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길  
                                                    

                                                           최하림

남제주에 봄이 상륙했다는 春信이 오고 난 뒤부터  

쩡쩡쩡쩡 해동 소리 산을 울린다 물속의 열목어도 잠에서 

깨어나 꼬리를 들고 강물도 숨 쉬기 시작한다 나는 겨울 

의 굽이에 누워 옴짝달싹 않는다 나는 나이고 너는 너 

다! 그러자 하늘의 통제실에서 경고성 버저가 삐익삐익 

울린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또 밤이 지나간다 부드러 

운 바람이 골짜기를 빠져나가고 수류가 소리를 내기 시 

작한다 나는 더 버티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빠르게 숲을 

뚫고 저수지 길로 내려간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얼음이 

바위 아래 남아 있고 흙을 파며 두더지들이 통로를 내는 

소리 버석버석 들린다 나는, 내 봄이 빠른 것인지 늦은 

것인지 모르면서 계속 들길을 걸어 내려간다

 <풍경뒤의 풍경> 문학과 지성사

어린이날 가족과 나들이를 나갔다 헌책방에서 몇권의 책들과 함께 구매한 시집이 최하림의 <풍경속의 풍경>이다. 십여일 전쯤 나는 신문에서 최하림 시인의 부고를 접했고 그의 시집을 한권이라도 챙겨두어야 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의 <김수영 평전>은 소장하고 있지만 정작 그의 시집은 한권도 갖고 있지 않았다.

시집 전체를 읽지는 못했지만 봄이어서 그런지 위의 '봄길'에 눈이 간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연상했다. 이상화는 봄은 왔는데 나라를 빼앗겨 그 봄을 온전히 느낄 수 없는 설움을 노래했다. 그러나 이 시는 봄은 오긴 오는 것 같은데, 봄이 오면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아직 온전히 봄이 오지 않았다는 핑게로 도피하고 싶은 마음을 그린다. 지금은 남의 땅은 아니기에 봄이 오면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남의 땅이 아니기에 온전히 나의 결단의 몫이다. 그런데 결단의 용기도 빼앗긴데서 오는 소외감 못지 않은 고독감을 수반한다. 그러기에 사르트르는 '자유에 의해 처단당했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던가? 

유독 겨울이 길었던 한반도에도 분명 봄은 올 것이다. 쩡쩡쩡쩡 해동소리 산을 울린다. 그러나 바위 밑에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얼음이 남아 있다. 

최하림은 김현, 김승옥 등과 동시대 인물이고 그들과 함께 문학활동을 했으니 그 기간이 길었고 시인으로서 우리 문학사에 남긴 족적도 뚜렷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과문한 탓에 그의 시를 많이 읽어보지는 못했고 그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그의 시집을 손에 들었으니 나도 참 둔감한 셈이다.    

최하림과 함께 내게 떠오르는 인물은 그보다는 훨씬 덜 알려진 여림이라는 시인이다. 여림이 본명은 아니다. 그의 이름은 여림의 시집 뒤에 해설을 쓴 그의 친구 박형준이 그를 '영진'으로 부르는 것으로 보아 '영진'인 것 같다. 그러나 성은 알수가 없다. 여림이라는 이름은 그의 선생이었던 최하림을 좋아해서 만든 예명이라는 것이다.  

아이러니칼 하게 나는 여림을 통해 최하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연히 읽게 된 여림의 시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다음 시를 보자.

                  실업  

                                               여림

즐거운 나날이었다 가끔 공원에서 비둘기 떼와 

낮술을 마시기도 하고 정오 무렵 비둘기 떼가 역으로 

교회로 가방을 챙겨 떠나고 나면 나는 오후 내내 

순환선 열차에 앉아 고개를 꾸벅이며 제자리걸음을 

했다. 

