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알약 - 증보판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프레데릭 페테르스 글.그림, 유영 옮김 / 세미콜론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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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이라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했던 내가 이 책을 집어들을 수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흔히 생각해오던 만화책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화라는 장르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은 완화되어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열린 사고가 작용했기 때문일까. 또 하나는 이 책이 담고 있는 에이즈에 대한 메세지가 크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카티와 페테르스. 우연히 알게 된 두 남녀는 사랑에 빠지게 되고 카티는 이혼녀이다. 그리고 아들이 하나 있지만 그녀와 그 아들 모두 에이즈라는 병을 가지고 있다.
에이즈. 듣기만 해도 으스스 떨렸던 그런 기억은 이미 지났다. 물론 내 앞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에이즈라는 병에 걸렸다면 나역시 당황은 하겠지만 흔히 생각하는 에이즈라는 병에 대한 배척의 수준은 지났다는 말이다. 감기처럼 공기를 통해 감염될 수 있는 바이러스도 아니고 혈액으로 감염이 되는 것이며, 불치병이라고 알고 있지만 개중에는 치료를 통해서 완치가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현실앞에서는 다른 모습인 우리들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며 나를 나무란다. 그저 감염되지 않을 것이라고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지만 실제로 내 앞에 에이즈라는 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된다면, 나 역시 머리와는 다르게 행동할 것이라는 나만의 추측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푸른 알약을 집어 삼키는 그들을 보면서 나의 인식의 힘은 종전과는 조금 다르게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래서 결국은 이러한 만화가 필요했던 게 아닐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매체를 통해 쉽게 다가오지는 않는 사회적 인식을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틀어버릴 수 있었을 테니까. 

병에 대한 장황한 지식을 늘어놓기에는 나 또한 많이 아는 것이 없다. 언제나 많이 안다고 해서 그대로 행동할 수는 없는 것과 반대로, 많이 알지 못한다고 해서 잘못된 방향으로만 간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확한 인식과 정보를 통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에이즈에 대해 많이 알아 나가고, 불치병이라는 사회적인 통념 또한 없애버리고 싶은 게 우리의 모든 바램일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하나의 사고에는 찬반이 엇갈리게 마련이고, 서로 반대 입장의 두 주장 또한 각자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을 조금은 잠재울 수 있는 건 아무래도 에이즈라는 병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그 약자의 입장을 가장 잘 대변하고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최선이기 때문이다. 그 바탕에 깔려진 원인과 결과적인 모습을 완벽하게 다 제외할 수는 없겠지만 힘든 과정을 살아나가고 있는 그들에 대한 차별과, 다른 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색안경을 조금은 벗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더 투명하게 그들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라고 되묻고 싶어진다. 

미화시킨 것이라면 조금은 더 현실적으로, 현실적으로 다가온다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지금은 성인이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어른들을 위해 이러한 만화가 더 쉽게 다가오면 우리는 그들을 전보다는 더 가까이 대할 수 있을 것이다. 바이러스가 몸 속에 아예 존재하지 않을 그 날을 위해, 푸른 알약을 삼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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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동안의 과부 2
존 어빙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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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 움직이고 싶지도 몸을 일으키고 싶지도 않은 그런 무능력감이 찾아올 때 내 곁에 바로잡아 있을 수 있는 친구는 바로 이야기가 가득 담긴 동화같은 책 한 권. 쓸쓸하면서도 외로운 나의 심신을 달래줄 책이 곁에 있었다. 존 어빙, 미국이 사랑하는 작가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이런저런 유머로 나를 들썩이게 만드는 이 책 속의 이야기는 그렇게 구미가 당겼다. 밤을 지새며 읽고 난 후, 커피 한잔을 마시며 한동안 빠져들게 만들었던 그 속에서 나를 빼내어 본다.

