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역사사랑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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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이란 이름만으로 책에 신뢰가 가는 까닭은 전에 읽은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때문이다. 그 책만으로도 저자의 이름은 내 가슴에 새겨졌다. 저자가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라면 밤이 새도록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아 이 책을 손에 들고서는 멈추지 못하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사랑(舍廊)은 대화의 장(場)

저자를 통해 사랑이라는 것이 우리 고유의 용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방은 서민에게는 노동의 공간이었고 반가(班家)의 사랑채는 손님 접대를 기본으로 하여 교육기관, 정치 대학원이기도 했다. 사랑의 가장 큰 기능은 대화의 장이라고 한다. 사극에서도 사랑은 주인과 손님이 편히 이야기를 나누는 곳으로 자주 비춰준다.

 

현대사회에서 대화단절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사랑(舍廊)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를 묶어 우리에게 내놓으며 이덕일이 바란 건 대화를 되살리는 것이었다고 한다. 정다운 대화 속에는 분명 역사의 이야기도 끼어있을 것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

국사를 처음 배울 때 나오는 것은 역사에 대한 정의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없는 화'라는 E.H 카의 정의는 고등학교때까지 국사시험 공부를 할 때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너무 많이 들어서일까? 역사는 과거의 산물이 아님을 공부를 해놓고도 그것을 잊고만다. 역사는 과거의 것이므로 나와는 상관없다는 자세를 취하는 이가 바로 나였다. (학교 다닐 때 달달 외웠다고 해서 그것을 삶에 적용시키지 않는 것은 내 나쁜 머리탓 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짧은 삶을 살아오면서 역사만큼 현재에 깊숙히 들어와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옛 선비들의 말씀에 지금 들어도 하나도 틀린 소리가 없고 요즘은 역사 속 위대한 인물인 경제ㆍ경영의 모델이 되고 있다.

 

역사를 알지 못하고는 현재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글이 아니라 몸소 깨닫는 것을 이제야 하고 있다. 이덕일이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픈 것도 과거를 제대로 알아야 현재에 잘 대비하고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어른들의 말씀을 귓등으로 흘려듣던 시절을 이제와 후회하는 것처럼 역사에 대해 배울 때 흥미를 느꼈다면 참 좋았을텐데란 아쉬움이 남는다. 아쉬움이 남는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역사만큼 알면 알수록 넓은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 또 있을까? 역사 속 세상은 다행히 동화 속 세상이나 환상세계를 가는 것만큼 힘들지 않다. 그저 이 책을 보며 눈을 뜨고 마음을 열면 되는 것이다.

 

#역사는 우리의 관심에 목말라한다

책은 여섯 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역사 속 숨겨진 이야기와 안타까운 이야기 그리고 보석처럼 빛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떻게 모르고 살았을까 싶은 이야기가 이리도 많은지 그동안 역사에 무지했던 내 가슴이 뜨끔한다. 저자는 대체적으로 역사와 현재의 정치나 경제의 상황, 그리고 외국이 우리나라를 대하는 자세등을 비판하며 제대로 선 대한민국을 바라고 있고 그러기 위해 국민들의 관심이 첫째로 필요하다고 말한다.

 

국민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의 역사를 모른다는 것은 뿌리 내리지 못하고 떠있는 부유식물과 다를바 없다. 내 나라의 역사를 알아야 제대로 내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깨달았다. 이 책은 짤막한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책을 통해 역사의 모든 것을 알았다고 하는 것은 수박 겉핥기도 하지 못한 것이다. 다만 책을 읽고 나서 역사에 관심이 생기고 그 관심을 차근차근 찾아보면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역사의 한 부분이고 태어날 때 역사의 씨앗을 품고 나왔을 수도 있다. 그 씨앗을 가슴에 품고 싹이 나게 하고 나무로 자라게 만들어 열매를 맺는 일을 해야하는 건 아닐까? 역사가 꽃 피는 나라,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중국, 일본이 우리나라를 역사왜곡으로 넘볼 일은 없을 것이다.

 

쓰다보니 책 속 이야기가 부족한 것 같다.

