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님의 "9월의 읽을 만한 책"

이윤기 선생의 사망 소식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아직 젊은 나이고 더 좋은 업적을 내실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가 딸과 시작했던 셰익스피어 전집 번역 작업도 이렇게 허무하게 종지부를 찍게 되는 군요. 따님 혼자서라도 그 일을 마무리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의 책들을 많이 읽어본 건 아니고, 몇몇 번역본에 논란이 있다는 것도 알고는 있지만, 아무튼 그는 열심히 노력하신 분이고 서양문화의 이해에 대한 공헌도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데이비드 봄의 책은 <현대물리학의 철학적 테두리>라는 제목으로 민음사 대우학술총서로 번역되었던 책입니다. 오래된 새책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the implicate order'는 보통 '내함된 질서' 혹은 '내포 질서(민음사 판)'로 번역되었는데 '접힌 질서'는 새로운 번역용어로군요. 전 개인적으론 '내함된 질서'라는 말을 좋아합니다만... '접힌 질서'는 잘 와닿지 않습니다.^^ 아무튼 새번역본은 구 번역본보다 나은 점이 있겠지요. 독일어에 문외한인 저로선 '고통'이 '슬픔'보다 독일어 단어의 의미에 더 가까우리란 걸 부정할 도린 없지만, '슬픔'이 이미 한국어에 깊숙히 들어와 있는데 굳이 '고통'으로 바꾸어야할 이유를 이해하긴 힘들군요. '슬픔'은 '고통'이라는 한국어 단어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독일어의 원의가 무엇이었던 간에 베르테르가 느낀 것은 단순한 '고통'이 아닌 '슬픔'이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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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가 1960 

                           보르헤스

내 운명이라는 이 꿈을 주관하는 

명확한 우연이나 은밀한 법칙이 바라네. 

물방울인 내가 강물인 너와 대화를 나누기를, 

순간인 내가 연속적 시간인 너와 대화를 나누기를, 

그리고 으레 그러하듯 진솔한 대화가 

신들이 사랑하는 의식과 어둠, 

또한 시의 고상함에 호소하기를. 

영광과 굴욕이 교차하는 

다사다난했던 일백오십년을 품에 보듬는 

아, 필연적이고 달콤한 조국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 민음사, 우석균 옮김)  

어제 아르헨티나와 독일의 월드컵 축구 경기를 봤는데, 특별히 한 팀을 응원해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심정적으로는 아르헨티나가 이기기를 바랬다. 독일에 비해 아르헨티나에 더 친밀감을 느끼거나 해서는 아니었고 남미의 다른 강호 브라질이 떨어졌기 때문에 아르헨티나라도 올라가 남미와 유럽이 균형을 맞추는 것이 좀더 공평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결과는 많은 사람들의 예상이나 내 심정적인 응원과는 달리 아르헨티나의 참패로 끝났다. 개인적으로 아르헨티나를 응원하긴 했지만 경기 시작 전부터 왠지 독일이 이길 것 같다는 예감을 갖기는 했었다. 잉글랜드를 대파한 독일의 기세가 대단해 보였기 때문이다. 

독일에 대패한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좀 측은해  보이는 김에, 보르헤스의 시집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를 꺼내 읽어 보았다. 개인적으로 네루다의 시보다는 보르헤스의 시들를 더 좋아한다. 네루다는 초현실주의적 경향도 보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그는 서정시인이고 낭만주의적 경향이 강하다. 반면 보르헤스는 엘리엇과 같이 매우 주지주의적인 경향을 보인다. 언어의 장벽 때문에 아무래도 번역된 서정시 보다는 번역된 주지주의 시가 더 이해하기 쉬워서 인지도 모르겠다.  

