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인표, 박찬호를 찾아 나선 길-1


몇 주 전 미국 로스엔젤리스와 시카고에 뮤지컬 “지져스, 지져스” 공연을 다녀왔습니다.
촬영 중이던 “영웅시대”의 스텝과 연기자들께 참 미안했지만, 일 년에 한번 내지는 두 번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이 시간은 나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로스엔젤리스에서 공연을 마치고, 시카고로 떠나기 전 저를 비롯한 60여명의 공연단에게는 일요일 하루, 자유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공연을 같이 한 다른 분들은 로스엔젤리스 근방에 위치한 디즈니랜드나 MGM 스튜디오 관광을 하였고, 저는 아리조나 피닉스에서 재활훈련 중인 야구선수 박찬호를 방문하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토요일 공연이 끝나고 무대 정리를 하고 호텔에 돌아온 시각이 밤 1시경,
새벽 4시에 제가 묵고 있던 호텔로 박찬호의 동생 박헌용과 찬호의 매니저를 보고 있는 찬호 매형이 찾아와 저까지 포함해 셋이서 아리조나로 떠났습니다. 로스엔젤리스에서 아리조나 피닉스까지는 자동차로 대략 6시간에서 7시간 정도가 걸립니다.

헌용이와 매형은 앞좌석에 저는 뒷좌석에 타고 우리는 여섯 시간 반을 달려, 사막을 통과하여 아리조나 피닉스에 있는 텍사스 레인져스(박찬호가 속해 있는 팀)의 전용 연습장으로 향했습니다.

루키 리그에 대해서 아십니까? 미국의 야구 리그는 크게 두 단계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모두 다 아는 메이저 리그, 그리고 마이너 리그입니다. 그런데 이 마이너 리그 안에는 네 가지의 분류가 있습니다. 가장 상급리그인 트리플 에이(AAA), 그다음 더블에이(AA), 그다음 싱글 에이(A), 마지막이 루키입니다.

루키 리그에 속해 있는 선수들은 대부분 고등학교를 금방 졸업한 선수들이거나, 아니면 대학생들로 앞으로 프로리그에서 뛸 수 있는지 없는지 그 가능성들을 타진하는 선수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루키 리그 선수들의 평균 나이 역시 19세나 20세 정도입니다. 박찬호는 이 루키 리그에서 재활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리조나로 가던 날, 찬호는 샌프란시스코 루키팀을 맞이해서, 텍사스 루키팀의 선발투수로 등판하기로 되어 있던 날이었습니다. 찬호가 엘에이 다져스 소속이던 지난날, 찬호의 경기를 다져스 스타디움에서 직접 지켜보았던 저는, 지금 루키리그에서 재활등판을 하며 재기를 노리는 찬호를 응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무리를 하면서 아리조나로 갔습니다.

차 안에서 나는 헌용이와 찬호 매형에게 걱정스러운 질문을 했습니다. 찬호의 경기를 보자면, 경기장에 입장할 표가 있어야 할텐데, 미리 구매를 안했으니, 만약 현장에 도착하여 입장권이 없으면 어찌할 것이냐는 걱정이었습니다. 헌용이와 찬호매형도 찬호가 여태껏 루키리그에서 던져 본적이 없기에, 어떻게 경기장에 입장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눈치 였습니다.

우리가 탄 차는 쉬지 않고 계속 달려 동이 틀 무렵, 아리조나 사막지대를 통과하기 시작했습니다. 차 뒷자석에서 선잠을 청하던 저는 문득 지난 2000년, 찬호가 엘에이 다져스의 투수로 메이저 리그에서 18승을 올리고, 귀국을 하여 국민적 영웅으로 환영을 받던 그해, 제가 박찬호에 대해서 썼던 글을 떠올렸습니다.



차인표, 박찬호를 찾아 나선 길-2


지난 2000년 12월31일 밤, 찬호는 저의 집에서 함께 새해를 맞이 했습니다. 정민이와 정민이 엄마는 먼저 꿈나라로 가고 저와 찬호는 둘이서 거실에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박찬호 선수는 술을 안마십니다. 그냥 분위기만 잡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요.
그때 이야기를 하더군요. 자기는 야구를 너무나 사랑하고, 세계최고가 되기 위해서 본인이 포기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구체적으로 다 기억은 안나지만, 그는 20대의 청년에 걸맞지 않게 어른스러웠고, 정말로 그가 나열하는, 대부분의 이십대 청년들이 즐기고 있는 자유를,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생각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어렵지요.
저 역시 매일 매일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실패를 하면서,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하면서 살고 있습니다만, 찬호는 승리하는 삶을 살고 있는 건전한 젊은이였습니다.
옛이야기를 하고, 첫사랑 이야기도 하고, 존경하는 아버지 이야기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끝난후, 우리는 찬호의 제의로 같이 거실 바닥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참선을 했습니다. 같이 했다기 보다는 찬호가 저한테 참선하는 법을 가르쳐 준것이지요.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들떠있을 한 해의 마지막날 마지막 시간에, 누구보다도 화려하게 지낼 권리를 획득한 박찬호는 거실 마루바닥에 앉아 단전호흡을 하면서 새해를 맞이 했습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다스리면서..