가고 싶은 곳들이 많았다 산으로도 가고 강으로도 

가고 아버지 산소 앞에서 한나절을 보내기도 했다 

저녁이면 친구들을 만나 여느 날의 퇴근길처럼 

포장마차에 들러 하루 분의 끼니를 해결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과일 한 봉지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아릅다웠다 아내와 

아이들의 성적 문제로 조금 실랑이질을 하다가 

잠자리에 들어서는 다음날 해야 할 일들로 

가슴이 벅차 오히려 잠을 설쳐야 했다 

  

이력서를 쓰기에도 이력이 난 나이 

출근길마다 나는 호출기에 메시지를 남긴다 

'지금 나의 삶은 부재중이오니 희망을 

알려주시면 어디로든 곧장 달려가겠습니다'  

-------------------- 

그는 결혼한 적이 없다하니 당연히 아이들이 있을 리 없다.  절망적이지만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이 느껴진다. 시가 너무 명확하기에 무언가 덧붇히는게 오히려 군더더기다. 다음 시는 더 절절하다.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 

                             여림 

종일,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를 생각해 봤습니다. 

근데 손뼉을 칠 만한 이유는 좀체 

떠오르지 않았어요. 

 

소포를 부치고, 

빈 마음 한 줄 같이 동봉하고 

돌아서 뜻모르게 뚝, 

떨구어지던 누운물.

 

저녁 무렵, 

지는 해를 붙잡고 가슴허허다가 끊어버린 손목.

여러 갈래 짓이겨져 쏟던 피 한 줄, 

손수건으로 꼭, 꼭 묶어 흐르는 피를 접어 매고 

그렇게도 막막히도 바라보던 세상, 

그  

세상이 너무도 아름다워 나는 울었습니다.  

 

흐르는 피 꽉 움켜쥐며 그대 생각을 했습니다. 

홀로라도 넉넉히 아름다운 그대, 

 

지금도 손목의 통증이 채 가시질 않고 

한밤의 남도는 또 눈물겨웁고 

살고 싶습니다.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 있고 싶습니다. 

 

뒷모습 가득 푸른 그리움 출렁이는 그대 모습이 지금 

참으로 넉넉히도 그립습니다. 

 

내게선 늘, 저만치 물러서 저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여, 

풀빛 푸른 노래 한 줄 목청에 묻고 

나는 그대 생각 하나로 눈물겨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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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실제로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는 듯하다.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는 찾을 수 없었고 자살을 시도하지만 그 극한의 상황에서 그는 다시 살아야 한다는 걸 느낀다. 나는 고독한데 세상은 왜이리 아름다운가.  

기독교는 지상의 삶이란 건 영생을 위한 준비일 뿐이다. 불교는 삶과 죽음을 윤회라는 거대한 틀에서 융합해 버린다. 유교에서는 삶도 모르는 데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갖는 건 사치라고 하면서 삶의 즐거움을 예찬한다. 그리고 역사속에서의 계속적인 삶을 중시한다. 헤겔은 나폴레옹 등 세계사적 영웅이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는 쉽게 제시하는 듯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좀 설명이 부족하다. 쇼펜하우어는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같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사람은 그냥 사는 것이다. 이를 그는 맹목적인 삶의 의지라고 불렀다.  키에르케고르는 신앞의 단독자로서 자기자신을 찾는건 즉 자기가 되는 것이 진정 살아야 할 이유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은 삶은 곧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것이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자살이라고 이야기했던 알베르 카뮈는 삶이라는 것은 타자에서 비롯된 종교나 사상적 시각에서 보면 끊임 없이 산 위로 돌을 굴리는 시지프의 삶처럼 부조리한 것이지만 삶이란 것은 결국 개인적인 것으로서 자신의 삶 자체를 자신이 긍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나의 삶의 신인 것이다.

위의 시들이 실려있는 <안개속으로 새들이 걸어간다>는 여림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친구가 묶어서 펴낸 유고 시집이다. 그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인이었지만 그외 어떤 곳에도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한다. 그는 고독했지만 삶에 대한 애착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말았다. 그가 자살했는지의 여부는 모른다. 그냥 쓸쓸하게 홀로 죽어갔다고 그의 스승과 친구는 쓰고 있다. 110편의 유작을 남긴 채.

최하림은 그가 침묵의 시인이었다고 말한다.  