송가 1960 이라는 제목의 위의 시는 아마도 아르헨티나 건국 150주년을 기념한 시인 것 같다. 시집에 별다른 배경 설명은 없지만 금년(2010)이 아르헨티나 건국 200주년이기에 당연히 1960년은 150 주년이었을 테고, "다사다난했던 일백오십년"은 아르헨티나의 건국후 150년 역사를 말하는 것이리라. 결국 아르헨티나는 1810년에 건국된 셈인데, 이 시기는 나폴레옹에 의해 스페인이 정복되고 남미 지역에 대한 스페인의 지배력이 현저히 약화된 이후의 일이다. 인접국인 칠레도 금년이 독립 200주년인 것을 보면 그 시기에 남미의 많은 국가들이 일제히 독립을 쟁취한 것 같다. 

보르헤스가 말했듯이 길지 않은 역사 동안 많은 아르헨티나에는 영광과 굴욕이 있었을 것이다. 페론주의-군사 쿠데타의 반복으로 상징되는 굴곡많은 정치사를 배경으로 아르헨티나는 호소력을 가진 문화들을 창출해 냈다. 보르헤스의 문학이 그렇고, 탱고 음악이 그렇고 종속이론에서 최근의 라클라우까지 이어지는 사회과학도 그렇다. 아르헨티나는 단순히 축구만을 잘하는 나라는 아닌 것이다.  

 

" 물방울인 내가 강물인 너와 대화를 나누기를, 

      순간인 내가 연속적 시간인 너와 대화를 나누기를, " 

개인과 역사에 대한 참으로 멋진 메타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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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이노의 비가

                                                릴케

내가 설령 울부짖는다 해도 여러 서열의 천사들 중 누가
이 소리를 들어줄 것인가? 만일 천사가 하나
갑자기 나를 가슴에 끌어 안는다면 그 강한 존재에 눌려
나는 사라지리라.  왜냐하면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겨우 견딜 수 있는 무서운 일의 시초에 불과하기에.
우리가 그토록 찬탄하는 것은 우리를 멸망시킴을
잠잠히 거부하기 때문이다. 천사는 모두 무서운 존재.
그러므로 스스로를 억누르며 어두운 오열이 유혹하는
부름을 나는 그저 삼켜버린다. 아, 우리는 그 누구를
부릴 수 있는가? 천사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다.

릴케 두이노의 제 1 비가 중 (릴케 문학선, 두이노의 비가 외, 구기성 번역, 민음사)
--------------------------------------------------------------------
첫 구절에서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강력하게 사로잡는 시는 흔치 않은 것 같다.
독일인이 독일어 원문을 읽고 느낄 파워가 한국어 번역으로 제대로 전달되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지만
이 번역으로도 두이노의 비가  서두는 충분히 마음의 깊은 곳에서 강하게 치고 올라오는 느낌을 유발한다.

사실 난 오랬동안 릴케를 참으로 부당하게 평가해왔었다.
어릴 때 인물사전에서 본 '장미꽃에 찔려 죽은 연약한 시인'이라는
말이 각인되었던 탓이다.

그러나 처음으로 접한 두이노의 비가는 이러한 선입관을 깨기에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번역의 한계를 고려해도 말이다. 나는 여기서 강한 역설적 진실을 느낀다.
천사는 완벽한 존재이고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믿는 대상이다.
그러나 릴케는 말한다. 그 어느 천사도 내 울부짖음을 들어주지도 않을 뿐더라
설령 나를 끌어 안는다고 해도 그 '강한 존재'에 눌려 나는 사라지고 말것이라고.

이 구절에서 화이트헤드의 유명한 말이 떠오른다.

'불완전함은 완전함보다 상위이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어떤 과정이 완전성에 도달했을 때
그것은 바로 소멸해 버리고 만다. 완전한 존재는 현실적이지 않은 것이다.
불완전하기에 운동이 있고 운동이야 말로 우리의 생생한 현실태인 것이다.

릴케는 말한다  '천사는 무서운 존재'
천사의 완벽성은 결국 소멸이요 죽음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현존재는 무엇인가?
"인간도 천사도 아니다." 

천사가 아님은 앞의 해석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인간도 아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완전한 존재로서의 천사가 그 완전성 때문에 존재할 수 없다면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그 불완전성 때문에 부릴 수 없는 존재일 것이다. 천사와 인간 모두 부릴 수 없는 대상이지만 그 맥락은 다른 것이다. 결국 천사의 부정은 불완전한 현실에 대한 긍정으로 해소할 수밖에 없지만 불완전은 역시 불완전인 것이다. 