전 그때 찬호가 올해도 잘할수 있으리라고 확신을 했습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세상에 유명한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어리고, 많고를 떠나서 우리가 본받을 만한 사람을 찾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박찬호를 본받으려고 노력합니다.
그가 유명하거나, 현재 상종가를 치는 선수여서가 아니라, 본인의 처지를 확실하게 인식하고, 자신을 이기려는 노력을 부단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헌용이가 저를 깨웠을때, 저는 숨쉬기 어려울만큼의 더운 열기를 느꼈습니다.
우리는 어느새 아리조나에 있는 텍사스 레인져스 연습구장 주차장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그날의 온도는 섭씨 43도 였습니다.

잠을 깨고 보니, 루키리그 경기 입장권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본 그곳에는 사람도 없고, 사람이 앉을 자리고 없고, 물론 입장권도 없는, 그냥 펜스만 쳐져 있는 잔디 밭이었기 때문입니다.



차인표 "찬호에게 필요한 건 격려 보다 밥"-3


1990년 여름, 미국 뉴저지에서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을 맞이할 즈음, 저에게 한국의 아버지로부터 비행기표 한 장이 도착했습니다.

"푸하하하.. 한국행 비행기표로구나. 가서 실컷 놀아야지. 친구들이랑 감자탕에 소주 먹고, 디스코장가야지. 이대앞, 홍대앞에 가서 커피도 마셔야지."

그 전까지는 방학 때 마다 페인트칠, 서빙, 접시닦이, 간호보조, 잔디 깎기 등 수많은 아르바이트들로 여름방학을 채웠던 저는 한국에서의 달콤한 시간을 꿈꾸며 비행기표가 담긴 봉투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들어있던 건 한국 행 비행기표가 아닌, 이스라엘 텔아비브행 비행기표였습니다.

"남자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적응할줄 알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권유로 그해 여름, 전 이스라엘 남쪽 슈발이라는 사막지대에 있는 협동농장(키브츠)에서 두 달 동안 밭을 갈고, 닭을 기르며, 여름방학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텔아비브에서 4시간여 동안 시외버스를 타고 이스라엘 사막 한가운데의 협동농장 키부츠 슈발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그 황당함... 섭씨 40도를 넘는 더위, 사막을 지나가던 당나귀, 그리고, 나를 버리고 속절없이 떠나가는 먼지에 뒤덮힌 시외버스의 뒷모습...

아리조나 텍사스 연습구장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느낌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태양은 내리쬐다 못해, 나에게 그대로 쏟아지는 듯 했고, 온도계는 섭씨 43도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한번 숨을 들이 마실 때 마다 목안으로 들어오는 뜨거운 열기. 마치 옷을 다 입고, 한증막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었죠. 메이저 리그 경기장에서처럼 핫도그랑 팝콘이랑 시원한 콜라를 사먹으려고 했던 저의 꿈은 텅빈 잔디밭을 보면서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곳 일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마실 물이라도 한 병 가지고 오는 건데...

그곳에서 박찬호가 출장하는 루키팀 경기가 막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찬호 동생 헌용이는 바로 비디오 카메라와 삼각대를 설치해 찬호의 투구하는 모습을 촬영할 준비를 했습니다. 찬호가 경기 후 자신의 투구 폼을 분석하기 위해, 헌용이에게 어떤 위치에서 어떤 사이즈로 자신을 촬영해 달라고 미리 부탁을 해놓았던 것입니다.


찬호 매형은 커다란 디지털 카메라를 꺼내 사진 찍을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찬호의 홈페이지 등에 올릴 자료사진용 이었습니다.갑자기 바빠진 두 일행들과 떨어진 저는 하릴없이, 찬호의 팀이 앉아 있는 덕아웃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웃거리며 찬호를 찾았습니다.

경기가 시작되고, 박찬호가 투수석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저는 펜스를 지탱하는 기둥 뒤에 붙어 반쯤 몸을 숨긴 채, 투수석으로 걸어 나가는 그를 지켜보았습니다. 혹시라도 찬호가 나를 의식하다, 경기에서 실수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먼발치에서 바라본 찬호는 지난 겨울에 만났을 때 보다 약간 핼쑥해진 얼굴이었지만, 그 당당함과 늠름함은 여전했습니다. 그는 앞 만보고 곧장 걸어나가더군요.

1회를 선방하고 공수가 교체되어, 텍사스가 공격에 들어간 잠시 후, 포수 장비를 입은 텍사스 유니폼의 한 흑인이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흑인: Are you Chanho's friend? (찬호 친군가요?)
나:  Yep. (네)

흑인: Chanho told me to give you guys these.
        (찬호가 당신한테 이거 갖다 주래요)

그 포수가 저에게 건네준 건 작은 물병 세 개였습니다.