"밤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꿈꿀 수 없듯이 침묵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말(詩)을 얻을 수 없다. 침묵은 말의 중단이나 포기가 아니다. 말과 대척적인 존재도, 수동적 존재도 아니다. 그것은 無와 같이 끝없이 존재할 뿐 아니라 모든 有를 끌어안고 거기에 숨을 불어 넣어준다. 그래서 침묵은 무엇이 태어나려고 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임마뉴엘 칸트는 밤하늘의 별을 볼 때마다 경이감에 사로잡힌다고 했는데, 이때의 경이는 별의 빛, 즉 침묵의 빛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최하림에 따르면 여림의 시들은 경이로운 침묵의 빛인 셈이다. 이제 여림도 그의 삶과 죽음을 애닯아 하던 최하림도 영원한 침묵 속으로 들어갔다. 침묵의 빛을 남긴 채.  절망 속에서 발한 침묵의 빛이 오히려 삶에의 의욕을 채찍질하는 듯 하다.

겨울, 북한강에서 일박  

                                        여림

흐르는 강물에도 세월의 흔적이 있다는 것을 

겨울, 북한강에 와서 나는 깨닫는다 

강기슭에서 등을 말리는 오래된 폐선과 

담장이 허물어져 내린 민박집들 사이로 

하모니카 같은 기차가 젊은 날의 유적들처럼 

비음 섞인 기적을 우리며 지나는 새벽 

나는 한 떼의 눈발을 이끌고 강가로 나가 

깊은 강심으로 소주 몇 잔을 떨구었다 

조금씩 흔들리는 섬세한 강의 뿌리 

이 세상 뿌리 없는 것들은 잠시 머물렀다 

어디론가 쉼 없이 흘러가기만 한다는 것을 

나는 강물 위를 떠가는 폐비닐 몇 장으로 보았다 

따뜻하게 안겨오는 강의 온기 속으로 

수척한 물결은 저를 깨우며 또 흐르고 

손바닥을 적시고 가는 투명한 강의 수화, 

너도... 살고 싶은 게로구나 

깃털에 쌓인 눈발을 털어 내며 물결 위로 초승달 

보다 더 얇게 물수제비뜨며 달려나가는 철새들 

어둠 속에서 알처럼 둥근 해를 부화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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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day in the life 

                                  Lennon/MacCartney 

I read the news today oh boy
About a lucky man who made the grade
And though the news was rather sad
Well I just had to laugh
I saw the photograph
He blew his mind out in a car
He didn't notice that the lights had changed
A crowd of people stood and stared
They'd seen his face before
Nobody was really sure
If he was from the House of Lords.

I saw a film today oh boy
The English Army had just won the war
A crowd of people turned away
but I just had to look
Having read the book
I'd love to turn you on

Woke up, fell out of bed,
Dragged a comb across my head
Found my way downstairs and drank a cup,
And looking up I noticed I was late.
Found my coat and grabbed my hat
Made the bus in seconds flat
Found my way upstairs and had a smoke,
and Somebody spoke and I went into a dream

I read the news today oh boy
Four thousand holes in Blackburn, Lancashire
And though the holes were rather small
They had to count them all
Now they know how many holes it takes to fill the Albert Hall.
I'd love to turn you on
---------------------------------------------------------------   

Jeff Beck이 연주한 A day in the life. 비틀즈의 곡이지만 Jeff Beck의 연주곡도 들을만 하다.

제프벡. 에릭 클랩턴, 지미 페이지와 더불어 3대 기타리스트로 불렸던 사나이. 3대니 5대니 나누는 것은 참 도식적인 발상인데 3대에 들어간 인물들은 한 없이 높이고 거기에 끼지 못한 사람은 좀 떨어지는 것으로 보게 만드는 악효과가 있다.  경지에 오른 기타리스트들은 나름대로의 혼을 담아 연주하는 것일 텐데 거기에 등급을 매기는 것은 많은 것을 잃게 만들고 그 등급을 맹신하는 사람들에게 보는 눈을 상실하게 만든다.  