현존재는 완벽하게 아름다울 수 없지만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흘러가는 무생명적인 물질 세계인 것만도 아니다.  현존재는 맹목적인 흐름속에서 새로움을 지향하는 그러한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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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편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

제 1 장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는 것

A. 절망은 정신에 있어서의 병, 자기(自己)에 있어서의 병이며, 거기에는 세개의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절망하고 있으면서 자기를 가지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비본래적인 절망).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욕망하지 않는 경우.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욕망하는 경우.

인간은 정신이다.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이란 자기이다. 자기란 무엇인가? 자기란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의 관계이다. 바꿔말하면 관계가 자기 자신에게 관계한다고 하는 관계의 내부에 있는 자기를 뜻한다. 따라서 자기란, 관계를 뜻하지 않고, 관계가 그 자신에게 관계되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무한성과 유한성의, 시간적인 것과 영원적인 것의, 자유와 필연의 종합이다. 요컨대 인간은 한 종합이다. 종합이란 양자 사이의 관계이다. 이 방법으로 고찰한다면, 인간은 아직 자기는 아니다.

박환덕 역 (범우사 간)

#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은 내가 처음으로 구매했던 철학책이다. 적지 않은 심적인 방황을 하던 고등학교 2학년 시절, 나는 방황에서 벗어나보기 위해 학과 공부 외에 다른 독서에 빠져 있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의 소설은 그 당시 나의 방황을 달래 주던 좋은 친구들이었다. 이러한 심각한 소설들을 탐독하던 나는 심적인 방황의 원인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치유책을 발견하기 위해 소설보다는 철학책에 눈을 돌려야 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침 학교 명상 시간에 낭송된 키에르케고르의 명언 몇 마디에 내 마음이 동하는 바가 있었다. 나는 키에르케고르의 책을 보기 위해 동네 서점에 들렀다. 마침 키에르케고르가 쓴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이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인 것이다.

# 그런데 죽음에 이르는 병은 나에게 최초로 좌절감을 안겨준 책이기도 하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제목을 보면 그 병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들게 되어 있다. 그런데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 이 의문은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라는 제 1편의 제목에서 쉽게 해소된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절망이라... 뒤에 실린 역자의 해설을 읽었다. 그의 생애가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고 여느 전기가 그렇듯 흥미를 끈다. 이런 사람도 있구나...그래 난 절망에 빠져 있으니 이 책에서 치유책을 발견할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책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와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서론이나 서문은 평이하다. 제 1 편 제 1장. A. 절망에는 세계의 경우가 있다...  나는 어떤 경우인가?

그러나 첫문장. '인간은 정신이다.'에서부터 좀 이상하다. 인간은 정신이기만 한가? 그럼 몸은 무엇이란 말인가? 정신이란 자기이다?... 그 뒤로 계속이어지는 문장들. 몇번을 읽어도 그 당시 내게는 '해독할 수 없는 암호문'으로 느껴졌다. 예를 들어 논리적인 모순율을 어긴 것도 발견된다. 인간 = 정신. 정신 = 자기로 규정해놓고 인간은 아직 자기는 아니다?

수십번을 읽어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첫문단을 넘기지 못하고 나는 책을 덮고야 말았다. 그뒤로 몇번을 더 시도해 보았으나 나는 도저히 첫 문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절망을 치유하려 했다가 새로운 좌절에 빠져들었다고나 할까?

#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이러한 좌절을 안긴 키에르케고르는 나에겐 더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박환덕 역, 범우사 간, <죽음에 이르는 병>은 아픈 기억을 남긴채 채 책장 한귀퉁이에 오랜 기간 방치되어 버렸던 것이다. 나는 키에르케고르와 같은 주관적인 사상가에 심취하기엔 너무나 객관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키에르케고르와 같이 실존주의 계열의 사상가인 사르트르의 경우는 독해 불가는 아니었고, 나는 사르트르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에는 많은 부분 공감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변증법적 유물론이나 역사 유물론 등 그 당시 대학가에서 유행했던 철학들에 빠져들어 갔던 것이다.

