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길  
                                                    

                                                           최하림

남제주에 봄이 상륙했다는 春信이 오고 난 뒤부터  

쩡쩡쩡쩡 해동 소리 산을 울린다 물속의 열목어도 잠에서 

깨어나 꼬리를 들고 강물도 숨 쉬기 시작한다 나는 겨울 

의 굽이에 누워 옴짝달싹 않는다 나는 나이고 너는 너 

다! 그러자 하늘의 통제실에서 경고성 버저가 삐익삐익 

울린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또 밤이 지나간다 부드러 

운 바람이 골짜기를 빠져나가고 수류가 소리를 내기 시 

작한다 나는 더 버티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빠르게 숲을 

뚫고 저수지 길로 내려간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얼음이 

바위 아래 남아 있고 흙을 파며 두더지들이 통로를 내는 

소리 버석버석 들린다 나는, 내 봄이 빠른 것인지 늦은 

것인지 모르면서 계속 들길을 걸어 내려간다

 <풍경뒤의 풍경> 문학과 지성사

어린이날 가족과 나들이를 나갔다 헌책방에서 몇권의 책들과 함께 구매한 시집이 최하림의 <풍경속의 풍경>이다. 십여일 전쯤 나는 신문에서 최하림 시인의 부고를 접했고 그의 시집을 한권이라도 챙겨두어야 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의 <김수영 평전>은 소장하고 있지만 정작 그의 시집은 한권도 갖고 있지 않았다.

시집 전체를 읽지는 못했지만 봄이어서 그런지 위의 '봄길'에 눈이 간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연상했다. 이상화는 봄은 왔는데 나라를 빼앗겨 그 봄을 온전히 느낄 수 없는 설움을 노래했다. 그러나 이 시는 봄은 오긴 오는 것 같은데, 봄이 오면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아직 온전히 봄이 오지 않았다는 핑게로 도피하고 싶은 마음을 그린다. 지금은 남의 땅은 아니기에 봄이 오면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남의 땅이 아니기에 온전히 나의 결단의 몫이다. 그런데 결단의 용기도 빼앗긴데서 오는 소외감 못지 않은 고독감을 수반한다. 그러기에 사르트르는 '자유에 의해 처단당했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던가? 

유독 겨울이 길었던 한반도에도 분명 봄은 올 것이다. 쩡쩡쩡쩡 해동소리 산을 울린다. 그러나 바위 밑에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얼음이 남아 있다. 

최하림은 김현, 김승옥 등과 동시대 인물이고 그들과 함께 문학활동을 했으니 그 기간이 길었고 시인으로서 우리 문학사에 남긴 족적도 뚜렷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과문한 탓에 그의 시를 많이 읽어보지는 못했고 그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그의 시집을 손에 들었으니 나도 참 둔감한 셈이다.    

최하림과 함께 내게 떠오르는 인물은 그보다는 훨씬 덜 알려진 여림이라는 시인이다. 여림이 본명은 아니다. 그의 이름은 여림의 시집 뒤에 해설을 쓴 그의 친구 박형준이 그를 '영진'으로 부르는 것으로 보아 '영진'인 것 같다. 그러나 성은 알수가 없다. 여림이라는 이름은 그의 선생이었던 최하림을 좋아해서 만든 예명이라는 것이다.  

아이러니칼 하게 나는 여림을 통해 최하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연히 읽게 된 여림의 시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다음 시를 보자.

                  실업  

                                               여림

즐거운 나날이었다 가끔 공원에서 비둘기 떼와 

낮술을 마시기도 하고 정오 무렵 비둘기 떼가 역으로 

교회로 가방을 챙겨 떠나고 나면 나는 오후 내내 

순환선 열차에 앉아 고개를 꾸벅이며 제자리걸음을 

했다. 

가고 싶은 곳들이 많았다 산으로도 가고 강으로도 

가고 아버지 산소 앞에서 한나절을 보내기도 했다 

저녁이면 친구들을 만나 여느 날의 퇴근길처럼 

포장마차에 들러 하루 분의 끼니를 해결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과일 한 봉지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아릅다웠다 아내와 

아이들의 성적 문제로 조금 실랑이질을 하다가 

잠자리에 들어서는 다음날 해야 할 일들로 

가슴이 벅차 오히려 잠을 설쳐야 했다 

  

이력서를 쓰기에도 이력이 난 나이 

출근길마다 나는 호출기에 메시지를 남긴다 

'지금 나의 삶은 부재중이오니 희망을 

알려주시면 어디로든 곧장 달려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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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결혼한 적이 없다하니 당연히 아이들이 있을 리 없다.  절망적이지만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이 느껴진다. 시가 너무 명확하기에 무언가 덧붇히는게 오히려 군더더기다. 다음 시는 더 절절하다.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 

                             여림 

종일,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를 생각해 봤습니다. 

근데 손뼉을 칠 만한 이유는 좀체 

떠오르지 않았어요. 

 

소포를 부치고, 

빈 마음 한 줄 같이 동봉하고 

돌아서 뜻모르게 뚝, 

떨구어지던 누운물.

 

저녁 무렵, 

지는 해를 붙잡고 가슴허허다가 끊어버린 손목.