하지만 이건 책을 읽는 다음 독자를 위한 배려이기도 하다. 절대 다른 이에게 빌려주지 못하고 곁에 두고서 손때가 뭍게 해주고 싶은 책이다. 책을 읽으며 다산 정약용의 독서법이 부러웠다. 한 글자라도 모르는 것이 나오면 널리 고찰하고 세밀하게 연구했다는 정약용, 그처럼 역사를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부디 오래가길 의지가 약한 나에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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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아직 멀리
세오 마이코 지음, 박승애 옮김 / 노블마인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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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눈을 뜨고는 하루가 시작되었음에 절망하고 눈을 감고 잠이 들때는 내일이 다시 올거라는 것에 절망하는 23살의 여자 치즈루.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하고 선생님께 칭찬을 들으며 화가가 되려는 꿈을 키웠지만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참하다는 인상이라는 소리를 자주 들어왔다는 이유로 자신의 적성과는 상관없이 영업직에서 일하는 아가씨이다. 영업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상대방이 필요없다는 말에 바로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내가 보기에는 착하지만 상사가 보기에는 그리고 치즈루 자신이 보기에는 한심한 모습이다. 그런 생활의 연속이다보니 스스로가 스스로를 위로하는데도 지쳐버리고 삶의 의욕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더이상 생겨나질 않는다. 자살을 결심하는 치즈루. 불면증 치료약에서 수면제 한알 한알을 모아 통장의 돈을 모두 가지고 여행을 떠난다. 기발할 것도 없는 자살여행을.

 

 치즈루를 통해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그녀와 나를 동일시까지는 무리더라도 비슷한 점이 많다며 그녀를 이해할지도 모른다. 삶이란 것이 힘에 부치는 사람들에게 일탈은 꼭 한번 해보고픈 일이 되었다. 그것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칠 때 병원에서건 주위사람들이건 대다수가 여행을 권한다. 그것은 왜일까? 여행을 하게되면 시간은 분명 흘러가지만 내 현재에서 빠져나와 시간이 정지해버린 느낌이 든다. 그 정지해버린 시간 속에서 우선 육체를 쉬게 한다음 정신을 쉬게 한다. 한걸음 물러나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은 사물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게 할 때도 있지만 사물을 사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사물을 연관시켜서 혹은 주위환경과 사물을 연관시켜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나무는 숲에 있지만 나무 속에서는 숲이 보이지 않듯이 삶을 제대로 보고 싶다면 삶의 밖에서 한번쯤은 보아야하지 않을까? 치즈루에게 숲을 보여준 장소는 깊은 산속에 위치한 다무라 민박이다.

 

 다무라 민박의 주인은 다무라이다. 수더분한 인상의 다무라는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시자 도시에서 내려와 부모님이 하시던 민박을 운영한다. 운영이랄 것도 없이 손님은 거의 오지 않는다. 치즈루가 여기에 머문 이유는 단 하나. 인적이 없는 북쪽의 민박집을 원했기 때문이다. 죽기에 번잡한 곳은 어울리지 않으니. 다무라씨와 어색한 인사를 하고 죽을 준비를 하는 치즈루에게 수면제는 자살을 성공으로 이끌까? 제목에서 보이듯이 천국은 아직 멀리 있으니 치즈루는 죽지 않는다. 하루종일 자는 그녀를 아무 의심없이 하루종일 재우는 다무라씨를 보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다무라씨는 상당히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생각이 든다. 천하태평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고민하고 아파하지만 살아가면서 자신이 행복을 찾으려는 다무라씨의 모습에 빙긋이 미소가 지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싶다.

 

  책을 덮는 순간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책의 내용은 끝났지만 입가에 웃음을 머금으며 치즈루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다무라 민박을 향하는 기차를 타면서 빙긋이 미소지으며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적는 치즈루의 빛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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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에 남은 아름다운 날들
베스 켑하트 지음, 윌리엄 설릿 사진, 공경희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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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두번이나 읽고 나서야 글에서, 사진에서 푸르름과 바람의 숨결이 느껴진다. 이 책을 첫번째로 읽었을 때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결정 내릴 일들은 머리 속을 갑갑하게 누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라는 질문에 요리조리 피하느라 혼자서 끙끙대며 지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책을 읽었는데 글이 무엇을 말하는지 저 사진이 내게 보여주려는 것은 무엇인지 알기가 어려웠다. 느끼기 어려웠다고 해야하나.

 

 얇은 책이어서 쉬이 쉬이 읽혀지기는 했으나 책을 덮고나서는 내가 무엇을 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고민에 빠졌다. 왜 어떠한 감정도 내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내용이 어려워서도 아니고 읽을 때 소란스런 곳에서 읽은 것도 아닌데 글자만 읽었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은 왜일까? 작가가 전해주려는 챈티클리어 정원(Chanticleer Garden)의 여유로움이나 살아있음이, 그곳의 생생함이 내게 전해지지 않았던 것은 내 속에서 책에 불어넣을 숨이 부족했음이 아닐까. 숨을 쉬고 살아가고 있음에도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장담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건가. 내가 쉬는 숨으로는 작가가 내게 준 선물을 살아 숨쉬게 할 수가 없었다.