너무 진지하기만 하고... 삶에 여유가 없어 보이고 기독교에 편협하게 집착하는 듯 보이는 키에르케고르는 이렇듯 좌절의 상처와 해결되지 않은 숙제를 남긴 채 내 관심에서 멀어져만 갔다.

# 그러던 어느날 별안간 이 책의 첫문장이 이해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의식 중에도 계속 숙제로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 책을 꺼내 첫문단을 천천히 다시 읽어보았다.어렴풋이나마 이해가 될듯 싶기도 했다. 내가 이 문단을 이해하지 못했던 건, ‘자기’와 ‘자기 자신’의 차이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키에르케고르에 있어서 '자기 자신'이란 자기를 자기이게 하는 고유의 그 무엇인 것으로 보인다. '자기란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라는 말은 '자기'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상태'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즉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정신 활동은 '자기'가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은 아직 자기는 아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각자에게 고유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A에서 말하는 절망의 3형태도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적 코기토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적인 비판과 확대가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의 첫문단>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생각한다’는 정신활동 그 자체가 바로 존재성을 보장하고, 이것이 바로 정신이 실체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코기토이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에 있어서 단순히 생각하는 행위 그 자체로 존재성은 확보할 수 있을 지 몰라도 그 ‘생각함’이 神이 부여한 자기 고유의 그 무엇을 인식하고 발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존재할 뿐, 무의미요 절망이라는 것이다.

# 결국 핵심은 '자기 자신'이라는 말에 있다. 키에르케고르를 따른다면 神이 부여한 '자기 자신'이 개개인에게 있으며 이를 인식하고 실현하고 있는 상태가 바로 '자기'이며 이것이 바로 절망에서 치유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의문은 神이 부여했는 지의 여부를 떠나 자기에게 고유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하는 점이다.

'자신을 발견한다'는 말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이다. 방황할 때, 우리는 흔히 '자신을 발견하고 싶다'고 말한다.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이 아니고서라도, 우리는 각자에게 고유한 ‘자기 자신’이 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무언가 고유한 나 자신이 있는 것은 느껴진다. 키에르케고르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그러한 것이 느껴지고 작용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자기 자신은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발견하고 발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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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8-18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젊은날 고뇌와 번민으로 방황하다가 이 책을 읽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던 책입니다. 제 인생의 책이라고 할 수 있지요..키에르케고의 저서들은 그의 삶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의 중심에는 언제나 신이 있었죠. 기독교에서 말하는 바로 God요. 이 책에서 말하는 고유한 자기 자신이란, 바로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의 자신입니다. 사변적인 실존이 아니라 유신론적 실존..그 자체요.

푸른바다 2010-08-19 21:12   좋아요 0 | URL
키에르케고르에게서 위안을 얻은 분들이 많으시더군요... <그리스도교의 훈련>과 함께 읽어야 한다는데 아직 이책은 읽지 못했습니다.

제가 키에르케고르와 타협할 수 없었던 부분은 바로 기독교적인 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기독교적인 신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거든요...

yamoo 2010-08-20 14:22   좋아요 0 | URL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 타협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기독교적인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가 없죠. 하지만 키에르케고는 오직 유일신인 God를 체험했습니다. 그의 모든 저서들은 체험에 의한 산물이라고 볼 수 있어요.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서 개인의 체험을 보편화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죠. 하지만 키에르케고는 상당히 성공했다고 보여져요. 저두 키에르케고 전문가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같은 체험을 공유하는 사람으로서 쉽게 유비가 됐습니다~ <그리스도교의 훈련>은 <그리스도교 강요>를 말하는 것인가요? 다른 책이면 저도 구해서 봐야 겠어요~