읽는 사람을 위해 줄거리는 적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주위에서 물어오곤 한다. 어때, 무슨 이야기야? 책도 예외가 아니다. 재밌어? 라는 그 말에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좋으니 보라고, 읽어보라고만 한다. 그대로의 느낌을 간직하고, 느낌을 존중하기 위해서이다.
한때, 영화 <시네마 천국>을 보고나서 이 시대에 대해 탄식을 한 번 경험한 적이 있다. 남녀노소 야외의 스크린 앞에 앉아 무슨 내용인지 어떤 배우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저 영화 온통 그대로를 내 안의 감각이 느끼게끔 내버려둘 수 있고, 아니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그 시대의 상영을 찬미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이란, 흘러나오고 내가 알고 싶지 않은 모든 것들이 나를 괴롭히는데 그게 참 아이러니 하다. 많이 알고 싶지만 그만큼 앎의 가치는 상실되고 있으니 말이다.

매리언과 에디, 37년만의 재회. 그 속에서 느끼게 되는 느낌은 단 한 가지이다. 에디는 이렇게 말한다.
"시간이 멈추는 순간들은 있게 마련이니까. 그런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지만."

흘러가는 시간앞에 무디어져 가는 추억들을 보듬을 수 있는 것이란 많은 것을 희생하며 살아야 하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만큼 소중하게 지켜내고 싶은 것이라며 그까짓 희생따위는 감수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기억 속 그대라는 사람과의 사랑이었으니까. 

책 속에서 작가를 만나고 그 작가가 늘어놓은 이야기를 읽어낸다는 것, 그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읽어내고 다시 돌이켜 보는 과정이 흥미롭다. 하지만 그 속으로 빠져들을 수록 결과적으로 나에게 남아있는 건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어느샌가 이 이야기를 단숨에 읽어내리게끔 써놓은 존 어빙에 대한 감탄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결국은 그가 만들어 놓은 이 책 속에 테드 콜의 책, 루스의, 에디의, 그리고 매리언의 책들에 대한 이야기들조차 그의 것이니까. 그가 만들어 놓은 일련의 과정들을 뒤쫓아가다보면 어느샌가 다시 존 어빙의 이야기로 귀결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나는 이 추운 겨울, 하나의 이야기로 내 주위를 따뜻하게 할 수 있었다. 한동안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책을 끝마친 기분이랄까. 동화책 한 권을 던져주면 그것을 읽고 또 읽어서 그 안의 삽화와 이야기들을 줄줄이 욀 수 있었던 것처럼, 이 안의 이야기들이 내 머릿속에서 한동안 맴맴 거리면서 남아있을 것임을 알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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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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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장의 사진이 있다. 모두 웃고는 있지만 그 안에 차갑게 내리앉은 사회에 대한 불신이라든지 지나칠만큼 소름끼칠 위선의 모습이라든지. 어렸을 때, 조금 자라 학생이 되었을 때, 그리고 늙었을 때. 모두 같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 같은 섬뜩함은 약간의 다름을 표현하고 있다.

다자이 오사무의 삶을 거의 그대로 압축시켜 놓은 이 책 속의 인물, 요조를 보면서 삶이란 누군가에게는 이렇게 특별할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이 스친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보면 살아가는 그 누군가 자신의 삶은 특별하고 그 중 나와 너무 다름이 느껴지는 것일 뿐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개별성을 염두에 둔다고 하더라도 요조는 아니다. 적어도 요조는 다르다. 지나치게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니까.

어려서부터 대가족의 집안에서 자라나 배고픔이라는 느낌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다는 요조. 누군가에게 위선을 떨고 있지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다. 실제 내가 행동하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일지 아닐지를 알 수 있는 건 오롯이 나라는 존재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그 겉으로 표현해내는 모든 것이 가짜로서의 진짜 내가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같은 반 학생에게 그걸 들키게 되고 그때부터 조금은 삐걱대는 요조의 인생.

왜 죽고 싶어했을까. 살아가면서 힘든 일이나 겪을 수 조차 없는 이상한 일들이 나를 괴롭힐 때에도 적어도 죽고 싶어하진 않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남들로는 이해받을 수 없는 일들에 나 혼자 아파하고 절망감을 느낄 수는 있다. 남들은 나와 다른 사람을 지칭하는 일반명사로서도 칭해질 수 있으니까. 누군가에게 나의 생각을 강요하고 나와 같은 삶을 살길 바란다는 것은 가장 심각한 모순이다. 그러기에 요조가 겪었던, 그 이전에 다자이 오사무가 겪었던 자신에 대한 삶의 방식과 그 결과로서의 일들은 내가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려 하면 할수록 더 저 멀리 가버릴 뿐이었다.