젠장, 또 당했습니다. 사막에서 공을 던지는 찬호에게 시원한 음료수를 가져다주지는 못할망정, 아무것도 안가지고 빈손으로 갔다가, 그 빈손마저 들켜 또 신경을 쓰게 만들었습니다.

찬호.. 박찬호는 원래 그렇습니다. 안보는 듯 하면서, 다 보고, 신문기사 안 읽는 것 같으면서, 다 읽고, 상처 안받는 듯 하면서, 속으로 다 삭히고.. 작은일, 신경 안써도 될 일까지 구석구석 신경을 많이 쓰는 친구입니다.

펜스 뒤에는 우리 말고도 몇 명의 미국인들이 더 있었습니다. 찬호가 공을 던질 때 마다, 한사람은 스피드 건으로 속도를 재고, 다른 한사람은 속도를 받아 적고 있었죠.

경기가 진행되고 있는데, 한 한국인이 커다란 카메라 가방과 카메라를 주렁주렁 매고, 마치 로보캅 같은 모습으로 펜스 뒤로 나타났습니다. 한국 언론사의 카메라 기자였습니다.

그분은 찬호의 던지는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텍사스에서부터 18시간을 달려 막 아리조나에 도착한 것입니다. 6시간 반 걸려 이곳에 왔다고 말하려던 저는 입을 다물어 버렸죠.

6회까지 던지고, 찬호는 그날 경기를 마무리 했습니다.

마치 물에 빠진 생쥐마냥 땀으로 흠뻑 젖은 찬호가 우리에게 걸어왔고, 찬호는 우리와 인사를 나누자 마자, 스피드 건으로 속도를 기록하던 사람들에게로 가서 자신의 투구 내용을 확인했습니다. 그날의 최고 시속은 94 마일 이었습니다. 박찬호 전성기때 던지던 구속인거죠.

경기 끝나면 집에 가는 건 줄 알았었는데 아니었습니다. 찬호는 건물 안으로 우리를 데리고 들어갔고, 경기회복실 같은 곳에서 얼음찜질을 시작했습니다. 어깨와 허리에 커다란 얼음주머니들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루키리그의 선수들은 이제 갓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한 젊은 청년들입니다. 아직 정식 선수들이 아니기에 고작해야 한달에 칠, 팔백불 정도 월급을 받는 가난한 사람들이죠. 재활훈련을 위해 그곳에 와 있는 찬호는 아마도 그 루키들에게 대 선배를 뛰어넘은 선망의 대상일 것입니다.

경기를 마치고 돌아온, 텍사스 루키팀 선수들은 샤워를 마친 후에도 모두 집에 돌아가지 않고,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닭날개 였습니다. 찬호는 가난한 루키선수들을 위해서, 경기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피자등을 주문하여 회식을 시켜주고 있었는데, 이날의 메뉴는 400개의 닭날개였습니다.

닭날개로 점심을 대신하고, 우리는 찬호의 숙소인 한 모텔로 돌아왔습니다.텍사스 레인져스 구단에서 지정해준 박찬호의 숙소는 두평쯤 되는 거실과, 또 두평쯤 되는 침실로 연결되는 작은 모텔방이었습니다. 방에 처음 들어서자 마자 제일 먼저 눈에 띈건, 햇반 한개와 짜파게티 한 개, 그리고 먹다남은 김 이었습니다.

나: 너 이런거 먹고 운동하니?

찬호: 아침에만 먹어요. 햇반이랑 김이랑 먹고 운동나가요. 딱 적당해요.

맙소사. 적당하다니. 햇반 먹고, 시속 94마일의 강속구를 던져야 하는데..

박찬호, 그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건 열마디의 격려의말 보다는 "밥"이었습니다.



차인표 "찬호에겐 아내가 필요해"


찬호의 모텔방에는 작은 책상이 있었고, 그 위에 노트북과 휴대용 DVD 플레이어,그리고 몇 개의 한국영화 DVD가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소파가 있었는데, 저와 찬호 매형 둘이 앉으니까, 더 이상 자리가 없어서, 찬호와 헌용이는 침대에 걸터 앉았습니다.

찬호 동생 헌용이는 한의사입니다. 야구로 치자면, 루키 한의사죠. 갓 자격증을 따서, 로스앤젤레스 한의원에서 보조의사로 일하고 있으니까요. 헌용이는 자기의 가방에서 로스앤젤레스의 한 식당에서 사온 “떡” 한 상자를 꺼내놓았고, 우리는 떡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찬호: 맛있다. 형도 좀 먹어요. 이 떡 맛있게 생겼다.

맛 없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사막을 여행해 오느라 이미 따뜻해진 떡은 저만큼 피곤하고 힘이 없어 보였습니다. 떡을 먹은 후, 찬호는 침대에 옷을 벗고 엎드렸고, 루키 한의사 헌용이가 수십개의 침을 꺼내, 침을 놓기 시작했습니다. 찬호는 어린아이 마냥 비명을 질렀고, 헌용이는 허준처럼 진지하게 찬호를 달래면서 여기저기에 침을 놓았습니다.