여러 갈래 짓이겨져 쏟던 피 한 줄, 

손수건으로 꼭, 꼭 묶어 흐르는 피를 접어 매고 

그렇게도 막막히도 바라보던 세상, 

그  

세상이 너무도 아름다워 나는 울었습니다.  

 

흐르는 피 꽉 움켜쥐며 그대 생각을 했습니다. 

홀로라도 넉넉히 아름다운 그대, 

 

지금도 손목의 통증이 채 가시질 않고 

한밤의 남도는 또 눈물겨웁고 

살고 싶습니다.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 있고 싶습니다. 

 

뒷모습 가득 푸른 그리움 출렁이는 그대 모습이 지금 

참으로 넉넉히도 그립습니다. 

 

내게선 늘, 저만치 물러서 저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여, 

풀빛 푸른 노래 한 줄 목청에 묻고 

나는 그대 생각 하나로 눈물겨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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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실제로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는 듯하다.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는 찾을 수 없었고 자살을 시도하지만 그 극한의 상황에서 그는 다시 살아야 한다는 걸 느낀다. 나는 고독한데 세상은 왜이리 아름다운가.  

기독교는 지상의 삶이란 건 영생을 위한 준비일 뿐이다. 불교는 삶과 죽음을 윤회라는 거대한 틀에서 융합해 버린다. 유교에서는 삶도 모르는 데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갖는 건 사치라고 하면서 삶의 즐거움을 예찬한다. 그리고 역사속에서의 계속적인 삶을 중시한다. 헤겔은 나폴레옹 등 세계사적 영웅이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는 쉽게 제시하는 듯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좀 설명이 부족하다. 쇼펜하우어는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같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사람은 그냥 사는 것이다. 이를 그는 맹목적인 삶의 의지라고 불렀다.  키에르케고르는 신앞의 단독자로서 자기자신을 찾는건 즉 자기가 되는 것이 진정 살아야 할 이유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은 삶은 곧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것이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자살이라고 이야기했던 알베르 카뮈는 삶이라는 것은 타자에서 비롯된 종교나 사상적 시각에서 보면 끊임 없이 산 위로 돌을 굴리는 시지프의 삶처럼 부조리한 것이지만 삶이란 것은 결국 개인적인 것으로서 자신의 삶 자체를 자신이 긍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나의 삶의 신인 것이다.

위의 시들이 실려있는 <안개속으로 새들이 걸어간다>는 여림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친구가 묶어서 펴낸 유고 시집이다. 그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인이었지만 그외 어떤 곳에도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한다. 그는 고독했지만 삶에 대한 애착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말았다. 그가 자살했는지의 여부는 모른다. 그냥 쓸쓸하게 홀로 죽어갔다고 그의 스승과 친구는 쓰고 있다. 110편의 유작을 남긴 채.

최하림은 그가 침묵의 시인이었다고 말한다.  

"밤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꿈꿀 수 없듯이 침묵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말(詩)을 얻을 수 없다. 침묵은 말의 중단이나 포기가 아니다. 말과 대척적인 존재도, 수동적 존재도 아니다. 그것은 無와 같이 끝없이 존재할 뿐 아니라 모든 有를 끌어안고 거기에 숨을 불어 넣어준다. 그래서 침묵은 무엇이 태어나려고 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임마뉴엘 칸트는 밤하늘의 별을 볼 때마다 경이감에 사로잡힌다고 했는데, 이때의 경이는 별의 빛, 즉 침묵의 빛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최하림에 따르면 여림의 시들은 경이로운 침묵의 빛인 셈이다. 이제 여림도 그의 삶과 죽음을 애닯아 하던 최하림도 영원한 침묵 속으로 들어갔다. 침묵의 빛을 남긴 채.  절망 속에서 발한 침묵의 빛이 오히려 삶에의 의욕을 채찍질하는 듯 하다.

겨울, 북한강에서 일박  

                                        여림

흐르는 강물에도 세월의 흔적이 있다는 것을 

겨울, 북한강에 와서 나는 깨닫는다 

강기슭에서 등을 말리는 오래된 폐선과 

담장이 허물어져 내린 민박집들 사이로 

하모니카 같은 기차가 젊은 날의 유적들처럼 

비음 섞인 기적을 우리며 지나는 새벽 

나는 한 떼의 눈발을 이끌고 강가로 나가 

깊은 강심으로 소주 몇 잔을 떨구었다 

조금씩 흔들리는 섬세한 강의 뿌리 

이 세상 뿌리 없는 것들은 잠시 머물렀다 

어디론가 쉼 없이 흘러가기만 한다는 것을 

나는 강물 위를 떠가는 폐비닐 몇 장으로 보았다 

따뜻하게 안겨오는 강의 온기 속으로 

수척한 물결은 저를 깨우며 또 흐르고 

손바닥을 적시고 가는 투명한 강의 수화, 

너도... 살고 싶은 게로구나 

깃털에 쌓인 눈발을 털어 내며 물결 위로 초승달 

보다 더 얇게 물수제비뜨며 달려나가는 철새들 

어둠 속에서 알처럼 둥근 해를 부화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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