이 책을 읽기 전, 누군가는 나에게 읽지 말라고 했다. 정말 제목 그대로의 인간실격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가슴에 꽂히기 때문에 우울해진다고. 하지만 그 사람과 내가 다르듯, 다자이 오사무와 내가 다르듯 느껴지는 바도 판이했다. 사실, 우울해지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읽는 내내 아, 이렇게도 살아갈 수 있구나. 똑같은 일을 받아들이는 우리네의 모습은 정말 다르다 못해 정반대의 바닥으로 치닫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그리고 인간실격으로서의 다자이 오사무, 요조의 삶이 더욱더 치명적이라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서슴없이 써내려간, 그야말로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위선의 말투 때문이었던 듯 하다. 자신의 감정 그대로를 글로써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자신의 행동으로서만 사건을 풀어가고 나열해나가는 요조의 마음을 그대로 읽다보니 더없이 측은한 생각과 우울함이 묻어났던 것이다.

인생, 그 길고도 험난한 과정이라는 것을 요조는 자신의 삶을 그대로 투영해 보여준다. 자기처럼 살지 말라는 뜻에서의 기록인지, 아니면 이렇게도 살아갈 수 있다는 다양성을 보여주려 했는지 그 의도는 나로서 명확하게 느껴지지 않지만 적어도 이것 하나만을 느낄 수 있다. 인간실격, 그건 나와 다른 사람의 어쩌면 내가 될 수도 있는, 하지만 그건 기준의 문제라고. 기준이 어디 달려있는지에 따른 나의 욕망이 빚어낸 결과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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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일 1 - 불멸의 사랑
앤드루 데이비드슨 지음, 이옥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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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사고, 그리고 그 뒤에 찾아온 사랑. 언제나 인생은 극과 극인걸까. 그리고 나의 과거는, 아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들에 대한 내 마음의 움직임은 어딜 향하고 있어야 했을까.

온몸이 화상을 입었고 움직이지 못하는 시간들 동안에 찾아온 마리안네 엥겔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과거에 있었던, 믿을 수 없는 아니 믿고 싶지 않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들. 하지만 들을수록 매력적인 그 이야기는 나와 엥겔 사이의 과거일에 대한 바탕이 되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사고로 인해 병원을 나가자마자 내가 할 것이라고 단정짓고 있는 한가지는 자살이다. 정말 잔인하게 극적으로 죽어버리는 방법. 온종일 내가 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궁리뿐이다. 한때 정말 잘나가던 포르노 배우로서, 직업적으로 상당한 만족과 외모에 대한 자신감으로 자만해 있던 나에게 닥쳐온 시련을 견뎌내지 못하고 나는 죽으려 한다.