나도 이러한 도식에 빠져서 많은 것을 놓쳐 버린 것 같다. 소위 3대 기타리스트 중  에릭 클랩턴이 제일이요 다음이 제프 벡, 다음이 지미 페이지라고들 했는데 실상 최고의 기타리스트는 요절한 지미 헨드릭스라는 것이 월간 팝송 등을 통해 내가 갖고 있던 통념이었다. 그냥 그렇게 믿어버린 것이지 왜 그런지에 대한 나만의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많은 곡을 들어 본 것은 아니나 기타 문외한의 입장에서 단순한 감상을 반추해 보면 솔직히 에릭 클랩턴은 좀 가볍게 느껴졌고 지미 페이지는 좀 딱딱하게 느껴졌고 제프 벡이 좀더 감성에 호소하는 바가 있는 것으로 느꼈었다. 제프 벡의 경우 야드버즈의 앨범 하나를 들어 본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러나 나는 나만의 느낌의 근거를 강화하고 그것을 발전 시키는 것을 포기했고 3대 기타리스트라는 언어에 현혹되어 다른 많은 위대한 기타리스트들의 연주를 열린 마음으로 감상하는 여유를 갖지 못했다.

얼마전 제프 벡의 내한 공연이 있었다. 가보고 싶었으나 무슨 일로 바빴는 지 우물쭈물 미루다 결국 놓쳐 버렸다. 사실 록 음악을 진지하게 감상했던 시절도 이미 까마득한 과거고 3대 기타리스트니 하는 것도 일상사에 묻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지 오래였다. 지금도 꾸준히 활동을 하는 에릭 클랩턴이나 접근이 쉬운 레드 제플린의 지미 페이지에 비해 제프 벡은 더더욱 망각의 늪으로 사라져 갔다. 제프 벡의 위대한 기타 연주를 들으며 풋풋했던 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공연을 놓친 것이 좀 아쉽다. 

어린이날 휴일 오전 음악이라도 틀어 놓으려 아이팟 휠을 이리저리 돌리다 제프 벡의 A day in the life에서 멈춘다. 굳이 가사 없이도 제프 벡의 연주만으로도 A day in the life의 맛이 우려 난다. 그래도 가사를 찾아 읽어 보니 마치 우리의 현실을 말하고 있는 듯 하다. MB 시대의 부조리한 현실을...  

 I'd love to turn you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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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날의 편지

                    - 이해인


모랫벌에 박혀 있는
하얀 조가비처럼
내 마음속에 박혀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슬픔 하나
하도 오래되어 정든 슬픔 하나는
눈물로도 달랠 길 없고
그대의 따뜻한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다른 이의 슬픔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듯이
그들도 나의 슬픔 속으로
깊이 들어올 수 없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지금은 그저
혼자만의 슬픔 속에 머무는 것이
참된 위로이며 기도입니다

슬픔은 오직
슬픔을 통해서만 치유된다는 믿음을
언제부터 지니게 되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항상 답답하시겠지만
오늘도 멀찍이서 지켜보며
좀 더 기다려 주십시오

이유없이 거리를 두고
그대를 비켜가는 듯한 나를
끝까지 용서해 달라는
이 터무니 없음을 용서하십시오
------------------------------------------

이 시는 '소통 불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이고
많은 것을 공감하는 듯 해도
소통되지 못하는 그 무언가는 늘 남는 것 같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소통되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있기에
소통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완벽한 소통이란 결국 구별이 없다는 것이고
소통할 필요도 없는 하나의 동일체일 것이다.

소통한다는 것은  영원히 소통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주는 공허감을
메우기 위한 환유적 행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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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각에서 간행한 <벽암록> 번역본은 꽤 오랬동안 알라딘 보관함에 보관해 두었는데 어느날 품절 되어 버린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다른 인터넷 서점들을 검색해 보니 다른 서점들도 대부분 품절이었는데 다행히 한 서점에 재고가 있어서 주문을 넣었다. 재고 확보에 시간이 걸렸는지 배송까지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걸렸고 오늘에야 <벽암록>이 배달이 되었다.  역시 대부분의 서점에서 품절된 것으로 나타나는 <조주록>도 <벽암록>과 함께 이 서점에서 주문했었는데 <벽암록>만 분리배송되어 오늘 도착했고 <조주록>은 오늘에야 출고가 되었다는 문자가 날아왔다.  