두 형제의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찬호의 비명소리를 자장가 삼아, 저는 소파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저녁 무렵, 나는 한국 음식을 사주겠다며, 그들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찬호가 나에게 다른 사람들을 불러도 되겠느냐며 양해를 구하더군요. 오전에 야구장에 왔던 카메라 기자와 현재 아리조나에서 찬호처럼 재활훈련중인 메이저리그 시애틀 팀에 소속되어 있는 백차승 선수 였습니다.

우리 일행들, 찬호, 찬호 매형, 헌용이, 백차승 선수, 한국기자, 그리고 저, 이렇게 여섯 명은 아리조나 피닉스에 있는 한국식당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 식당 벽에는 찬호와 김병현 선수의 유니폼이 걸려 있더군요. 찬호는 밥을 먹는 내내 백차승 선수의 건강과 다른 후배들, 김병현, 최희섭, 김선우 등을 걱정했습니다. 저녁 식사 후, 식당 옆에 붙어 있는 한국물건을 파는 가게에 들렀습니다. 로스앤젤레스 돌아가기 전에 찬호의 장을 봐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그는 또 햇반과 사발면을 짚었습니다. 찬호의 매형은 며칠 더 남아 찬호를 돕기로 하고, 저와 헌용이는 밤 9시30분 비행기로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헌용이는 다음날인 월요일 아침에 출근을 해야 하고, 저는 엘에이에서 공연팀과 다시 합류를 하여 다음 공연을 위해 시카고로 떠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날은 어두워 지고, 찬호는 저와 헌용이를 피닉스 공항까지 바래다 주었습니다. 극구 싫다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저와 헌용이의 엘에이행 비행기표까지 사놓은 상태였습니다. 9시간동안의 만남은 피닉스 공항에서 끝이 났습니다. 찬호는 돌아가고, 저와 헌용이는 밤 9시30분에 출발하는 엘에이행 비행기를 기다렸습니다. 매번 찬호가 한국에 들어왔다가 나갈 때 이별이 반복되었었지만, 이번처럼 가슴이 시린 적은 없었습니다.

찬호와 공항에서 헤어짐으로 하루동안의 아리조나 여행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던 저는 잠시후 오산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밤 9시30분 피닉스 공항에서 우리를 태우고 갈 비행기가 새벽 1시30분으로 연기가 된 것입니다. 어쨌든 새벽에라도 엘에이에 도착만하면 시카고로 가는 아침 10시 비행기를 탈수 있기에, 헌용이와 저는 공항 의자에 앉아 기다렸습니다.

의자에서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새벽 1시였습니다. 이미 공항은 클로스 된 다음 이었고, 비행사 직원이 나와 멘트를 시작했습니다.

멘트의 시작이, We would like to apologize.. (사과 드리겠습니다..)하고 나오는데,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아뿔싸... 내용인즉슨, 엘에이행 비행기가 날씨 관계로 취소가 되었다는 거였습니다. 이 비행기를 못타면, 엘에이에서 아침에 공연팀과 합류를 못하고, 합류를 못하면, 시카고를 못가게 되고, 시카고를 못가면, 공연팀은 “지져스, 지져스” 뮤지컬에서 지져스 없이 공연을 해야할 처지인데... 비행기가 취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항공사 직원은 승객들에게 호텔 숙박권을 나눠주기 시작했습니다. 자고 내일 비행기로 가라는 겁니다.

헌용이와 저는 피닉스 공항 밖으로 빠져나왔습니다. 헌용이는 찬호에게 전화를 해서 일단 형을 깨우자고 했지만, 저는 푹 자고 아침에 또 운동나가야 하는 그를 깨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또 깨운들, 별 방법도 없었구요. 새벽 1시, 아리조나 피닉스 공항 국내선 청사 밖에는 사람도, 차도 하나 없이 적막했습니다. 한참을 걸어가, 일단 택시를 잡았습니다. 흑인 기사가 앉아 있더군요. 약간 무모하긴 하지만, 이 방법 밖에는 없었습니다. 어디를 가냐고 묻는 기사에게, 저는 “LA"라고 대답했습니다.

택시기사가 돌아 보았습니다. 아마 비행기가 취소되어 버린 저희 만큼이나, 이 택시기사도 황당했을 것입니다. 새벽 1시에, 피닉스 공항에서 덩치가 큰 동양인 두명이 6시간에서 7시간은 족히 걸릴 엘에이를 가자고 하니 말입니다. 택시 기사는 고개를 돌려 저와 헌용이를 번갈아 봤고, 우리는 최대한 선량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보았습니다. 피닉스 공항을 출발한 택시기사는 두가지 조건을 걸었습니다.