푸른바다 2010-08-20 17:08   좋아요 0 | URL
아마 다른 책일 겁니다. 제가 알던 제목은 <기독교도의 훈련>이었는데 번역본이 <그리스도교의 훈련>으로 되어 있네요. <죽음에 이르는 병>이 주로 진단에 해당한다면 <그리스도교의 훈련>은 키에르케고르의 처방으로 볼 수 있다고 하네요. 아무튼 두 책은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훈련>은 임춘갑 번역으로 나와 있는데 전 아직 소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최혁순 번역으로 키에르케고르 저작물들 선집이 출판된 걸 오래전에 헌책방에서 발견했는데 거기에도 <기독교도의 훈련>이 일부 포함되어 있더군요. 번역에 신뢰가 가지 않아 구매는 하지 않았습니다만...
 

프레시안 10.6.9 [창비주간논평] '107인 선언'의 기우뚱한 균형감각 - 김종엽

6.2 지방선거가 끝났다. 그 결과 중대한 권력변동이 발생했으며, 정치인과 정당은 이 변화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지게 된다. 하지만 이런 책임으로부터 한발 비켜선 집단들이 있다. 예컨대 정치적 발언을 한 지식인들이 그렇다.

지식인의 정치적 발언은 학문적 명망과 시민적 참여를 적극적으로 결합함으로써 동료 시민들과 동등하게 한표를 행사하는 것 이상의 지도적 행위를 수행하게 된다. 따라서 그만큼 책임의 무게가 무겁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책임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지식인에게는 정치인이나 정당처럼 그 책임이 객관적으로 부과되지 않는다. 따라서 지식인의 정치적 발언은 공론장 안에서 그 책임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해진다.

그런 견지에서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일군의 지식인들이 주도한 하나의 선언과 그 선언의 배경을 이루는 하나의 담론이다. 전자는 '교수·연구자 107명 진보신당 지지선언'(이하 '107인 선언')이고, 후자는 반MB 정치연합을 위한 노력을 '묻지마 반MB연합'으로 격하한 담론(이하 '연합정치 견제론')이다. 대부분 나의 학문적 선배와 동학인 107인의 지식인들의 학문적 업적에 대해 나는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정치적 발언은 비판적 논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지식인의 정치행위가 갖춰야 할 덕목

지식인의 정치적 발언도 그것이 정치적 행위인 한 정치적 행위 일반에 적용되는 기준에 입각해 타당성이 검사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기준으로 나는 막스 베버의 주장이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소명을 가진 정치가는 열정, 책임감 그리고 균형감각(Augenmass)이라는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자질은 직업정치가에 한정되지 않고 진지한 정치적 행위 모두가 충족해야 할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107인 선언의 참여자들은 열정과 책임감이라는 기준을 쉽게 통과할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걸고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지식인의 모습은 깊은 열정을 배경으로 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앞서 이들의 행위가 객관적 책임에 직면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행위가 야기한 사태 전체를 감당하려는 의지의 수준에서 이들이 책임감을 결여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이들의 정치적 발언을 문제삼는 것은 바로 이런 주관적 의지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균형감각의 수준에서 발생하며, 이것이 진정으로 중요하다. 다시 한번 막스 베버를 인용하자면, 균형감각은 "정치가의 매우 중요한 심리적 자질이다. 균형감각이란 내적 집중과 평정 속에서 현실을 관조할 수 있는 능력, 즉 사물과 사람에 대해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이 "거리감의 상실은 그것 자체로서 모든 정치가의 가장 큰 죄과 가운데 하나"이다.

107인 선언이 겨냥하는 바는 명료하다. 그것은 진보신당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호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호소는 상황 판단의 수준에서 그리고 연합정치에 대한 판단에서 사실과 상당한 거리를 가진 것으로 판명되었다.