이 서점에서는 품절 직전의 책들을 구입하게 되는 인연이 있는 것 같다. 한 5년 쯤 전에도 그 당시 대부분의 서점에서 품절 상태였던 지식산업사 판 헤겔 <정신현상학>을 이 서점에서 인터넷으로 구입했다. 그 때도 품절본을 어렵게 구해서 배송해 준 것을 고맙게 받았다. 작년에는 역시 다른 서점에서는 품절되었던 가라타니 고진의 <탐구 1, 2>를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구매했었다. 고마워 해야 할 서점인데 평소에 이 서점을 잘 이용하지는 않는다. 책이 품절되었을 때에나 찾는 셈인데 약간은 미안한 마음도 든다.^^

<벽암록>은 최근 석지현 스님이 새로운 번역본을 냈는데 군더더기 없는 장경각 본이 더 마음에 끌린다. 이 책에는 번역자가 명시되어 있지 않은데 연세대 철학과의 신규탁 선생의 번역본이라고 말해도 큰 문제는 없다고 한다. 아무리 선불교에서 불립문자를 외치며 언어의 한계를 지적하지만 번역자를 명시하지 않은 건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선문답이 인간세 소통의 주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문명 사회를 잘 운영하기 위해서는  명료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라캉이 지적했듯이 상징계의 언어는 한계가 있고 표현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남는다. 라캉은 이를 대상 a로 지칭했고 대상 a는 주로 환상을 통해 그 기능을 수행한다. 나는 언어가 한계에 다다른 지점, 그 궁극의 지점에서 바로 禪의 대화가 기능한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禪과 라캉의 관계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고민해보아야 할 주제일 것 같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좌우간 명료하게 말해 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이영철 옮김> 많은 경우 "침묵해야 한다."에 주목하지만 나는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에도 더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복잡한 문명 세계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명료한 언어표현이 필수적이다. 애매한 이야기 뒤에는 음흉한 권력의 욕망이 꿈틀거린다. 버트란드 러셀이 평생 싸우고자 했던 것이 바로 불명료함 뒤에 숨은 부도덕한 권력 의지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문명 세계를 도덕적으로 운위하기 위해서는 '명료함'이 필수적이지만 비트겐슈타인의 말대로 명료하게 말해 질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애매함 뒤에 숨어 있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어떠한 권력의 작용이 '명료하게 말해 질 수 없는 그것'에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해 본다.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넘어 그 뒤에 있는 실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언어 아닌 언어가 바로 禪이 아닐까.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禪을 잘 모른다. 도올 김용옥의 <혜능과 셰익스피어>, 존 우(오경웅)의 <선의 황금시대> 한형조의 <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 등등 개론적인 책을 읽어 본게 전부다.  오늘 벽암록을 받아든 김에 선에 대해 막연히 갖고 있던 생각을 정리하려고 시도해 보았을 뿐이다.    

 

 





 

P.S.  < 벽암록>을 받아들고 제 1 칙인 달마의 "알지 못함(達磨不識)"을 읽었다. 본 칙의 내용이야 <혜능과 셰익스피어> 등에서 이미 읽었기 내 눈은 원오의 착어와 평창을 향했다. 그런데 1 칙에서 달마의 핵심 공안 廓然無聖 (텅비어 성스럽다 할 것이 없다)에 붙은 원오의 착어가 재미있다. 

 "뭐 기특한 줄 알았더니만, 화살이 저 멀리 신라 땅으로 날아가버렸구나"  

갑자기 왠 신라가 튀어 나오는가? 이 신라가 삼국시대의 그 신라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뒤에 붙은 한문 영인본을 찾아보니 인쇄상태가 좋지 않아 읽을 수가 없다. 마침 대만 불광서국에서 간행한 <불광대장경, 선장, 벽암록>을 소장하고 있기에 그 부분을 찾아 보았다. 명료하게 新羅로 되어 있었다. 역시 소장하고 있는 Thomas and J.C. Cleary의 영역본 <The Blue Cliff Record>를 찾아 보니 新羅가 past Korea로 번역되어 있다. 

더 이상의 레퍼런스가 없어서 원오의 착어의 의미를 헤아리지는 못하겠다. 단순히 생각해 보면 달마의 "확연무성"이 기이하고 핵심에서 빗나갔다는 의미 같이 생각되기도 하는데 그런 의미는 아닐 것 같다. 신라가 여기서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었을까 하는 건 좀더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다. 원오는 이미 신라가 망한 이후에 태어난 인물이기에 원오에게서 신라가 어떤 맥락으로 사용되었는지는 더 궁금해진다.  