현찰 500불을 선금으로 지급하고, 자기 친구를 한명 더 태우고 가겠다는 거였습니다. 혼자서는 불안했겠죠. 아마 무서웠을 겁니다. 결국, 400불을 지급하기로 하고 친구를 태우는데 동의를 했습니다. 택시기사는 자기가 사는 동네로 차를 몰아, 길거리에서 자신의 흑인친구 한명을 태웠습니다. 그래서, 앞좌석에는 피닉스에 사는 400불을 벌어야 하는 흑인 두명, 그리고 뒷좌석에는 무조건 엘에이에 가야하는 한국인 두명이 탄 코미디같은 자동차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피곤한 헌용이는 깊은 잠에 빠졌고, 우리가 탄 차는 사막 한가운데의 휴게소에 들렸습니다.

화장실을 가는게 문제였습니다. 이미 돈은 선불로 주었고, 혹시라도 제가 화장실 간 사이에 앞에 탄 두 사람이 헌용이를 밀어버리고, 그냥 떠나면...??? 그래서 생각한 게, 화장실을 모두 같이 가는 거였습니다. 우리는 아주 친한 친구들처럼, 화장실을 모두 같이 갔다가, 같이 돌아왔습니다. 두 번을 그렇게 하고 나니, 아침 8시경, 엘에이에 도착을 했습니다. 한 일곱시간 같이 있다보니, 앞에 탄 흑인들은 나보다 더 선량한 사람들이라는 걸 알게 됐고, 엘에이 도착 후, 감사의 표시로 100불을 더 주었습니다. 그들은 “Thank you. I love Korean"을 외치며 돌아갔습니다. 이것으로 아리조나 여행기는 끝이 났습니다.

하루동안의 여행중, 자동차 안에 있던 시간은 14시간, 땅을 밟고 있던 시간은 10시간이었습니다. 박찬호.. 어려운 IMF 시절, 그의 경기를 보면서, 어른들은 힘을 얻었고, 아이들은 꿈을 길렀습니다. 그는 젊은시절 자신이 누릴수 있는 모든 자유를 담보로 훌륭한 메이저리거가 되었고, 미국인들은 그에게 거액의 연봉을 주면서 화답을 했습니다. 그가 버는 돈은 미국인들의 돈입니다.

그러나, 그 돈은 고스란히 한국으로 건너와, 투자되고, 장학사업에 쓰여지고, 물론 찬호 자신을 위해서도 쓰여집니다. 박찬호는 로또 당첨이 되어서, 어느날 운좋게 거액을 만진 인물이 아닙니다. 아무도 안나갈 때, 홀로 미국으로 건너가, ABCD부터 배우면서, 밥먹고 일어나 야구만 하면서, 자신의 몸뚱아리 하나로 메이저리그를 제패한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요즘 예전 같은 성적을 못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슬럼프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더 큰 도약을 위해 재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전과 똑같이, 아니면 예전보다 더 열심히 땀을 흘리는 모습을 직접 보고 왔기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박찬호는 반드시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혼자는 못할지언정, 예전처럼 우리 국민들이 박찬호를 응원하고 격려해 준다면, 그 힘으로 일어설 것입니다. 또다시 경제가 어려워진 지금, 다시 한번 어른들에게는 힘을 주고, 아이들에게는 꿈을 주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엘에이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한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올 시즌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올 찬호에게 여자친구를 소개시켜주어,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데 도움을 주겠다는 결심입니다.

다음번에 미국으로 찬호를 보러 갔을 때는, 찬호 혼자가 아닌 둘을 보고 싶고, 한국 DVD가 아닌 결혼사진첩을 보고 싶고, 사발면이 아닌 보글보글 끓는 김치찌개를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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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6-05 19:43   좋아요 0 | URL
찬호에게는 아내와 김치찌게가 필요하군요.
저에게는 남편과 돈이 필요하다면 돌 던질라나요?^^

로드무비 2005-06-06 09:11   좋아요 0 | URL
차인표가 더 좋아지고 박찬호가 더 좋아졌습니다.
멋진 친구들이군요.

니르바나 2005-06-07 12:44   좋아요 0 | URL
파란여우님에게는 남편과 돈과 땅과 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한가지 더 추가하라면 건강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이 이게 아닐까요. 나머지를 건사하려면 바탕이 든든해야하니까요.

니르바나 2005-06-07 12:42   좋아요 0 | URL
로드무비님, 제가 차인표의 출세작이자 거의 데뷰작이라 할 수 있는 드라마를 일 분도 시청하지 않았었습니다. 차인표신드롬이 무색하게 느글거리는 표정이 싫더라구요. 지금도 그의 연기와 목소리발성은 부담스럽지만 아름다운 품성을 보인 그의 일상을 듣보고 그의 열성적이지 못한 팬이 되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호감정도로요.
 



미국에서 까탈스럽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LA 다저스 최희섭(26)을 칭찬했다.
 
최희섭이야말로 적극적이면서도 원만한 성품, 올바른 태도를 가진 '된 사람'이라는 요지다.
 
가뜩이나 타격 슬럼프를 겪고 있는 마당에 독설로 유명한 스포츠라이터 빌 플라스키가 칼럼으로 최희섭의 됨됨이를 평가한 것은 이례적이다.
 
