고 싶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이토록 남의 연애사를 흘끔거리며 벌써 쓸쓸함의 기운을 눈치채는 청승을 떨게 아니라 처음에 그들 이야기의 따사로운면들을 발견하고 폴짝대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리고 길고 길게 전할 수 있는 이야기가 내게 있다면 좋겠단 생각도 떠올랐다.
책
김수영(金秀映)
책을 한권 가지고 있었지요. 까만 표지에 손바닥만한 작은 책이지요. 첫장을 넘기면 눈이 내리곤 하지요.
바람도 잠든 숲속, 잠든 현사시나무들 투명한 물관만 깨어있었지요. 가장 크고 우람한 현사시나무 밑에 당신은 멈추었지요. 당신이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자 비로소 눈이 내리기 시작했지요. 어디에든 닿기만 하면 녹아버리는 눈. 그때쯤 해서 꽃눈이 깨어났겠지요.
때늦은 봄눈이었구요. 눈은 밤마다 빛나는 구슬이었지요.
나는 한때 사랑의 시들이 씌어진 책을 가지고 있었지요. 모서리가 나들나들 닳은 옛날 책이지요. 읽는 순간 봄눈처럼 녹아버리는, 아름다운 구절들로 가득 차 있는 아주 작은 책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