 

 책은 작가와 독자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이 그러했다. 내게 챈티클리어 정원에서 보고 들었던 모든 것을 작가는 마술을 부려 작고 얇은 이 책에 넣어보내주었다. 마술에서 중요한 것은 콧기름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메마른 삶을 보내고 있었던 내게 콧기름이 어디 나오겠는가. 마음이 말랐다는 것을 그것을 내가 메마르게 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책에게 감사의 뜻으로 콧기름이 나오도록 콧바람을 쐬러 가주었다. 콧바람을 쐬다보면 콧기름도 나올테니 그럼 나는 그 마법의 보따리를 풀 수 있지 않을까하고 바라면서.
 

 챈티클리어 정원은  나무가 숨쉬고 바람이 통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마음에 강가가 보이는 의자에 앉아 책으로 여행을 떠나보았다. 작가의 눈길의 닿는 곳, 발길이 닿는 곳, 손길이 닿는 곳을 눈을 감고 상상해보기도 했다. 시원한 강바람을 전해주는 강에게도,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에게도, 두발을 디딜 수 있게해준 땅에게도 눈짓으로 고맙다고 말하며 책을 덮어두었던 펴고 읽기 시작하자 콧바람의 힘이었을까. 사진들이 하나 둘 생생하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이런 색이었구나. 소녀가 있는 연못의 물은 저렇게 투명했구나.'라고 혼자 말하며 신이 나서 내 주변의 풍경을 눈으로 찍은 뒤에 눈을 감고는 그곳의 사계절을 상상해보았다. 겨울이면 죽은 것 같은 나무도 강도 부지런히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금 찬란한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 말이다.

 

 미처 알지 못했다. 자연을 둘러본다는 것이 이토록 폐에 상쾌한 숨을 가득 차게 해주고 머리 속을 맑게 해주고 가슴 속을 따뜻하게 해주는 지를. 알고 있었는데도 잊고 지낸 것일지 모른다. 고향집에 내려갈 때 상쾌한 공기로 인해 고향에 온 것을 알며 두근거리던 때도 있었으니 말이다. 어떻게 잊어버렸을까? 무엇이 그리 바쁘다고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자연을 잊어버렸을까?

 

 작가는 마흔의 나이를 넘겨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이 책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마흔이라는 나이는 어떤 나이일까? 십대때 20대인 이모에게 물었었다. "이모의 나이가 되어도 고민이 많아?" "너가 지금 하는 고민은 그때면 기억도 나지 않을만큼." 20대의 나. 이모의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십대때 어떤 고민을 했는지는 꺼낼 틈도 없이 20대의 고민에 푹 빠져살고 있다. 20대의 나 30대의 이모에게 질문한다. "이모 나이가 되어도 삶이 이렇게 힘이 들어?" "너 30살 되면 니가 한 질문 그대로 해주마." 하며 웃기만 하는 이모. 이제 곧 마흔이 되는 이모. 삶이라는 것에 내가 아는 누구보다 많이 고민하던 이모.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이모는 둘째 아이가 커서 자신의 손이 필요하지 않을 때가 무서울 것 같다고 말한다. 그때는 자신과 마주해야함을 피할 수 없을테니 두렵다는 이모. 하지만 믿는다. 우리 이모는 당당히 자신의 삶에 맞설 것임을.

 

 책을 읽으면서 왜 사람들이 열심히 이룬 지위, 명예등을 버리고 농촌으로 가는 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다. 과연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내 생애 남은 날을 아름답게 보내기 위해 할 일은 무엇일까? 자연 속에서 작가가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자연의 선물을 받았기 때문일까? 자연 속에서 고민을 떠올리면 나를 한동안 짓누르던 고민이 한 없이 작아지게 느껴진다. 바쁜 일상 속에서는 고민이 고민을 불러서 덩어리가 자꾸만 부풀어져서 고민에 눌려 숨쉬기도 힘이 들었는데 자연의 신비 앞에서는 고민이 한없이 작아져서 어디서 엉켜있는지와 어떻게 풀면 되는지 보여 고민을 해결할 수 있다. 한 걸음 물러나서 보면 전체가 보이는 것과 비슷한 이치가 아닐까? 덕분에 요즘 나를 짓누르던 고민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자연과 일상을 떨어뜨려 놓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닐까한다. 사람은 자연의 일부이니까. 자연 속에서 나를 찾는 것은  선물을 풀어보는 것처럼 기대되고 두근거리는 일이다.