'107인 선언'의 기우뚱한 균형감각

107인 선언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심판과 비판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판하는 유권자들조차 누구를 찍어야 할지 헷갈리기만 합니다. 대안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만과 분노가 쌓아져감에도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율이 좀처럼 빠지지 않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런 진술은 선거 결과에 의해 잘못된 판단임이 입증되었다. 선언은 정부와 여당에 대한 높은 지지율을 판단 근거로 삼고 있지만 선거 결과는 그간의 여론조사에 체계적 편향이 존재했음을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사실 이명박 정부 아래서 치러진 재보선들이 6.2 지방선거 결과를 어느정도 예시하고 있었음을 생각할 때, 이런 판단은 균형감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일례로 지난해 10.26 안산 재보선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안산 재보선은 민주당의 패권주의의 예로 인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면이 두드러진다는 데에는 십분 동의하지만, 역으로 그런 패권주의적 행태 속에서도 대중이 민주당을 선택한 이유는 깊이 숙고되어야 할 사안이었다. 안산 재보선 결과는 반MB라는 노선이 대중의 목소리에 근거한 것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것만이라면 107인 선언의 균형감각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선언이 발표된 시점이 5월 26일이었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천안함 사건을 통해 정부와 언론이 대대적인 북풍몰이에 나선 상황에서 6·15정상회담 이후 우리 사회 성원들의 심성이 얼마나 근저에서 변화되었는지는 가늠하기 힘들었고, 여론조사 결과 또한 하나같이 야권의 패배를 고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여론조사 일반을 불신하며 사태를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연합정치에 대한 평가 자체가 애초에 균형감각을 결하고 있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07인 선언은 연합정치를 '묻지마 반MB연합'이라고 폄훼하는데, 이런 연합정치 견제론은 107인 선언 훨씬 전부터 손호철 교수에 의해 제기되어 여러 진보적인 학자들에 의해서 줄곧 되풀이돼온 것이어서 6.2 지방선거 직전의 정세에 의존한 판단은 아니었다. 나는 이런 연합정치 견제론이 소극적으로는 민주당의 패권주의를 경계하고 적극적으로는 민주당의 변화와 혁신을 촉구하는 담론으로서 일정한 가치와 객관적 근거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연합정치에 대한 오해: 묻지마 반MB 연합?

하지만 굳이 '묻지마 반MB연합' 같은 표현을 사용해야 했는지에 대해 의구심이 든다. 이런 식의 표현과 그것이 함축하는 프레임은 연합정치의 시도에 대해 어떤 선험적인 불신을 유포한다. 연합정치를 위한 협상이란 당사자들이 모든 정치적 자원을 동원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상호협박과 패권주의가 작동할 수 있는 공간인 동시에 타협과 조율 그리고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에 입각한 섬세한 언어와 결정을 빚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묻지마 반MB연합' 같은 발언은 이런 과정에 각 정당의 진정어린 투신을 촉구함으로써 성과를 이끌어내는 데 일조하기보다 그 과정을 훼손함으로써 연합정치로부터의 이탈을 유도하는 면이 있다. 더불어 스스로 연합정치 견제론이라는 최초의 의도로부터 벗어나 독단론을 굳어버릴 위험도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고 나는 판단한다.

107인 선언은 한 정치학자의 발언을 인용하며 "반MB연합의 틀은 한국정치의 희망이기보다는 절망에 좀더 가까운 결과를 낳았다"고 말한다. 이 발언이 선거 결과에 대한 평가와 합치하지 않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거니와, 이런 사후평가를 떠나서도 그 발언의 전후 맥락을 검토하면 더 심각한 문제가 드러난다. 그는 5+4로 불린 연합정치의 틀을 시민운동의 원로들에 의한 "사제적 권력"의 행사쯤으로 치부하고 이견을 억압하는 "도덕주의적 강요"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과연 5+4(내지 4+4)의 연합정치를 그렇게 볼 수 있을까? 5+4의 구성방식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시민운동이 선거시기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오래된 틀을 깨고 최초로 당파성을 가지고 연합정치에 참여함으로써 형성된 틀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매우 중요한 정치적 실험이었다.