플라스키 기자의 칼럼 제목은 '최희섭은 어떤 언어로든 열심히 최선을 다한다'이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최희섭의 좋은 면이라고 지적한 것은 영어를 외국어가 아니라 동료애를 확인할 수 있는 수단으로 잘 이용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는 데이다.
 
아무리 좋은 마음을 갖고 있어도 그런 마음을 동료들과 제대로 주고받지 못해 스스로를 클럽하우스의 아웃사이더로 만들곤 하는 상당수의 아시아 선수들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나는 미국에서 야구를 하고 있는 만큼 당연히 영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한 최희섭의 소신을 전하면서 최희섭의 언어습관을 이렇게 소개했다.
 
'최희섭은 비록 때로는 더듬거리고 때로는 우물거리게 될지라도 자신이 받은 질문에 끝까지 영어로 대답하려고 애쓸 뿐 아니라 동료들과 팬들에 대한 감사의 표현을 마치기 전까지는 영어로 말하려는 노력을 그만두지 않는다.'
 
최희섭이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난 그저 조용히 있는 외톨이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듯 최희섭은 실제로 어느 팀에서든 인기를 누리는 키 큰 아시아인이다. 현재는 물론 시카고 컵스, 플로리다에서도 그랬다.
 
최희섭은 비슷한 또래의 선수들과는 스스럼 없이 장난을 치고, 라이벌이 잘했을 때에는 직접 다가가 축하인사를 건낼 줄도 안다. 동료선수의 가족모임에 자주 초대받는 단골손님이기도 하다.
 
영어뿐 아니라 스페인어를 쓰는 중남미 출신 선수들과 서로 토막영어를 써가면서도 친하게 지내는 노하우를 갖고 있고 중남미 출신 친구도 많다. 99년부터 2002년 8월까지 3년반 동안 마이너리그에서 잔뼈가 굵은 덕이다.
 
그동안 최희섭을 주로 비꼬는데 주력해온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늦기는 했지만 최희섭의 내면을 호평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마이애미(미국)=류강훈 특파원 hooney@h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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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6-02 11:11   좋아요 0 | URL
국민학교때 배운 '난사람''든사람''된사람'이라는 주제가 생각납니다.
전, 아무것에도 포함되지 않군요...아직, 여우의 껍질을 벗지 못한,

니르바나 2005-06-03 03:22   좋아요 0 | URL
파란여우님은 난사람, 든사람, 된사람인줄 저는 그리 알고 있습니다.

2005-06-03 1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암탉이 알까듯이 제 서재에 까댄 책들입니다.

과연 부화되지 못하고 알로만 남을 것인가,

새로운 주인공과 만남이 허락될건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알까기는 계속 쭈~욱 이어집니다.^^

 

마이페이퍼 링크 주소 : http://www.aladin.co.kr/blog/mypaper/815113

 

金文泰군, 안녕하신가. 반갑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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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6-02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화에 실패하시면 알을 잘 품는 저희집 오골계 암탉이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니르바나 2005-06-03 0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골계 암탉의 품이 필요하면 하시라도 구원 요청하겠습니다. 파란여우님
 


"박찬호는 운동선수와 어울리지 않는 감수성이 풍부한 청년이었다."

시카고 화이트삭스 불펜포수 이만수 코치(47)의 아내 이신화씨가 25일(한국시간) 이코치의 인터넷 홈페이지(www.leemansoo.co.kr)에 텍사스 레인저스 박찬호(32)에 대한 글을 올렸다.

이코치 부부는 지난 17일 박찬호를 집으로 초청해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이날은 박찬호가 화이트삭스전에 선발등판한 날이었다.

이씨는 "선발투수로 뛴 날이라 에너지소모가 많았을 것이고, 피곤해서 입맛도 없을 것이라 생각해 뭘 메뉴로 정할까 오전 내내 고심했다"며 주부다운 고민을 먼저 털어놓았다.

또 "내가 만나 본 박찬호는 운동선수 직업과 잘 어울리지 않는 감성적인 사람"이라며 "예민한 감수성 때문에 무딘 사람은 겪지 않아도 될 마음고생을 더 했을 것"이라고 첫 인상을 적었다.

이씨는 "이 자리에 오기까지 칭찬과 질타 속에 자신을 지켜야 했을 어려움을 생각하니 남편 말대로 등을 툭툭 두들겨 주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이씨는 이 코치가 한국 프로야구 최고 스타로 뛰던 시절을 회상하며 "남편의 현역 시절 '유명함이 주는 편리함에 중독되지 말자'고 다짐했다"며 "인기의 덧없음을 알려면 '자연인으로서의 자신'을 늘 자각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고 남편의 한참 후배인 박찬호에게 조용한 충고를 했다.

이어 "박찬호 선수가 유명하고 인기있었다는 평가보다는 '최선을 다하고 성실하며 실력있는 야구인'으로 기억됐으면 한다"는 바람도 숨기지않았다.

특히 "박찬호 선수가 목이 마를까봐 얼음냉수를 가져다주니, 사양하고 자기가 가져온 미지근한 상온 생수를 마시더라"며 박찬호가 얼마나 자신의 몸관리를 철저하게 하고 있는 가에 대해 간접적으로 소개했다.

