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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ㅣ 비룡소 걸작선
생 텍쥐페리 지음, 박성창 옮김 / 비룡소 / 2000년 5월
평점 :
책 속 삽화에 그려진 금발 머리에 펜싱용 같은 검을 든 <어린 왕자>는 솔직히 이국적이었다. 솔직히 어린 왕자가 살고 있다는 '소혹성 B-612호'같은 별 이름엔 관심도 없었다. 어린 왕자 무릎까지도 못 미칠 정도로 작은 화산 두개와, 장미꽃 한송이가 살고, 가끔씩 바오밥나무 씨앗이 날아오는, 그리고 해가 마흔 세 번이나 지는 아담한 별. 이게 아이들과 어른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어른들이 그렇다. 새로 사귄 친구 얘기를 하면 꼭 숫자에 관한 얘기를 꺼내지 않더라도, 정작 그 친구의 내면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나쁘다고 생각할 수만은 없다.
내가 좋아하는 글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는 흔히 어른들은 말과 행동이 다르다고 불평을 한다.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아이들은 꿈과 희망, 그리고 미래를 보지만, 어른들은 현실을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을 비난하면 안된다. 현실을 본다는 것은 의외로 잔혹하다'. 어른들과 우리는 분명히 통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이 세대 차이인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도 언젠가는 어른이 된다.
'어린 왕자'가 지구로 오기전에 만난 사람들. 임금님, 허영심 많은 사람, 술꾼, 사업가, 가로등 끄고 켜는 사람, 그리고 지리학자…….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이다. 임금은 언제나 남 위에 군림하고 싶은 사람. 허영심 많은 사람은 터무니 없는 망상 속에 빠진 사람. 술꾼은 허무하게 삶을 흘려 보내는 사람. 사업가는 물질 만능주의자. 가로등 끄고 켜는 사람은 자아를 잃어버린 사람. 그리고 지리학자는 이론에만 치중하는 사람……. 하지만 '어린 왕자'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는 지구로 오게 되었다. 그는 사막에서 노란뱀과 볼품 없는 꽃을, 장미 정원에서 장미꽃들을 만났다. 하지만 내가 주의 깊게 읽은건 역시 여우와의 만남이었다.
나는 여우와의 만남에서 내 마음속에 깊게 새긴 몇가지 구절을 적어보려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 '무엇이든지 마음의 눈으로 볼 때 가장 잘 볼 수 있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안 보이거든'. 귀가 들리지 않는 자는 마음의 귀로 듣고, 눈이 보이지 않는 자는 마음의 눈으로 본다. 흔히 도인이나 현인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마음으로 보라. 육체의 눈은 보이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나쁜 것도, 좋은 것도, 물질적인 것도……. 하지만 마음의 눈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마음은 무방비한 육체의 눈과 다르다. 투명한 막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걸러낸다. 하지만 육체의 눈으로 본 정말 두렵고 나쁜 것은 그 막까지도 깨고 들어와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게 아닐까.
그리고 '너의 별에 핀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한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지.' 누구나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렇지만 나는 나의 죽음보다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의 죽음을 더 두려워한다. 나 혼자서 보낸 시간은 즐겁지 않아서 잊혀지기 마련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보낸 시간은 영원히 잊을 수 없으니까. 그래서 내가 죽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죽는게 더 슬플 것 같다.
이렇게 지구로 온 '어린 왕자'의 회상이 끝나고, '어린 왕자'는 육체를 놔두고 자신의 별로 떠나갔다. 그건 죽음이지만 죽음이 아니다. 이 세계에선 죽음이지만, '어린 왕자'의 세계에선 돌아가는 여행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다. 비행사가 나이고, '어린 왕자'는 나의 소중한 사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사실은 육체 없는 '어린 왕자'가 아니었을까. 그들이 살고 있던 어딘가에서 육체를 가지고 '지구'라는 별로 잠깐 여행온 게 아닐까. 그리고 시간이 다 되면 육체를 버리고 원래 자신의 별로 돌아가는게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죽음은 그리 슬픈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먼 훗날 나도 육체를 버리고 나의 별로 돌아가다가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내가 죽어가는 그 사람에게 웃으며 다시 만나자고 말할 수 있을지…….
저 하늘 어딘가에서 지금도 어린 왕자는 웃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