시민운동이 이런 입장을 취한 이유는 한편으로는 참여정부를 경과하면서 보수적 시민단체가 활성화됨으로써 시민운동이 내적 분화를 겪게 된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반민주성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의 법을 빙자하거나 우회하는 통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한명숙 전 총리뿐 아니라 다수의 촛불시민들이나 네티즌에게도 매우 억압적으로 행사되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107인 선언은 대중의 경제적 상황이라는 단일 준거로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신자유주의 세력으로 등치할 뿐, 압제로부터의 정치적 해방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적 성과와 궁핍으로부터의 사회적 해방이라는 사회복지적 성과 사이에서 유지되어야 할 균형감각을 유지하지 못했다.

반MB 정서에서 읽어야 할 것

6.2 지방선거를 앞둔 시민들 가운데 상당수는 언젠가 이명박 대통령의 통치가 실패로 귀결될 것임을 믿었다고 생각된다. 문제는 4대강 사업이나 천안함 사건에서 보듯이 이명박 대통령의 실패가 우리 모두의 실패가 될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명박 대통령의 통치 가운데 적어도 일부는 당장 중지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이 대중적인 반MB 정서의 핵일 것이다.

이런 대중의 지향을 생각하면 5+4 같은 시도는 더욱 존중되어야 옳다. 그런 형태의 틀이 충분한 성과를 냈는가는 별도로, 거기 참여한 시민운동가들은 연합정치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 대중의 반MB 투표행위로 인해 민주당의 패권주의가 더 강화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연합정치를 통해 민주당과 진보적인 정당들의 동반상승을 지향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균형감각을 고려한다면, 나는 저명한 지식인들이 자기 존재를 걸고 더 의미있게 6.2 지방선거에 개입하는 다른 방식이 적어도 두 가지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연합정치 견제론을 좀더 이른 시기에 더욱 힘차게, 그러나 '묻지마 반MB연합' 같은 선동적 용어를 쓰지 않으면서 밀고 나감으로써 패권주의의 위험이 흐르는 정치적 협상을 제어할 규범적 틀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107인 선언이 나온 5월 26일 시점의 상황을 더 충실히 고려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 시점에서 지식인들이 진정으로 개입해야 할 지점은 진보신당에 대한 지지이기보다 이명박 대통령의 5.24선언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5.24선언을 통해서 천안함사건을 둘러싼 모든 합리적 의문을 배제했다. 설령 합조단의 발표가 이명박 대통령 자신에게 확신에 이를 만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는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의 폭넓은 합의를 뒤집는 선언을 하기 위해서 국민적 논의를 구하지도 않았으며, 폭넓은 논의는 차치하고라도 또다른 주권적 기관인 국회와도 아무런 논의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선언 장소조차 청와대나 국회가 아니라 하필이면 전쟁기념관에서 했다.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식의 대통령의 발언이야말로 합리주의의 보루가 되어야 할 지식인들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즉각 제동을 걸어야 했을 사안이었으며, 그것이 107인의 지식인이 동반자적 관점을 가진 진보신당을 보호하고 확장하는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김종엽 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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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엽 교수가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의 많은 부분을 해 준 것 같다. 많은 경우 지식인들, 특히 사회과학을 전공한 지식인들은 자신의 이론적인 틀에 현실을 끼워 맞출 뿐인 것 같다. 그리곤 현실을 이해하지도 설명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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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1 18: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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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1 18: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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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2 11: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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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2 11: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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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2 12: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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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2 12: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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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2 16: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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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2 21: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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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2 23: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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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6-20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과의 공조에 힘쓴 민노당의 선택이 진보신당보다 더 현명했다고 봅니다.선거결과로 봐도 그렇구요.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은 민노당과 진보신당이 합쳤으면 좋겠다는 말을 덕담처럼 하는데 이번에 선거에 임하는 양당의 태도를 보면 그 차이가 너무 큽니다.그리고 진보신당의 눈으로 보면 민노당의 선거연합은 진보의 가치를 훼손한다는 결론을 내릴 것 같습니다.진보신당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신자유주의라는 범주로 함께 묶는 한 민노당의 이번 선거연합은 그런 신자유주의자인 민주당과 몸을 섞은 야합으로 보일테니까요.

푸른바다 2010-06-21 21:40   좋아요 0 | URL
예, 민노당 세력이 진보신당 세력보다는 좀더 현실감이 있는 듯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