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부암동 북카페 야나문에서 <무인도에 갈때 당신이 가져가야 할 것>의 북톡이 있었다. 나는 멀리에서 온 친구를 만날 겸 조금 이르게 카페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혼자 조용히 강연 준비를 하고 있는 윤승철작가가 저만치 보였다. 북톡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고 카페도 한산한 편이었으므로, 평소의 푼수끼가 발동했다면
"저어...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라며 조금은 장난스럽게 책을 들이밀었겠다. 그런데 그 날은 왠지 혼자서 내외를 하며
내숭을 떨며 멀찌감치 자리를 잡고 친구와 수다를 떨고 있던 참이었다.
저쪽에서 큼직한 가방을 어깨에 둘러 멘 이병률시인이 들어왔다.
그의 신간 <안으로 멀리뛰기>를 요즘 밤마다 힐끔 힐끔 보고 있으므로
짐짓 나는 얼굴을 붉히며 그의 곁으로 갔다.
"저어..화보집 잘 보고 있습니다"
"푸하하하"
그렇다. 요즘 나는 <안으로 멀리뛰기>를 읽지 않고 보고 있다. 나는 그의 시를 좋아하지만
그 이전에 그의 인상을 좋아했다. 이번에 나온 대화집이라 이름 붙은 그 화보집엔 이병률 시인의 사진이 실컷 들어있었다. 물론, 그 사진들이 다 양질의 화보인 것은 아니다. 사진이 좀 적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또 그것이 좋은 사람들도 있을 터이다. 그는 상남자의 멘탈과 그것을 반대로 드러내는 외모를 가졌다. 그는 다정하지만 사람을 좋아하진 않는다. 그런 그가 사람 많은 곳에 적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때는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발동할 때이다.
나는 <무인도에 갈 때 당신이 가져가야 할 것>을 읽지 않았으므로 이 책에 실린 사진을 이병률시인이 찍었다고 생각했다. 얼핏 바닷가에 핀 보라빛 해국 사진을 보았는데, 그 사진을 보고 그냥 시인이 사진을 찍었구나 라고 믿어버린 거였다. 그래서 글 윤승철, 사진 이병률의 자격으로 같이 북톡을 하는 걸로 혼자 오해하고 있었다. 윤승철작가에 대한 정보도 거의 전무하다 시피해서 그저 젊은 사람, 탐험가 정도의 느낌만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지나치게 젊었고, 아! 지나친 젊음이라니..심지어 내가 신혼을 시작한 지방 도시 같은 동네에서 그 시절, 아기로 자라고 있었던 거였다.
북톡이 시작되었다. 사람을 모으는 일과 사람이 모이는 일은 쉽지 않다. 생각보다 긴 밑작업과 당일의 노동과 시간과 물리력이 필요하다. 그 날은 예정보다 많은 사람이 모였고, 쏠리는 마음들이 넘쳤으나 분위기는 잔잔했다. 사진과 이야기들이 풍성했고, 윤승철 작가와 무인도 체험을 한 체험자들의 이야기에도 울고 웃었다. 대략은 계획되었겠지만 상황은 즉흥적이었다. 시인은 러시아에서 가져 온 보드카를 동참자들과 나누었으며, (아 이 두 작가는 러시아 횡단 열차에서 만난 인연이다) 윤승철작가는 보기 힘든 안습사진들을 빵빵 터뜨려 주어서 북톡 참석자들을 뿌듯하게 했다.
본인의 말을 빌면 그의 전작 <달리는 청춘의 시>는 다듬지 않은 일기 같은 글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글을 읽고 팬이 된 여고생이 멀리 남쪽 지방에서 상경했다. 조퇴를 하고 4시간 버스를 타고 왔다고 했다. 돌아가는 버스 시간에 쫓겨 잠깐 북톡에 참석하고 작가에 대한 사랑을 수줍게 고백하고 갔다.
뉴칼레도니아 셋째 날은 별이 너무 많아서 잠을 못잤어요. 이런 이야기가 잠시잠시 들렸을 때 어디에서 모였을지 모를 그 따사로운 등들 뒤로 별 빛이 쏟아져 내리는 착각에 빠졌다. 우리는 각자 몫의 삶을 감당하느라 숨가쁘다. 조용히 견딜 때도 있고 비명을 지를 때도 있지만, 모이고 감정을 나누고, 같이 뭉클하고 함께 웃을 때 조금은 그런 숨가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 같다.
이제 하루 사이에 바다에 들어가는 일이 먼 나라 이야기 같아져 버렸지만, 아주 아주 먼 옛날 옛적에 9월 초 바다 수영을 했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아직은 무인도가 곁에 있다고 봐도 좋겠다. 무인도에서 살아남고 싶거나, 무인도를 완전정복하고 싶거나, 무인도에 무엇을 가져가야 할 지 궁금한 독자들은 <무인도에 갈 때 당신이 가져가야 할 것>에서 그 답을 찾길 바란다. 무릇 인생의 답이란 어디에도 없겠지만. 혹시 이 책에 있을지..
그러니까 윤승철은 최근 몇 년 안에 만난 사람들 중에 가장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사람이 가진 매력은 만나고 나면 또 보고 싶어지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그가 쓴 글을 기대하게 되는 이유이고 그의 앞날이 궁금해지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