 

 

 

 

 

 딱딱한 책상에서 이 책을 읽기 보다는 자연의 숨결을 느끼면서 읽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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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행복하세요?
알렉스 로비라 셀마 지음, 김수진 옮김 / 21세기북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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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근길 행복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렇다고 대답하는 직장인은 얼마나 될까? 먹고 살기 바빠죽겠는데 행복을 찾을 틈이 어디냤는 핀잔이나 듣지 않음 다행이지 않을까? 책의 제목을 보고 스스로에게 질문해 본 결과 나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행복이란 말은 출근 할 때가 아니라 퇴근 할 때 더 많이 내 입에서 나왔다. 퇴근 한시간 전부터 시계만 바라보며 시간이 빨리 가면 참 행복하겠다라는 말을 얼마나 되뇌였던가. 학창시절에 등교때는 그리 무겁던 발걸음이 하교할 때는 깃털만큼 가벼워지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이 처한 순간을 즐기는 것은 왜이리 어려운 걸까?

 

 왜 사람들은(나를 포함한)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으로 가는 길이 행복하지 않는걸까? 직장에 다니고 있는 지인들과 이야기를 해봐도 긍정적인 말을 듣기는 애초에 포기해야한다. 직장생활을 이야기 할 때는 다들 스머프에 나오는 투덜이 스머프가 된다. 누군가에게는 이상적인 직장에 다니는 사람도 투덜대기는 마찬가지인 것을 보면 이것도 공평하다고 말해야하는건가? 직장이 참고 다니는 곳으로 바뀐 것은 언제부터 일까? 어렸을 때 장래희망이었던 꿈들이 이루어지지 않아서일까?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일수록 사회적 스트레스로 인해 고독감이 높아진다는 것을 보면 직장이 문제가 아니라 아니란 말인가? 아니면 누구의 말대로 그저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일까?직장이 문제가 아니라면 문제는 자기자신이 된다.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에 대한 답변이 책에 나와있다. 

 

 저자는 회사에서 인정받는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어느 순간 그 행위에 짜증과 허무감을 느끼고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나(자신)와의 대화 시간'을 갖으며 일기를 써내려간다. 책은 총 25개의 일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저자는 7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자신과의 대화를 해오면서 진정한 삶의 방향을 찾아내고 싶은 이에게 이 글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저자가 말하고픈 것은 무엇일까?

 

기억에 남은 하나 - 먹고 살기 위해 일하지 말것.

 

 저자는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은 인간답게 인생을 살아가기를 포기했다라는 전제가 포함되어있다는 무시무시한 말을 한다. 얼마나 저말을 많이 썼던가. '먹고 살려면 할 수 없지모' '먹고 살기 힘들어서 어디 살겠냐'라는 말을 써본 적이,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저자는 먹고 살기 위해 산다는 말은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삶을 망친다고 말하고 있다. 태어날 때 이미 사람은 먹고 살기 위해 태어났기에 더이상 먹고 살기 위한 인생을 영위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지말고 자신만의 삶의 가치를 발견하여 그것을 위해 사는 것이 더 큰 행복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기억에 남는 것 둘 - 건전한 이기주의

 

 행복이라는 것은 내 스스로 주체로써 존재할 때라야 찾아온다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나를 위한삶을 살아야 나도 타인도 행복해 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원하는 지를 정확히 파악해야한다. 타인이나 사회의 잣대에 맞춰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진정 내가 바라는 나를 찾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렇기에 행복해지기란 쉽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자신을 바로 보고 자신의 능력을 깨닫는 것. 그것이 건전한 이기주의의 시작이다.

 

 

 저자가 말해주는 행복해지기 위한 방안들도 좋았지만 이 책에서 내가 좋았던 것은 군데 군데 나오는 여러 명언이나 글귀였다. 저자의 글을 보면서 적용시키기에는 아마 무리가 있어보여 명언이나 글귀에 좋은 점수를 주는지도. 책의 내용을 적용할려면 적어도 먹고 사는 것에서는 해방되어야하는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 살면 안된다고 하지만 그러기에는 내 상항에서는 저말이 배부른 소리로 들리기에 공감을 하기에는 부족했다. 아마도 안정된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직장인에게는 좋은 가르침이 될 책일 듯하다. 안정된 직장을 갖게 되면 한번 더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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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 1
송은일 지음 / 문이당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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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를 만난 건 책보다 신문이었다. 반야를 작가 송은일의 인터뷰가 신문에 실렸는데 작가의 시원하다 싶을만큼의 대답이 나를 두근거리게 만든다. 현실성이 없는 주인공들을 만들어낸다는 비판에 작가는 "지리멸렬한 건 현실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요?" 라고 되려 당차게 쏘아 붙인다.

