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각에서 간행한 <벽암록> 번역본은 꽤 오랬동안 알라딘 보관함에 보관해 두었는데 어느날 품절 되어 버린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다른 인터넷 서점들을 검색해 보니 다른 서점들도 대부분 품절이었는데 다행히 한 서점에 재고가 있어서 주문을 넣었다. 재고 확보에 시간이 걸렸는지 배송까지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걸렸고 오늘에야 <벽암록>이 배달이 되었다.  역시 대부분의 서점에서 품절된 것으로 나타나는 <조주록>도 <벽암록>과 함께 이 서점에서 주문했었는데 <벽암록>만 분리배송되어 오늘 도착했고 <조주록>은 오늘에야 출고가 되었다는 문자가 날아왔다.  

이 서점에서는 품절 직전의 책들을 구입하게 되는 인연이 있는 것 같다. 한 5년 쯤 전에도 그 당시 대부분의 서점에서 품절 상태였던 지식산업사 판 헤겔 <정신현상학>을 이 서점에서 인터넷으로 구입했다. 그 때도 품절본을 어렵게 구해서 배송해 준 것을 고맙게 받았다. 작년에는 역시 다른 서점에서는 품절되었던 가라타니 고진의 <탐구 1, 2>를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구매했었다. 고마워 해야 할 서점인데 평소에 이 서점을 잘 이용하지는 않는다. 책이 품절되었을 때에나 찾는 셈인데 약간은 미안한 마음도 든다.^^

<벽암록>은 최근 석지현 스님이 새로운 번역본을 냈는데 군더더기 없는 장경각 본이 더 마음에 끌린다. 이 책에는 번역자가 명시되어 있지 않은데 연세대 철학과의 신규탁 선생의 번역본이라고 말해도 큰 문제는 없다고 한다. 아무리 선불교에서 불립문자를 외치며 언어의 한계를 지적하지만 번역자를 명시하지 않은 건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선문답이 인간세 소통의 주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문명 사회를 잘 운영하기 위해서는  명료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라캉이 지적했듯이 상징계의 언어는 한계가 있고 표현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남는다. 라캉은 이를 대상 a로 지칭했고 대상 a는 주로 환상을 통해 그 기능을 수행한다. 나는 언어가 한계에 다다른 지점, 그 궁극의 지점에서 바로 禪의 대화가 기능한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禪과 라캉의 관계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고민해보아야 할 주제일 것 같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좌우간 명료하게 말해 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이영철 옮김> 많은 경우 "침묵해야 한다."에 주목하지만 나는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에도 더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복잡한 문명 세계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명료한 언어표현이 필수적이다. 애매한 이야기 뒤에는 음흉한 권력의 욕망이 꿈틀거린다. 버트란드 러셀이 평생 싸우고자 했던 것이 바로 불명료함 뒤에 숨은 부도덕한 권력 의지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문명 세계를 도덕적으로 운위하기 위해서는 '명료함'이 필수적이지만 비트겐슈타인의 말대로 명료하게 말해 질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애매함 뒤에 숨어 있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어떠한 권력의 작용이 '명료하게 말해 질 수 없는 그것'에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해 본다.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넘어 그 뒤에 있는 실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언어 아닌 언어가 바로 禪이 아닐까.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禪을 잘 모른다. 도올 김용옥의 <혜능과 셰익스피어>, 존 우(오경웅)의 <선의 황금시대> 한형조의 <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 등등 개론적인 책을 읽어 본게 전부다.  오늘 벽암록을 받아든 김에 선에 대해 막연히 갖고 있던 생각을 정리하려고 시도해 보았을 뿐이다.    

 

 





 

P.S.  < 벽암록>을 받아들고 제 1 칙인 달마의 "알지 못함(達磨不識)"을 읽었다. 본 칙의 내용이야 <혜능과 셰익스피어> 등에서 이미 읽었기 내 눈은 원오의 착어와 평창을 향했다. 그런데 1 칙에서 달마의 핵심 공안 廓然無聖 (텅비어 성스럽다 할 것이 없다)에 붙은 원오의 착어가 재미있다. 

 "뭐 기특한 줄 알았더니만, 화살이 저 멀리 신라 땅으로 날아가버렸구나"  

갑자기 왠 신라가 튀어 나오는가? 이 신라가 삼국시대의 그 신라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뒤에 붙은 한문 영인본을 찾아보니 인쇄상태가 좋지 않아 읽을 수가 없다. 마침 대만 불광서국에서 간행한 <불광대장경, 선장, 벽암록>을 소장하고 있기에 그 부분을 찾아 보았다. 명료하게 新羅로 되어 있었다. 역시 소장하고 있는 Thomas and J.C. Cleary의 영역본 <The Blue Cliff Record>를 찾아 보니 新羅가 past Korea로 번역되어 있다. 

더 이상의 레퍼런스가 없어서 원오의 착어의 의미를 헤아리지는 못하겠다. 단순히 생각해 보면 달마의 "확연무성"이 기이하고 핵심에서 빗나갔다는 의미 같이 생각되기도 하는데 그런 의미는 아닐 것 같다. 신라가 여기서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었을까 하는 건 좀더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다. 원오는 이미 신라가 망한 이후에 태어난 인물이기에 원오에게서 신라가 어떤 맥락으로 사용되었는지는 더 궁금해진다.  

원오에게 신라가 어떤 의미인지는 현재의 내 지식으론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아무튼 신라 불교는 오늘날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은 것 같다. 중국의 당은 그 시대 최강국으로서 불교에 있어서도 최고봉을 자랑했다. 원효와 의상이 당으로  유학을 가려했던 것을 보아도 그 위세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알려져 있다시피 의상은 결국 당으로의 유학에 성공하여 중국 화엄종의 대성자인 법장과 동문 수학, 해동 화엄종의 시조가 된다. 의상은 법장과 동등히 어깨를 겨루어 중국 불교의 정점 중의 하나인 화엄의 최고 실력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유학을 포기하고 독자적인 연구의 길을 걸었던 원효는 중국의 화엄과 맞먹는 아니 능가하는 불교의 최고 경지를 구가하게 된다. 아직 서양 문물을 소화하기에도 버거운 우리 현실을 반성해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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