다음은 이씨가 올린 글의 전문이다.

며칠전 아침식사준비로 분주한 나에게 남편이 오더니
저녁에 손님을 데려올테니 맛있는 음식을 좀 준비하란다.
경기 마치고 집에 오면 밤 11시가 다 되는데 왠 손님? 하며 궁금해 하니
박 찬호 후배와 저녁식사를 하겠다고 했다.
그동안 남편덕분에 유명한 사람, 높은 (?)사람 많이 만나보았지만
온 국민이 성원하는 박찬호 선수를 집으로 데려온다니 마음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원정팀 선수들 숙소와 우리집이 멀기도 할 뿐만 아니라
살림살이를 아직도 고스란히 한국에 두고 미국에서는 유학생같은
생활을 하고 있던터라 손님 초대하기에는 좀 그랬지만,
텍사스에만 가면 늘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해 주었다는
남편의 말을 여러차례 듣고 고마운 마음이 많았었는데 마침 시카고
경기이니 잘 되었다 싶었다.

선발투수로 게임을 뛰는 날이니 에너지소모도 많았을것이고,
피곤해서 입맛도 없을것이고, 늦은 밤이기도 하고, 그래서 무슨 메뉴를
할까 오전 내내 고심했다.

오후가 되어 한국에서 부쳐온 고사리와 도라지를 물에 불려놓고
너비아니구이와 새우냉채, 된장찌게, 북어국으로 메인메뉴를 정하고
부지런히 식료품점을 왔다갔다 했다.

아이들이 옆에서 지켜보더니 “엄마, 찬호형 온다고 너무 신경쓰는것
아니야?” 하며 놀린다.

문득 남편의 현역선수 시절이 떠올랐다.
중요한 시합이 있을때마다 무슨메뉴로 어떻게 맛있게 해줄까?
동분 서주 했던 그 시절……
그때가 그립기 보다는 늘 긴장의 연속이었던 것만 기억이 난다.

그날따라 비록 만루홈런은 맞았지만 호투했고, 이기고 있을때
마운드에서 내려온 박 찬호 선수는 그후 삭스팀이 동점을 내는 통에
1승을 고스란히 날려보낸 터라 마음이 안좋겠다 싶어
집에서 기다리는 나와 아이들은 조금은 신경이 쓰였다.

큰 아들은 친구들에게 찬호형이 우리집에 온다고 자랑도 미리 해놓고
싸인 받을 공도 미리 준비하고 샤워까지 하고 들떠서 기다리는데 비해
막내는 부시시한 츄리닝 차림으로 제 할일만 하고 있길래
옷좀 갈아 입으라고 해도 들은척도 하지 않는다. 하기사 부시 대통령이
온다해도 눈썹도 꿈쩍 안할 아이 이기는 하지만…(둘이가 참 달라서
키우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다.)

11시가 다 된 늦은 시간에 남편과 함께 들어선 박 찬호 선수는
TV 화면보다 훨씬 잘생기고 키가 큰 청년이였다.
식사를 시작할때 시합하고 와서 목이 많이 마를 것 같아 얼음냉수를 갖다주니
차가운물이 몸에 맞지 않는다며 자신이 가져온 미지근한 상온의 생수를
마시는 박 찬호 선수를 보며 자신의 몸관리를 철저히 하는 프로다운
점이 인상적이었다. – 현역선수시절, 커피숖에 가서도 하얀 우유 시켜먹던
남편 모습이 다시 오버랩 되는 순간 이었다.

식사를 마친후 차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대화의 대부분은 야구이야기 였다.
요즘 던지는 구질에 대해, 게임 운영에 대해
다른 투수들의 장점에 대해……

나는 야구의 기술적인 면을 잘 몰라서 다 이해할수는 없었지만
야구를 좋아하는 남편과 박찬호 선수의 야구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또 늦은 나이에 (고2) 미국에 와서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있는 큰 아이를
격려해 주기도 하고 ,이제 곧 다시 낯선 환경인 군대 입대를 앞둔 아이에게 맏형처럼 자신은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자상하게 이야기 해주기도 하고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막내하고는
키재기도 해보며 짧았지만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내가 만나본 박찬호 선수에게서 떠오르는 것은
‘운동선수’라는 직업과는 잘 안어울리는 듯한
‘감성적’ 이라는 단어이다.
생각도 많아 보이고 감수성도 풍부해 보이는 박찬호 선수 인지라
무딘 사람은 겪지 않아도 될 마음고생을 남보다 더 했을꺼란 생각을 해보았다.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연봉,
넓은 미국 땅 덩어리에 알려진 그의 이름,
그가 던지는 일구 일구에 기뻐하기도 하고, 욕 하기도 하는 한국의 많은
팬들, 그가 하는 사소한 말 한마디도 본인의 뜻과 상관없이 왜곡되고
부풀려 지는 많은 기사들, 만나는 사람마다 인간 박찬호가 아닌 야구선수
박찬호에 대한 칭찬과 질타.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을 지키고
이 자리에 오기까지 치루어야 했을 많은 어려움을 생각하니 남편의
말대로 등을 툭툭 두들겨 주고 싶었다.