원오에게 신라가 어떤 의미인지는 현재의 내 지식으론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아무튼 신라 불교는 오늘날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은 것 같다. 중국의 당은 그 시대 최강국으로서 불교에 있어서도 최고봉을 자랑했다. 원효와 의상이 당으로  유학을 가려했던 것을 보아도 그 위세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알려져 있다시피 의상은 결국 당으로의 유학에 성공하여 중국 화엄종의 대성자인 법장과 동문 수학, 해동 화엄종의 시조가 된다. 의상은 법장과 동등히 어깨를 겨루어 중국 불교의 정점 중의 하나인 화엄의 최고 실력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유학을 포기하고 독자적인 연구의 길을 걸었던 원효는 중국의 화엄과 맞먹는 아니 능가하는 불교의 최고 경지를 구가하게 된다. 아직 서양 문물을 소화하기에도 버거운 우리 현실을 반성해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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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 책의 날 기념, 10문 10답 이벤트!

서재를 오래전에 열기는 했는데 내 서재에 무언가를 올리기 보다는 다른 분들의 서재에 기웃거리는 데서 더 큰 재미를 느꼈고 그 재미에 빠져 내 서재에 글을 올리는 것은 미루어 왔다. 너무 미루다 보니 글을 올리는 것이 더 어색해 진 듯도 하다.^^  따라서 10문 10답에 응하는 건 상품권이 탐나서라기 보다는 이 기회에 한편의 페이퍼라도 올림으로써 내가 여기저기 다른 분들의 서재에 기웃거리며 흔적을 남겼을 때, 내 아이콘을 클릭하여 내 서재에 방문했던 분들이 느꼈을 썰렁함을 조금이라도 보상하고자 하는 차원에서이다.^^ 
 

1. 개인적으로 만나, 인생에 대해 심도 있게 대화를 나누고픈 저자가 있다면?   


요즈음은 딱히 내가 읽은 책의 저자 중 누굴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픈 욕구는 별로 없다. 그러고 보니 데리다가 이미 세상을 떠난 사상가를 만난다면 무엇을 물어보겠냐는 질문에 '그들의 성생활'이라는 답을 했다는 게 떠오른다.^^  단순한 농담이지만 현전의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그의 철학이 전제된 철학적 농담이 아닐까 싶다.  

책은 저자 이상이고 저자는 책 이상이다. 책을 읽으면서 상상한 것을 저자에게 직접 확인 해야 확실해 지는 것은 아닐 것 같다.  불교에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닫고 실천하고자 하는 자의 종류에는 성문, 독각, 보살의 三乘 있다고 하는 데 결국 一乘으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유학파들은 암암리에 聲聞 우월주의를 이야기 하는데 대승 불교에서는 성문들이 오히려 비판을 받았다^^ 물론 저자를 만나서 새로운 생각의 모티브를 얻을 수 있을 가능성도 높긴 하다.^^  나는 유학가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자신을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체험을 위함이지 특정 계보를 절대화하기 위한 것이라면 아니감만 못하리라.
 
2. 단 하루, 책 속 등장 인물의 삶을 살 수 있다면 누구의 삶을 살고 싶으세요?


 
 

 

 

 

 

오귀스트 뒤팽 - 도난 당한 편지, 모르그 거리의 살인, 마리로제 수수께끼에서 보여준 추리는 어릴적 나를 사로잡았고 뒤팽과 같은 추리력을 동경했고 그를 닮고 싶었다. 그래서 포우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가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곤 했다. <모르그 거리 살인사건>에서 뒤팽이 친구의 속생각의 흐름을 따라잡고 맞장구를 치는 대목이 있는데 나도 그와 같이 사람들의 속 마음을 꿰뚫어 보고 싶었다.^^  그리고 덜 알려진 소설이지만 <마리 로제 수수께끼>에서 뒤팽이 순수히 신문기사만 가지고 범행의 정황을 추론하는 것은 정말 압권이다. 나도 신문 기사만 가지고 천안함 침몰의 비밀을 추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에드몽 단테스- 재미로만 따진다면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능가하는 소설을 찾기는 힘들 것 같다. 물론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단순한 재미 이상의 많은 것을 말한다. 이 소설의 모티브는 에드몽 단테스의 복수이지만 한편으론 귀족들과 권력 지향적인 인간들의 위선과 뻔뻔함에 대한 철저한 조롱이다.  가끔은 <몬테크리스토 백작>과 같은 권력과 돈을 가진 자가 선한 의지를 가지고 인간세를 바꾼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단테스와 아멜리에가 결합한 몬테크리스토 백작같은 인물이 뒤에서 세상을 조종한다면 인간세는 훨씬더 평화롭지 않을까?

