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기사단장 죽이기 - 전2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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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치도 못한 방향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보다는 산문집과 에세이를 위주로 읽어왔어서 그의 평소 스타일을 잘 아는 편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세세히 묘사하고 그리는 작은 디테일들을 좋아하는 편이라 (음악이나 그림을 묘사할 때 그는 상당히 많은 팩트와 디테일을 들여 표현한다) 이 소설 앞 부분을 읽을 때엔 주로 그런 부분들을 음미하며 읽었다. 특히 초상화를 업으로 삼는 관찰력이 뛰어난 화가를 주인공으로 기용함으로써 그 디테일들이 이질감없이 잘 표현된 듯 했다. 그런데 점점, 생각치도 못한, 유와 무의 경계 사이로 나를 끌어들여 상당히 관념적인 이야기들이 펼쳐져서,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라는 말을 소설속에 담는 이들은 많지만, 이 책은 그 이야기를 독특하게 잘 전달하고 있는 듯 하다.
“이튿날 다섯시 반에 절로 눈이 떠졌다. 일요일 아침이다. 주위는 아직 캄캄했다. 부엌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은 뒤 옷을 갈아입고 작업실로 갔다. 동쪽 하늘이 희붐하게 밝아와 불을 끄고 창문을 활짝 열어 차갑고 신선한 아침공기를 맞아들였다. 그리고 새 캔버스를 꺼내 이젤에 얹었다. 창밖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밤사이 내린 비로 주위 수목은 흠뻑 젖어 있었다. 비는 조금 전에 그쳤고, 여기저기 구름 사이로 빝나는 하늘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는 스툴에 앉아 머그잔에 담긴 뜨거운 블랙커피를 마시면서,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눈앞의 캔버스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른 아침, 아직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새하얀 캔버스를 바라보는 것이 예전부터 좋았다. 나는 그것에 개인적으로 ‘캔버스 참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직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지만 결코 공백이 아니다. 그 새하얀 화면에는 와야할 것이 가만히 모습을 감추고 있다. 유심히 들어다보면 몇가지 가능성이 존재하고, 이윽고 하나의 유효한 실마리를 향해 집약된다. 나는 그런 순간이 좋았다. 존재와 비존재가 조금씩 섞여드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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