박찬호 선수만큼은 아니지만 꽤 유명한 남편과 오래 살면서
나는 가끔 유명함의 득과실에 대해 생각해본다.
현역선수 시절 남편과 내가 틈만 나면 다짐한 것 중에 하나가
‘유명함이 주는 편리함에 중독되지 말자’ 는 것이었다.
은행에 가도, 동사무소에 가도, 식당에서도, 심지어 병원에서 조차
순서를 무시하고 특별대우를 받게 되는 유명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나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젖을수 있다.

예전에 어떤 실력파 여배우의 인터뷰를 우연히 본적이 있다.
그분 왈 “연예인을 포함한 유명인들은 <공주병><왕자병>에 걸릴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마주치는 사람
들이 면전에다 대놓고 싫다라는 표현은 거의
하지 않고 인사치레로라도 잘한다, 당신 좋아한다, 훌륭하다, 하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주나 왕자가 되어있다.” 고 한다.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요즈음은 인터넷의 발달로 유명인에 대한 안티들의
활동도 또한 만만치는 않다.
나도 한번씩 남편에 대해 사실과 전혀다른 엉뚱한 글들을 인터넷에서
대할때면 한 개인의 인격과 사생활이 ‘유명인’ 이라는것 하나 때문에
이렇게 무참하게 가쉽거리가 되어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든적도 있다.

어쨋든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특별대우가 되었든, 가쉽의 소재가 되었든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그런 일들을 잘 관리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

요즈음 사람들이 그렇게 얻기 원하는 <유명함>,<인기>, 이런것들의
덧없음을 알려면 시간도 필요하겠지만, 어떤 칭찬이나 어떤 욕에도 흔들리지 않을
‘자연인으로서의 자신’을 끊임없이 자각하는 노력도 참 필요한것 같다.

아주 늦은 밤, 남편과 함께 박 찬호 선수를 숙소로 데려다 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 아이들이 미국에 와서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화려한 생활과
엄청난 연봉들을 보면서 가끔씩은 “엄마, 우리아빠도 10년만 젊든지,
메이저진출을 좀 빨리 했으면 미시간 호숫가에 그림같은 집에
살고 있겠지?..” 하고 너스레를 떤다.

그럴때 마다 난 늘 이렇게 대답한다.
“아빠는 아빠시대에 해야할 일을 최선을 다해서 했고, 결과도 좋았기
때문에 참 복많은 사람이다” 라고….

프로야구 초창기의 척박한 환경속에서도 직업야구선수로서
최선을 다해준 남편이나, 메이저리그의 높은 벽을 실력으로 넘어서서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준 박찬호 선수나 유명했다, 인기 있었다,
하는 평가보다는 ‘최선을 다하고 성실하고 실력있는 야구인’ 으로 오래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
다.

헐크 아내 이신화 씀

최민규 기자 didofido@h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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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5-27 08:45   좋아요 0 | URL
우와, 참 멋진 아내를 가졌군요. 이만수 선수는......
어디 하나 버릴 데가 없는 말입니다.
박찬호 선수에 대해서도 더 호감이 생기는군요.^^

로드무비 2005-05-27 08:52   좋아요 0 | URL
'이만수와 그의 아내, 그리고 박찬호'라는 제목을 새로 달아 제
방에 올렸습니다. 너무 재밌고 좋은 글이어서요.
괜찮죠? 니르바나님?^^

니르바나 2005-05-27 09:50   좋아요 0 | URL
당근 괜찮지요. 로드무비님.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2005-05-27 1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여우 2005-05-27 12:32   좋아요 0 | URL
여고때 하이틴 우상 중 한 분이셨던 분, 이만수...
팀의 기운을 북돋아주는 멋진 포수이자 타자였던 분입니다.
최동원, 박노준, 선동렬, 이만수, 박철순......문득 생각나서 적어 보았어요
이 코치와 그의 아내..
부창부수가 이럴 때는 최상급의 의미로 쓰여야겠군요.

니르바나 2005-06-02 07:50   좋아요 0 | URL
파란여우님께도 우상이 계셨군요.
저와 비슷하게 통과하신 그 길이 아름다워 보입니다.
어울림이 있어야 귀에 거슬리지 않아 듣기 편한 음악이 되지요.
아무래도 불협화음으로 음악을 만드는 현대음악은 불편하듯이요.
 

         

   

어제 오늘 제 마음에 담은, 가방에 넣은 책들입니다.

길과 法은 다른 것이 아닐겝니다.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결국은 法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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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5-25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만이 희망이라던 박노해의 글이 상통하는듯한 말씀입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는 요즈음, 스승님이 많더군요.

니르바나 2005-05-27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은 드러난 길뿐 아니라 온라인이라는 길위에서도 많은 제자를 두신 스승님이십니다. 언젠가 그 法을 펼치실 날을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