그런데 단 하루라고 한다면 뒤팽이나 단테스의 삶 중 어느 날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다. 결정적 하루는 그 전의 과정이 없인 존재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중의 스티븐 디달러스나 블룸같은 삶을 우리는 실제로 매일매일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3. 읽기 전과 읽고 난 후가 완전히 달랐던, 이른바 ‘낚인’ 책이 있다면?  

 

 

 

 

 

 

 

'완전히 달랐다'는 표현이 좀 과장이긴 한데, <트랜스크리틱>을 읽고 단순히 문학평론가로 알았던 가라타니 고진이 퍽 깊은 사상가이자 실천가라는 걸 알게 됐다.  그후론 그의 모든 책을 사 모으고 있다.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읽고 경박한 유행 사상가로만 알았던 지젝이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 문제를 푸는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욱더 진지하게 주목해야 할 사상가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두 저자에 대해 관심이 생긴건 순전히 로쟈님 덕분이다.^^
 

읽고 실망했던 소설이 있다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인데 나는 카뮈가 선택한 소재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왜 그는 하필 태양 때문에 아랍인을 살해하는 소재를 선택했을까? 사실 내겐 <이방인> 소설 자체보다는 그 소설에 대한 해설이 더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물론 나는 카뮈의 문학세계를 폄하하지 않는다. 김화영 교수가 공들여 번역한 그의 전집 대부분을 소장하고 있기도 하다...

4. 표지가 가장 예쁘다고, 책 내용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책은?
 

  

 

 

 

 

 

 

북디자인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크게 주목하진 않는다. 좋은 표지가 많았는 데 일일이 거론하자니 귀찮고(^^)  순간 떠오르는 건 롤리타 50주년 기념판이다. 눈에 띄는 곳에 책이 있기 때문인데 순전히 표지 때문에 이 책을 선택했다.

5. 다시 나와주길, 국내 출간되길 학수고대하고 있는 책이 있다면? 

하도 많아서 일일이 거론하기도 힘들다. 예를 들어 작년에 나온다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새로운 번역본은 왜 나오지 않는 걸까?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적 공동체>는 절판된 후 왜 재출간되지 않을까? 고익진의 <한국 고대불교사상사>같은 책은 왜 절판이 될까? 김재남의 한 권짜리 <삼정 셰익스피어전집>같은 건 집에 모셔두고 싶은데  왜 다시 나오지 않을까?  그 외에도 부지기수다.

요즈음은 절판될까 두려워 당장 읽을 계획이 없어도 일단은 사둔다. 아마존에 가보면 어떤 책도 절판되지 않고 판매하고 있는 걸 보면 부럽다.

한마디 덧붙히자면 법정 스님의 책들은 계속 출판되면 좋겠다.  유언은 하셨지만 이미 출판된 책은 저자의 손을 떠난 이상 사회의 자산이 아닐까 싶다. 법정 스님의 책들은 맑은 샘물과 같다. 이 샘물이 세상을 정화하지는 못하겠지만 산행 후 들이키는 약수와 같이 가끔은 시원하게 해준다. 우리사회에는 법정스님의 책이 계속 필요하다.

 
6. 책을 읽다 오탈자가 나오면 어떻게 반응하시는지요. 
그냥 볼펜으로 수정해 둔다. 

7. 3번 이상 반복하여 완독한 책이 있으신가요? 