 

"소설 속에서라도 씩씩하고 아름답게 사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요. 비현실적이고 허황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어요. 이야기가 좋은 게 바로 그런 거 아니겠어요?" (중앙일보) 라고 묻는 작가의 질문에 나는 보이지도 않을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 까닭은 희망을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죽음에 관한 책을 읽더라도 죽음보다는 열심히 살고 싶다는 희망에 휩싸이고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배척당한 이들의 이야기를 읽더라도 포기보다는 그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픈 열정에 휩싸이는 것이 독자들이 아닐까? 송은일이란 작가가 만들어낸 세상은 어떤 행복과 희망을 전해줄지 그것이 궁금해졌다. 우리가 가보고 싶은 네버랜드가 어찌 동화 속에서만 존재하겠는가? 이 소설 속에서 그곳을 찾지는 않을까란 기대가 사신총의 등장으로 두근거린다.

 

그런 책이 있다. 속에 든 이야기는 아리고 슬픔에 복받치는데 읽는 속도가 느려지지 않아 등장인물들의 한숨이 뺨을 스치기도 전에 다른 이의 삶을 바라봐야 했다. 서사의 힘이란 이런 것인가!

 

신문에서 작가를 겨냥해 말한 것과는 달리 주인공 반야는 완벽한 인물이 아니었다. 7 살때부터 무녀가 된 반야의 삶은 기구하고 그리 살라면 못 살만큼 가시밭길 이다. 그저 남의 앞일을 봐줄 수 있을 뿐이다. 무녀이나 굿은 못하는 반야, 무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답고 한송이 꽃을 닮은 반야, 맑은 영혼이나 주위 사람들로 인해 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하는 반야이다. 세상은 꽃이 살아가기에는 쉽지 않은 세상이다. 영롱히 빛나는 꽃이라면 그 길은 더 힘들다. 누구나 그 꽃을 뜯으려 하고 그 빛을 가지려 한다. 반야는 평범함을 꿈꿀 수 없는 슬픈 여자이다.

 

그녀를 품었으나 그녀를 갖지 못한 남자들이 있다. 반야를 보고 떠오른 시가 오규원의 <한 잎의 여자>였다.

 

' ...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 '

 

자신의 생애를 반야에게 쏟아 붇고도 부족하다 여기는 동마로는 항상 뒤에 서 반야의 뒷모습만을 보고, 그녀로 인해 세상 최고의 달콤함을 맛 보았던 임인과 근휘는 반야로 인해 삶의 시작과 끝을 보고, 반야를 굴복시키고자 한 김학주 그리고 첫 눈 같은 남자 무영. 모두 반야를 꿈꾸지만 그 꿈은 아득하니 꿈길같다.  무녀이기에 아무에게도 자신을 내어줄 수 없는 반야는 읽는 이로 하여금 애달프게도 하고 동마로를 볼 때면 화가 나기도 하고 결국에는 가슴을 저리게 만드는 여자이다.

 

반야의 이야기를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사신계이다. 모든 인간이 동등하다는 것을 진리로 삼으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으나 세상의 그릇됨을 바로잡으려는 조직이다. 작가가 만들어 냈다는 사신계는 내게 새롭지가 않았다. 그 의도는 좋았으나 '동학'과 겹쳐져 생각난 탓인지 혹은 사신계와 반야의 움직임이 세상을 바꿀만큼의 반향을 이끌어내지 못해서인지 내게는 기대한만큼의 네버랜드를 꿈꾸게 하지 않았다. 작가가 현실성이 없다는 말에 동조를 하지 못함은 이것 때문이다. 작가가 현실성이 없었다면 사신계는 세상을 바꿨어야 하지만 세상을 그리 쉽게 바꾸기 어려움을 작가도 독자도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씁쓸한 것은 왜일까...그저 공상이라도 이뤄주길 바라고 있었던 탓일까...

 

소설 뒷부분에서 머리가 울리는 충격을 받았다. 소설 자체가 허구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느정도 현실이 들어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지 않을까. 하지만 책을 읽는동안 노론과 소론의 이야기로 조선 후기라는 생각은 했지만 뒷부분에서 동궁의 미래를 반야가 봤을 때 그것은 현실에 있음직한 일이 되었다. 물론 그것 또한 작가가 만들어 낸 허구일테지만. 짐작가는 이가 나왔다고 흥분한 나는 아직도 소설을 바로 읽을려면 멀은 것 같다.

 

책의 소재도 몰입력도 좋았지만 뒷심이 부족한 것같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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