하지만, 엥겔은 그런 나를 파악하고 슬며시 다가와 다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퇴원하고는 자신의 집에서 살 것이라고 한다. 선택도 없이 그저 그럴 것이라고 말해버린다. 그러면서 듣게 되는 그 이야기는 전생에 자기와 내가 사랑을 했고 결혼을 했으며 과거를 함께한 사람이라고 한다. 나는 믿지 못한다기 보다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사실이라면서 말해주니까? 아니다. 마음속으로 전해지는 그녀의 진심 때문이다. 머릿속으로만 판단할 수 있는 그런 게 사랑이었다면, 아마 사랑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리안네 엥겔은 결국은 가버렸고, 나는 혼자 남았다. 병원에서 궁리했던 자살은 당연히 없던 일로 되어버렸고 이제는 온몸의 화상이 점점 나아져 나의 피부로 돌아온다. 현실이 아닌 것 같은 일을 겪어버리고 난 후의 나.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기억속의 모든 일들을 안고 살기에는 하루하루가 다르다. 그리고 그 기억을 따르기에는 나의 뇌가 너무 작은 것 같다는 느낌도 드는 세상. 누구나 겪는 일은 아니지만, 그 독특한 사건 속에는 우리의 모습이 담겨있다. 치료되는 몸, 그리고 치유되고 있는 마음. 누군가 나를 위해 시간과 사랑을 쏟아부으면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다. 고통 속 절망 끝으로 내던져도 갑자기 찾아올 수 있는 행복을 기대하며 살 수 있다는 희망. 그 이치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야기.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멀리할 수도 있었다. 실제의 모습이 아니라고 덮어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 속의 이야기 즉, 마리안네 엥겔이 들려주는 약간은 동화같은 이야기는 너무나도 매력적이었고 그 끝의 둘의 사랑에 연결되어지는 플롯은 이야기의 끝을 향해 가야 알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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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메티의 아틀리에
장 주네 지음, 윤정임 옮김 / 열화당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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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라는 것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써도 평가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점은 보는 이로 하여금 얼마나 공감을 일으키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작품이라도 아무런 느낌이 일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저 죽은 작품이라고 할 수 밖에. 그만큼 소통이 존재하는 류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자코메티의 작품에 관심이 간다. 

장 주네라는 파란만장한 삶을 시작으로 죽을 때까지 평탄치 않았던 삶을 살았던 희곡 작가로부터의 자코메티와의 만남에 관한 글인 이 책은 나로서는 어쩌면 쉽게 읽힐지도 모르는 듯한 책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아주 얇고 흰색의 여백이 간지러운 이 책을 읽는 내내 왜인지 사르트르의 <구토>에 대한 생각이 오버랩되곤 했는데 중반 이후 등장하는 진짜 사르트르의 대화에 적잖이 놀랐다. 장 주네, 자코메티, 그리고 사르트르. 서로 각별한 우정을 가지고 동시대에 살아갔던 예술가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기적이다. 대단하고 느낄 수도 있는 그런 인물들끼리의 소통이 부러웠다고 하는 게 더 맞는 말일 것이다. 

선이 흐르듯 사람의 몸과 얼굴을 표현하는 자코메티의 아틀리에 들락달락 하면서 일기 형식으로 4년동안 써내려 간 글의 압축된 표현이다. 아틀리에란 무엇일까. 그저 예술가에게 있어서는 작품활동을 하는 공방에 불과하기도 하고 그저 화실일 수도 있지만 그 곳이 의미하는 더 깊은 의미가 있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집합체. 우리는 예술작품 그 자체만이 아니고 예술가의 배경, 작품이 추구하는 의미 등 그 외의 것들로 평가할 때가 많다. 그저 유명하지 않아도 작품 자체만으로 뛰어나다면 그만일 것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나의 예술보는 눈을 탓한다. 감흥이 일지 않아도 유명한 작품이라면 우선 찾고 보게 되는 행동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사물을 고독하게 바라다보고, 그 자체는 꼭 고독하고 홀로 있어야만 없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자코메티의 사상이 마음에 든다. 그저 내뱉은 말일지도 모르지만 사물에 있어서 외적인 것을 모두 배제하고 판단한다는 것은 전혀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하지만 어느새 주관적으로 판단하고 있는 게 나이면서 우리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끼리의 만남이 특별한 것은, 그것도 자코메티와 장 주네의 만남이 새로웠던 것은 흘려보낼 수 있는 자코메티의 작품을 글로 써내려갔고, 그 이 전에 자코메티의 작품이 장 주네의 영혼을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상호작용을 통한 결과물로서의 책을 바라다보고 있자니, 그 특별한 것이 이렇게 소소하게 다가올 수 있는지 의아하기도 한다. 하지만 표현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쉬운 말로서 대비적으로 큰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비록 거창하진 않더라도 자코메티의 느낌과 장 주네가 표현한 둘의 대화를 통해서 내가 세상을 바라보고 하물며 사소한 사물 하나를 바라볼 때 어떻게 대해야 할 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비추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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