요즈음은 드문데 중고등학교를 걸쳐 <삼국지> , <수호지>, <열국지> 등 중국 소설들을 다독했다. 아마 3번 이상일 듯 싶다. 아버지는  내가 <삼국지>를 많이 읽어서 만만디가 됐다고 하신다.^^  고등학교 때 <데미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다독했던 기억도 있다.  <데미안>의 첫장 두개의 세계는 <보물섬>에서 암시된 두 개의 세계에 대한 느낌을 심도있게 표현한 것으로 느껴졌다. <베르테르의 슬픔>에서는 감정표현의 진지함이랄까, 뭐 그런 것을 깊이 느꼈던 것 같다.

대학교 이후엔 다독이 좀 드물어 지는데 도올 김용옥의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 <노자 철학 이것이다>를 여러번 읽었었다. 생동감있는 사유와 문체로 내 주변의 문화를 되돌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8. 어린 시절에 너무 사랑했던, 그래서 (미래의) 내 아이에게 꼭 읽어주고 싶은 책?   

 

 

 

 

 

 

 

'너무 사랑했던'이란 표현이 좀 그렇긴 한데, <보물섬>, <왕자와 거지>, <비밀의 화원>, <톰 소여의 모험> 등의 책을 권하고 싶다.  초등학교 2년 때 읽은 <보물섬>에 나오는 존 실버는 나에게 선악의 구분이 그렇게 명확한 것은 아니라는 걸 처음 깨닿게 해줬다.  일상적인 선상 대화와 짐이 통속에서 사과를 먹으며 들었던 대화는 얼마나 달랐던가.  <보물섬>의 문제의식이 <지킬과 하이드>로 발전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개인적으론 지킬과 하이드로 가르는 것 보다는 존 실버로 종합되어 있는 게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지 않나 싶다. 스티븐스가 처음 제목으로 생각했던 건 <보물섬>이 아니라 <선상 조리사(The Sea Cook)>였다지 않은가.  

<왕자와 거지>는 신분이란 것의 본질에 대해 <비밀의 화원>은 소통에 대해 느끼게 해준다. 톰 소여와 같은 장난꾸러기가 지금 주변에 있다면 매우 귀찮아 하겠지만 어릴 땐 발랄한 톰소여가 부러웠고, 지금도 귀찮긴 해도 너그럽게 봐줄 것 같기는 하다.^^ 아이들에게 정말 중요한 건 즐겁게 뛰어놀며 느끼는 생동감이 아닐까 싶다. 

  
9. 지금까지 읽은 책 가운데 가장 두꺼운(길이가 긴) 책은?  

<삼국지>일 것 같다. 내가 중고등학교 때 다독했던 것은 방기환 번역본이었는데 최근 김구용 본 한질을 새로 구매했다. 아직 읽지 않았다.  서양소설로는 <카라마조프 형제들>인데, 요즈음 <안나 카레니나>를 시간 날때마다 조금씩 읽고 있고 두 책중 어느 것이 더 분량이 많은 지는 모르겠다.

우리나라엔 대하소설이 참 많은데 난 <태백산맥>의 1권을 읽은 게 전부다. 조정래의 소설들을 높이 평가하지만 개인적으론 대학교 1학년 때 <태백산맥>의 제 1권을 읽은 후 나머지 권들은 읽지 않았다. 뭐랄까, 개인적으론 좀 상투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언젠가 시간을 내서 조정래의 역사소설들을 완독하고 싶은 욕구는 있다. 박경리의 <토지>, 홍명희의 <임거정>도 언젠가는 완독해야 할 텐데...

 
10. 이 출판사의 책만큼은 신뢰할 수 있다, 가장 좋아하는 출판사는?
이 출판사의 책만큼은 신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적은 없는 것 같다. 민음사, 한길사, 문학과 지성사, 창비 모두 기본적인 신뢰를 갖고 있다. 철학이 돋보이는 출판사라면 서광사도 높이 평가하고 열화당이나 눈빛 등 개성있는 출판사들을 존경스럽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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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올려보니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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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10-05-01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상보다 길게 쓰셨는데요.^^

푸른바다 2010-05-02 12:16   좋아요 0 | URL
ㅎㅎ 방문해 주셨네요^^ 쓰다 보니 길어지더군요^^ 사실 너무 길어질 것 같아 많은 부분을 삭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